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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1편)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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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환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5,108회   작성일Date 16-09-27 07:35

    본문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포덕 157년 9월 21일 ~ 24일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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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전북 정읍시 내장동 392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탑으로, 1997년 5월 11일 건립되었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 등으로 만든 탑으로, 주탑과 부탑으로 되어있다. 거창석(居昌石)으로 만든 주탑의 4각뿔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을 상징하고, 흰 대리석은 민족봉기의 정신을 상징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894m로 조성하였다. 상층부에 3단 3단 금(金)태는 고부 농민봉기, 3월 백산봉기, 9월 삼례봉기를 상징한다. 문경석(聞慶石)으로 만든 부탑은 부탑은 사민(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온 백성들의 평등, 수평사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4개의 원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원기둥은 높이 1,100m, 지름 85cm 규모이다. 이 기념탑은 정읍 출신의 설치미술가 전수천(全壽千)이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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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주년 기념탑 주변의 꽃무릇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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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착으로 도착하신 화성당 김정화 동덕님을 모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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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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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일정(21일)으로  '백주년 기념탑' 참배에 나선 '천도교 수도회'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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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방문한 곳은 '동학혁명모의탑'

    전봉준 등이 거사를 모의한 뜻을 기려 모의 장소인 고부 주산마을 입구에 세운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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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고부농민봉기를 계획한 동지들의 이름을 사발 주위에 둥글게 써 넣어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한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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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보 아래에 새로 보를 쌓은 1893년 가을 들어 고부의 농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배들평에 논을 가진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이 첫해에는 만석보의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한 두락에 두 말, 나쁜 논에는 한 두락에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거두어들이자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수세미 7백여 섬을 예동, 두전, 백산 세 곳에 쌓아 놓고 있었으니, 이것을 바라보는 농민들은 한숨과 원성이 뒤섞여 나왔다. 만석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배들평 농민들은 정읍천 아래에 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를 동명을 따라 예동보라 부르기도 하고 가뭄에도 물을 대서 풍년농사를 지은 탓으로 만석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조병갑이 부임해 와서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이 강제로 높은 보를 쌓았는데,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해 상류의 논들은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이 보야말로 원한의 대상이었는데 수세까지 거두니 아무리 양순한 농민들이라고 한들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조병갑의 불의와 비정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이 짓거리야말로 자신을 ‘막된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농민들은 40명 또는 60명씩 무리를 지어 고부관아로 가서 보세의 감면을 진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들을 내쫓거나 잡아 가두었다. 이렇게 되자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그리고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며 어디서든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에 이곳 농민군 지도자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고부관아에서 세 마장쯤 떨어진 곳에 서부면 죽산마을(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주변 30리 거리는 남의 땅 밟지 않고 다닌다는 송두호(1829~95)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전봉준의 처가도 송씨인데 이곳은 송씨들의 집성촌이었고 또 전창혁이 매를 맞아 죽기 직전 고부관아에서 쫓겨났을 적에 전봉준이 업고 이 마을로 왔다고도 한다. 전창혁은 여기서 치료를 받다가 죽어 이 마을 언저리에 묻혔다고 마을 노인들은 말한다.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전봉준, 송두호 등 주변의 농민지도자 20여 명이 11월 초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일을 모의하고 있었다. 이들은 방 가운데 백지를 펼치고 백지 중앙에 큰 사발을 엎어 놓고 사발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고부의 이집강(관가의 일에 협조하는 마을 책임자)에게 돌리는 통문을 적었다.

    20명이 서명한 이 사발통문의 끝에는 행동강령 4조항이 적혀 있었다.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의 목을 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해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구실아치를 징치할 것
    4.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이것이 최초로 조직적 봉기를 주도하고 행동 목표를 밝힌 문서이다. 이들 20명 중에 송 씨가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원로격인 송두호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 가운데는 송두호의 큰아들 대화(1858~1919, 본이름은 주언. 대화는 자인데 당시 변란 지도자들은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와 둘째 주성(1863~1924) 그리고 재종질 주옥(1853~95) 등이 끼어 있었다.


    송두호는 예순다섯 살이나 되는 노인이어서 서른다섯 살의 송대화(宋大和)가 행동 책임을 맡았다. 더욱이 그는 키가 9척이고 힘이 센 장사로 유명했다. 이 마을에는 여덟 장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줄포의 세미를 나를 적에 한 섬을 거뜬히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것으로 힘자랑을 했다. 여덟 장사에는 죽산마을의 대성인 송 씨를 비롯해 임 씨, 황 씨 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사발통문의 서명에도 함께했다.

    고부 일대에는 이 서명자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1894년의 새해가 밝았다. 10일 밤 10여 마을의 풍물을 동원해 배들평에 자리 잡은 예동에 걸군을 모으니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 군중은 사발통문 서명자들의 지도 아래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조병갑은 이 소식을 듣고 변장을 하고서 재빨리 도망쳤다. 관아로 밀려든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어 억울한 죄인을 풀어주고 군기고를 열어 총기를 꺼냈다. 이들은 날이 새자 말목 장터로 나가 농민들을 더 모으고 이어 새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쌓아 놓은 보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이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송대화가 여기에 앞장을 섰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은 무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해 다시 고부로 진출해 백산에 웅거했다. 이때 송대화는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그 뒤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증언에 따르면, 유식하고 힘이 센 그에게 농민군을 훈련시키는 훈련대장의 직책이 주어졌다고 한다.(주산마을에 사는 임두영의 증언)

    이로 보아 그가 집강소 기간 농민군의 훈련을 맡았고 9월의 2차 봉기에도 열렬히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2차 봉기 때 공주전투가 끝난 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에 잡혀가 죽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나주에 초토영을 두고 농민군을 체포해 서울로 보내기도 하고 현지에서 처형하기도 했다. 송두호와 송주옥은 나주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때 사발통문의 서명자 중 9명이 나주, 전주, 서울에서 처형을 당했으나 몇몇은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송대화는 마지막 단계에서, 전봉준으로부터 “너라도 살아남으라”는 당부를 받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때쯤 죽산마을의 송두호 집과 그 앞에 있는 송대화의 집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었고 죽산마을 역시 역적의 소굴이라 해 쑥대밭이 되었다.

    송대화는 나주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전북 옥구군 임피로 달아났다. 그곳 어느 집에 들어가 장승팔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했다 한다. 그가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은 어머니 성을 따른 것이다.

    머슴 송대화는 힘도 세고 일도 잘한 탓으로 주인의 사위가 되었다. 원래 그는 전처 박씨에게서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이 후처 강씨에게서도 아들 하나를 두었다. 늦게 아들을 두었다 하여 이름을 뒤 후 자가 든 후섭(1911~?)으로 지었다 한다.

    이렇게 도피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때였을까. 그는 조심스레 고향을 찾아들었다. 그의 동생 주성은 용케 살아남아 고향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집터에는 임 씨가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그는 집도 없고 땅도 모조리 빼앗겼기에 먹고살 길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남의 일을 해주며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10여 년을 고향에서 보낸 뒤 외로운 생애를 마감했다.(임두영의 증언)

    동학농민전쟁 전에 4백여 호가 살던 송씨는 겨우 다섯 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 송씨는 재산이 없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더욱 어렵게 살고 있다. 송대화의 아들 후섭도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했다. 지금 그 마을 입구에는 동학혁명모의기념탑이 덩그러니 서 있지만 이것으로 어찌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으랴. 이곳은 송씨 집안이 동학농민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산 증거가 되고 있다.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중에서 발췌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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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 홍보관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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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수도회가 드리는 정성어린 心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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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관아터

     (현 고부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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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41년(1765년) 성황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편입될때 까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적 현장이다.고부관아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아건물은 전부 철거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전통문화유산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옆에 보이는 기와집은 고부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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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 변산 격포 닭이봉 전망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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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의 장 '묵방산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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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수도회 수련에 참여하신 법성당 김재순 동덕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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