<기사> 나라 지키기 위해 태극기 든 백성들, 왜 3월 1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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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지키기 위해 태극기 든 백성들, 왜 3월 1일이었나
▲ 여행이야기 박광일 | |
ⓒ 최윤실 |
역사는 뒷담화다. <독립만세 토크쇼, 정재환의 3.1 운동 이야기>의 첫 번째 시간에 초대된 여행이야기 대표인 박광일 선생님은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전한다. 모든 음식을 맛있게 잘 먹어서 특별히 맛집에 대한 기억은 하지 않게 되지만 역사적 상상력이 생겨나는 유적지에 대한 기억은 절로 난다는 박광일 선생님이다. 박광일 선생님은 역사가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마치 주변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역사 인물들을 그려보라 조언한다. 왜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무슨 사연이 있었을지 구성을 해 보면 그들의 아픈 곳을 찾아내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마련한 <독립만세 토크쇼-정재환의 3.1운동 이야기>의 포문을 연 주제는 '왜 3월 1일인가'다.
3.1운동의 시발점은 무엇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이 아니라 3월 1일로 날짜를 옮긴 까닭은 무엇이었는지 풀어본다. 나라를 빼앗긴 무능한 군주라는 평을 들었지만 고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 백성들에게 준 영향과 윤치호의 편지에서 주장한 독살설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식민지 백성으로 살 수 없어서 손에 단지 태극기만을 들고 만세를 외친 비폭력 운동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고, 이후 석 달 동안 대한민국, 만주, 연해주, 미국으로까지 퍼져 전 민족의 동참 물결로 이어갈 수 있었던 의미를 재평가 해 본다. 역사 칼럼리스트이기도 한 박광일 선생님은 3.1운동에 무력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점, 지도자들의 선택이 나약했던 점 등을 들어 3.1운동에 대해 의미를 축소하는 의견에 대해 조목조목 나름의 논리를 펼치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여행이야기 박광일 | |
ⓒ 최윤실 |
3.1운동이 한 날 한 시,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의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었던 핵심은 독립선언문이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은 발표 직전 중대한 위험에 봉착한다. 3.1 운동 자체가 무산 될 수 있는 위기의 순간, 손병희 선생과 독립선언문을 제작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독립선언문을 지켜낼 수 있었는지, 그 일은 이후 어떤 나비효과로 나타났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해준다. 눈에 보일 듯이 설명을 해 주는 박광일 선생님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언제나 등에 식은땀이 솟을 정도로 짜릿하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운명처럼 낭독된 독립선언문은 학생과 민중 시위로 연결되면서 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해외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서구열강들은 지배했던 식민지들에게 미칠 파급을 두려워한 나머지 3.1 운동을 폄하하고 숨겼는데 그 치졸한 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에서 조차 우리를 외면했던 일련의 의도들이 그 때의 백성들에게 어떤 아픔을 주었을지 생생하게 다가온다.
비폭력 평화주의로 지속되었던 3.1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폭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스스로 깨들은 백성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며 대한민국의 법통이 되는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는 근간이 된다. 1920년대 만주나 상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공부를 많이 하거나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3.1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독립만세 토크쇼, 정재환의 3.1 운동 이야기> 첫 시간은 현재까지도 역사의 면면을 관통하고 있는 3.1운동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와 3.1정신이 오늘날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독립만세 토크쇼, 정재환의 3.1 운동 이야기>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함께 한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최윤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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