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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리교사연구자료

    대신사와 동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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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웹마스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166회   작성일Date 11-09-08 15:46

    본문

    대신사와 동학사상 <표  영  삼>

    (교사교리연구 제 4호 - 포덕 14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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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대신사의 존영. 1894년 4월 17일자 일본 동경일일신문에 게재했던 대신사의 존영. 일본 특파원이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을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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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귀미산 전경. 1984년 9월에 촬영한 것으로 앞에는 대신사 출생지인 가정리가 있고, 정면 골짜기에는 용담정이 있으며. 길게 뻗은 능선 중간에는 대신사 태묘가 있다.


    머 리 말

    집의 구조는 주춧돌과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지붕이 있고, 바람벽과 구들장과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념의 틀도 여러 요소들로 짜여져 있으며 동학 역시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가 형이상적(形而上的) 역사관이고, 둘째가 한울님 관념이고, 셋째가 선악의 기준이고, 넷째가 수행과 신앙의 방법이고, 다섯째가 교단 조직이고, 여섯째가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한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구조를 검토하여 보듯이 먼저 창시자인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가 포덕(布德) 1년(1860)에 무극대도(無極大道, 天道)라는 신념체계를 창시하기까지의 구도과정을 알아보고, 동학은 종교인가 도학(道學)인가를 살피는 한편 그 신념의 핵심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대신사의 창도과정

    대신사 수운 최제우(이하 대신사로 약칭함)는 갑신년(1824) 10월 28일(양 12월 18일)에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에서 태어나 갑자년(1864, 포덕 5년) 3월 10일(양 4월 15일)에 대구에서 좌도난정죄(左道亂正罪)로 41세에 순도하였다. 부친은 몰락 양반인 경주 최씨 근암(近庵) 최옥(崔옥, 1772∼1840)이요 모친은 곡산 한씨(谷山 韓氏)이다. 근암공은 63세 때에 30세의 한씨와 결혼하여 만득자(晩得子)로 대신사를 얻었다.
    10세에 당시 40세였던 모친과 사별하였고, 17세(1840년)에는 부친과 사별하였다.
    19세(1842년) 때 울산의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넷째 딸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큰아들 최세정(崔世貞, 仁得, 士衡, 1851?∼1872)은 관의 지목을 피해 인제면 쇠말랭이 산골에 숨어 있다가 1872년 양양 군교에 체포된 뒤 그해 5월 12일 장살(杖殺)되어 22세(?)의 나이로 순도하였다. 둘째 아들 최세청(崔世淸, 1854?∼1874)은 1874년 2월에 영월 소미원 장기서(張基瑞)의 집에 갔다가 병을 얻어 객사하였으며, 이로써 대가 끊기게 되었다.
    대신사는 어머니 한씨 밑에서 자랐으나 10세에 모친이 별세하자 양형(養兄) 최제환(崔濟 ) 부부가 돌보아 주어 17세까지 글공부를 하였다. 19세에 울산의 박씨(1826?∼1873)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렸으나 20세에 집이 불타버리자 부친이 쓰던 용담골 귀미산 골짜기 용담서사(龍潭書社)로 들어가 살았다. 살림살이가 쪼들리자 21세 되던 이듬해(1844년)부터 장사 길로 나섰다.
    봇짐 장사로 전국을 누비기를 31세(1854년)까지 10년간 계속하였다.
    당시 나라 안은 세도정치로 조선왕조의 틀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탐관오리들의 행패는 민중의 삶을 핍박하였다. 나라 밖에서는 1840년에 영국이 광동(廣東)에서 아편전쟁을 도발하자 이를 계기로 서구열강들이 중국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앞서 공업화를 이룩한 서구열강의 침략은 오랫동안 농업사회 속에 잠들어 있던 동아시아를 뒤흔들어 놓았다. 중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이는 조선왕조에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대신사는 독특한 형이상적 역사관으로 19세기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한마디로 세계질서가 대전환기를 맞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깊은 고민 끝에 대신사는 자신이 그 길을 열어보고자 장사 길을 청산하고 31세 되던 봄부터 "다시 개벽"의 길(道)을 찾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경주 용담에서 반년을 보내다가 9월에 박씨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裕谷洞) 여시바윗골로 옮기었다. 논 여섯 두락을 사들이고 초가 삼간을 지어 이사한 후 "다시 개벽"의 새로운 틀을 찾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새해인 을묘년(1855) 3월을 맞아 뜻밖에 이인(異人)으로부터 신비한 책 한 권을 받게 되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 기도를 마치고 얻었다는 이 책은 아주 난해하였다. 이인은 사흘 뒤에 찾아올 테니 읽어보라고 하였다. 다시 나타난 이인은 대신사로부터 책을 해독했다는 말을 듣자 이 책은 선생의 것이라며 건네주고 방문을 나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 책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하는데 책 말미에는 한울님(? 님)에게 기원하라고 적혀 있었다.
    33세 때인 병진년(1856) 4월에 어떤 납자(衲子)의 소개로 언양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으로 들어가 49일간 기도하기로 하였다. 사색을 위주로 한 수행을 쌓아 왔던 대신사는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구도 방법을 바꾼 것이다. 이 첫 번째 기도는 숙부인 최섭(崔섭)이 환원하는 바람에 47일만에 중단하고 하산하여 제날짜를 채우지 못하였다.
    34세 때인 정사년(1857) 6월에 다시 천성산으로 들어갔다.
    내원암에서 좀 떨어져 있는 자연 동굴 적멸굴(寂滅窟)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무사히 마쳤다. 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대신사는 생계 대책으로 언양군 두동면(斗東面) 봉계리(鳳溪里) 중리(中里) 마을에 용광로 시설을 차리고 철점업(鐵店業, 鎔鑛業)을 경영하였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하였으나 1년이 지나면서 실패를 거듭하여 2년 만인 1859년 봄에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여섯 두락의 논을 담보로 하여 자금을 빌렸던 것인데, 경영이 부실해지기 시작하여 계속 돈을 빌리다보니 채무자가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결국 문을 닫게 되자 이들은 여섯 두락의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대신사를 괴롭혔다. 결국 소장을 써서 채권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문제를 관에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관에서는 돈을 빌려준 순서대로 청산토록 판정하였는데, 나중에 빌려준 채무자는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되어 그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빚으로 집도 넘어가고 거처할 곳이 없게 되자 신세타령이 절로 나왔다.
    "어려운 팔자를 헤아려 보니 춥고 굶주릴 것이 염려되었으며, 나이 사십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이루지 못한 것을 탄식치 않으랴. 거처를 정하지 못했으니 누가 천지를 넓다고 말했는가. 하는 일마다 어긋나 이 한 몸 감추기 어렵게 되니 자신이 가련하다"고 한탄하였다. 대신사는 36세 되던 1859년 10월에 경주 용담의 낡은 옛집으로 돌아갔다.
    이삿짐을 푼 뒤 곧 자와 호와 이름마저 바꾸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자를 도언(道彦)에서 성묵(性默)으로, 호를 수운(水雲)으로 고쳤다. 37세(1860년) 1월(양 2월 4일경)에 입춘을 맞아 구도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졌다. "도의 기운을 길이 간직하면 삿(邪)된 기가 침입하지 못하리라.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입춘시를 써서 벽상에 붙였다.
    어둡고 춥던 겨울은 지나가고 만물이 화창한 경신년(1860) 4월 5일(양 5월 25일)을 맞았다. 산과 들은 연두색으로 뒤덮였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훈훈한 바람이 골짜기를 메웠다. 오전 11시경 한울님 말씀이 문득 공중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대신사는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희 집안 운수로다" 하는 말씀이 들려왔다.
    "이 말씀 들은 후에 심독희(心獨喜) 자부(自負)로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 운수 기장하다." 드디어 한울님으로부터 다시없는 큰 길의 가르침을 받는 신비스러운 종교체험을 겪게 된 것이다.
    이 때 얻은 체험들을 되새기며 한 해 동안 헤아려 보니 스스로 그러한 이치가 없지 않아 주문을 짓고 법을 만들어 38세 되던 1861년 6월부터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시 신유년을 맞으니, 때는 유월이요 절기는 여름이었다. 어진 벗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먼저 법을 정하니, 어진 선비들이 물어왔으며 또한 포덕하기를 권하였다. 가슴에 불사약을 지녔으니 그 형상은 궁을이요, 입으로 장생의 주문을 외우니 스물 한 자이니라.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아들이니 그 수가 그럴듯하며, 자리를 펴고 설법하니 그 재미가 그럴듯하도다"고 하였다.
    7월에 이르자 뜻밖에 사방에서 찾아오는 이가 줄을 이었다. "통개중문(洞開重門) 하여두고 오는 사람 가르치니 불승(不勝) 감당 되었더라. 현인군자 모여들어 명명기덕 하여내니 성운성덕 분명하다"고 하였다. 대신사는 이들에게 창조적 순환사관의 논리로 새 세상의 도래를 알려 주었고,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신(神) 관념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가치기준을 밝혀 주었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 또한 전해주었다.
    8월에 이르자 고루한 유생들과 관원들은 대신사를 지목하기 시작하였다.
    한울님, 즉 천주(天主)를 신앙한다는 점을 들어 천주학쟁이로 몰아간 것이다. 10월에는 경주관아에서 대신사를 불러다 사술(邪術)로 혹세무민한다며 활동 중지 명령을 내렸다. 민중을 대하지 않으려면 경주 땅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11월 초에 이르러 장기(長 )의 제자 최중희(崔仲羲)를 대동하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을 능멸한 듯 관장을 능멸한 듯 무가내라 할 길 없네, 무극한 이 내 도는 내 아니 가르쳐도 운수 있는 그 사람은 차차차차 받아다가 차차차차 가르치니 내 없어도 당행일세. 행장을 차려내어 수 천리를 경영하니 수도하는 사람마다 성지우성 하지마는 모의 미성 너희들을 어찌하고 가잔말고" 하며 길을 떠났다.
    "사람마다 낯이 설고 인심풍속 하는 거동 매매사사 눈에 거쳐 타도타관 아닐런가 … 동지섣달 설한풍에 촌촌(村村) 전진 하다가서 일소일파 하여보세"라고 하여 어간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한 달 반 동안 여러 곳을 거쳐 12월 중순께 전라도 남원(南原) 땅에 도착하였다.
    광한루 옆에서 한약상을 하는 서형칠(徐亨七)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공윤창(孔允昌)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게 되었다. 12월 그믐에는 교룡산성(蛟龍山城) 덕밀암(德密庵)으로 들어가 자리잡았다. 임술년(1862) 새해를 맞아 <권학가(勸學歌)>와 <동학론(東學論)>을 지었으며 암자를 은적암(隱跡庵)이라 이름하고 6월까지 체재하였다. 이곳을 떠나기 전인 6월에 <수덕문(修德文)>과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를 지었다.
    남원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서형칠, 공창윤, 양국삼(梁國三), 서공서(徐公瑞),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에게 전도하였고 전주군 신모(申某, 이름 미상)가 대신사께 내알하여 입도하였다 한다. 그리고 인근 임실(任實)과 전주(全州), 고산(高山), 진산(珍山), 금산(錦山) 등지에도 왕래하며 활발히 포덕을 하였다. 대신사가 경주로 돌아간 뒤에도 이곳 도인들은 멀리 경주까지 왕래하면서 오랫동안 도맥을 이어 왔다.
    대신사는 남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학을 동학(東學)이라 선포하였다.
    동학은 서학을 물리치기 위해 창도된 것이라고들 하나 이 세상에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 위해 대항 종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대신사는 자신의 신념을 무극대도 또는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동학이란 명칭은 포덕 후 반년이 지나서 "도는 비록 천도라 하지만 학은 동학이라"고 하여 비로소 자신의 학을 동학으로 선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39세 때인 임술년(1862) 7월에 남원으로부터 경주로 돌아왔다.
    관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용담으로 가지 않고 서면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가서 머물렀다. 용담 집에는 남원에서 지은 글과 노래 두 편을 보내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8월이 되자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9월에 이르러서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서면 일대에 길이 메어질 정도였다.
    임술년(1862)에는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 세상이 시끄러웠다. 경주 관아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세태를 감시였다. 그러던 차에 대신사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는 보고를 받은 부윤은 영장을 시켜 9월 29일에 대신사를 체포토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학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수백 명에 이르게 되자 당황한 것은 부윤이었다. 사흘 뒤 10월 4일경에 5∼6백 명이 떼지어 영장에게 항의하자 민란으로 발전할까 두려워 닷새 째인 10월 5일에 서둘러 석방하고 말았다.
    용담으로 돌아온 대신사는 10월 14일자로 통문(通文)을 띄웠다. "이 훌륭한 도가 서양 오랑캐의 학과 같이 취급된다면 수치스러움이 절실하지 않으랴. 어찌 예의를 숭상하는 향중에 섞일 것이며 어찌 우리 집안의 가업에 참여할 수 있으랴. 이제부터는 비록 친척의 병이라도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 것이며 앞서 전도한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은밀히 조사하여 이 뜻을 알려주어 도를 버리도록 하여 다시는 욕을 보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용담에 오래 머물러 있을 형편이 못되어 떠날 채비를 하였다.
    신사(崔慶翔)에게 머물 곳을 마련하라고 부탁하여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11월 9일 흥해 매곡동(梅谷洞) 손봉조(孫鳳祚)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젊은 제자들이 찾아옴에 따라 활기를 되찾아 동해안 여러 고을에 포덕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대신사는 대구, 신령(新寧), 영천, 청하(淸河), 영덕, 영해 등지를 순회하였다.
    직접 다니며 가르쳐 보니 지역이 넓고 도인수도 많아 혼자서 가르치기에는 벅찬 것을 느끼게 되었다. 교단을 조직하여 도인들을 관리, 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12월 26일 납일(臘日)에 접주(接主)를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동학의 교단조직은 이 때에 처음 이루어졌다. 손봉조의 집에서 30여 개의 접(接)을 공식화하고 각 접에 접주를 임명한 것이다.
    계해년(1863) 3월초까지 각 접을 순회하던 대신사는 용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용담에 돌아가면 다시 탄압이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먼 장래를 위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일반 도인들은 아직 동학의 신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용담으로 돌아가 대대적인 교화사업을 벌일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대신사가 1893년 3월 9일에 용담으로 돌아오자 민중은 또다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뒤에 도차주(道次主)의 중책을 맡았던 영덕 직천(直川)의 강사원(姜士元, 洙)도 4월에 찾아와 입도하였다. 한편 각 접에서는 도인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여 용담에 모이게 하였다. 6월부터는 개접(開接)이라 하여 한 번에 30∼40명씩 동원되어 4∼5일씩 묵으면서 체계적인 교화를 받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각지에서 동학 활동이 활발해지자 유생들은 7월 중순부터 서원 단위로 조직적인 동학 배척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대신사는 7월 23일에 통문을 띄워 파접(罷接)을 명하고 모이지 말도록 하는 한편 40∼50명이 모인 자리에서 수제자인 최경상(海月 崔慶翔, 자는 敬悟, 1827∼1898)을 불러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이라는 직책을 맡겼다. 북도중은 경주 북쪽 지역을 말한다. 아마도 경주 남쪽은 남도중(南道中)이라 하여 대신사가 직접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생사적(大先生事蹟)}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선생께서 몸소 탄식하며 노여운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노기를 가라앉히고 부드러운 말로 진실로 성공자는 가는 법이니라. 이 운을 생각하니 그대를 위해 나온 것이다. 신중히 처리하여 나의 훈계를 어김없게 하라" 하였다.
    최경상은 흥덕(興德), 청하(淸河), 영덕(盈德), 영해(寧海), 평해(平海), 울진(蔚珍), 영양(英陽), 안동(安東), 진보(眞寶) 등지에 많은 포덕을 펼쳐 사실상 북도중의 주인 역할을 하여 왔다. 그를 북도중 주인으로 임명한 것은 후계자 선정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20여 일이 지난 8월 14일에는 37세인 최경상에게 도통(道統)까지 넘겨주었던 것이다.
    추석을 지내고자 8월 14일에 스승님을 찾아갔던 최경상은 "이 도는 너를 위해 나온 것이다"라며 도통을 물려주고자 하였다. 당황한 신사는 안절부절하였으나 스승님은 "성공자는 가는 법이다(成功者去也)"고 하면서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하였다. 즉 이제부터는 네가 대도의 중임을 맡아 이끌어야 한다고 부탁한 것이다. 40세인 스승이 37세인 제자를 서둘러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정부의 탄압이 점점 심해져 오기 때문이었다.
    1863년 9월이 되자 각지 유생들은 동학을 비난하며 정부가 엄금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들은 동학을 "금수같은 야만의 도(夷狄禽獸之道)"라고 몰아붙였으며 상주 도남서원과 옥성서원(玉城書院), 우산서원(愚山書院)에서는 동학 배척 통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통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요망한 마귀와 같은 흉칙한 무리들이 하는 짓은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 분명한데, 옛날에는 이 땅(상주)에 감히 들어와 어정거리지 못했다. 이 어찌 매우 한심스러운 처지가 아닌가. … 그 동학이란 것은 바로 선과 악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싹을 어지럽히는 가라지 잡초와 같다. 이제부터 햇빛을 못 보게 뽑아 없애며 어리석음을 없애야 한다. 이 어찌 우리들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 귀천이 같고 등위의 구별이 없으니 백정이나 술장사들이 모이며, 남녀가 혼입하여 부녀자들 품행이 단정치 못하니 원광자(怨曠者,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인다. 좋은 재화를 유무상자(有無相資)하니 궁핍자들이 기뻐한다. 마침내 도당을 널리 모으는 일을 첫 번째 업으로 삼게 되니 마을에 거(居)하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을 모두 휩쓸며, 향리에 거하게 되면 온 향리를 휩쓸고 만다. 차례 차례로 전해져서 그들의 세력은 하늘을 뒤덮을 것 같으며, 장각(張角)을 36방에 배치하고 교주를 받들며, 우두머리는 숨어서 장차 사목(司牧, 지방관)의 권한까지도 빼앗아 마음대로 행사하게 될 것이다.



    유생들은 동학이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동학과 동학도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하층 민중들뿐만 아니라 지식층 인사들과 양반신분인 이들도 동학교문에 들어가 스승님을 성인으로 모시며 그 가르침인 사인여천의 신조를 실천하며 양반 상놈의 신분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앞장서는 것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8월에 <도덕가(道德歌)>를 짓고 이후에 <흥비가(興比歌)>를 지었다.
    어느덧 10월 28일이 되어 40세 탄신을 맞게 되었다. "선생은 원래 연회를 베푸는 것을 마음으로 거북스럽게 여겼으나" (신사를 비롯한) 제자들이 은밀하게 준비하여 영덕접에서 큰 잔치를 마련하였다. 잔칫상을 받은 스승은 수저를 들면서 "세상에서 나를 천황씨라 하리라"고 하였다. 천황씨란 문화 전시대에서 문화 시대를 연 최초의 임금을 말한다. 대신사는 자신이 새 세상을 다시 열었다는 의미에서 천황씨임을 자처한 것으로 해석된다.
    잔치 상을 물리고 난 대신사는 제자들에게 <흥비가>를 일일이 강(講)을 받고 나서 며칠 전에 꾼 이상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 태양의 살기가 비치더니 불로 변해 내 허벅지 위에 사람 인(人) 자를 오래도록 그리었다. 깨어나서 허벅지를 살펴보니 보라색 흔적이 한 점 남아 3일 동안이나 지워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꿈 이야기는 머지않아 화가 미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암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의하면 앞으로 처신하는데 신중하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 천운은 순환하여 무왕불복하는데 내가 천명에 의해서 오만 년의 무극대도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내 집안의 성덕뿐만이 아니로다. 옛날에도 듣지 못하고 지금에도 듣지 못하던 사리(事理)요, 옛날에도 비할 수 없고 지금에도 비할 수 없는 도법이라. 아아, 세상 사람들이 도를 험담하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도인들은 경건하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11월초에는 마지막으로 <불연기연장(不然其然章)>과 <팔절구(八節句)>를 지었다. {수운문집}에는 "주동접(鑄銅接, 盈德) 전시황(全時晄)이 팔절척대(八節隻對)에 응한 날짜가 11월 13일이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팔절>은 11월 초순에 지은 것이 분명하며,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도 <불연기연>을 먼저 짓고 <팔절>을 다음에 지었다고 했으므로 모두 11월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불연기연>은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그러하지 않은 측면(不然)과 그러한 측면(其然)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연이란 단정짓기 어려운 측면이요 기연이란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측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불연은 근원을 따져 들어가는 '소자(所自)'의 측면이요, 기연은 나타난 그대로인 '소견(所見)'의 측면이라 하였다.
    <불연기연>은 생명체계의 근원을 따진 글로 여겨진다.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 살펴내어 부야흥야(賦也興也) 비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 하여 생명체계의 높은 차원에 이른 심경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에 <팔절>을 지었는데 <팔절>은 여덟 가지 글자를 골라 정의한 글이다. 즉 명(明), 덕(德), 명(命), 도(道)와 성(誠), 경(敬), 외(畏), 심(心)의 여덟 가지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자들은 이미 불도나 유도에서 많이 사용하고 해석한 낱말들이다. 대신사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
    11월 중순경에 결시(訣詩) 하나를 지었다.
    이 결시는 동해안 지역에서 유행했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당시 동해안 교도들은 온 몸에 물집이 생기고 가려운 증상을 나타내는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특히 동학도들에게만 전염되어 일반인들은 동학에 들어가려도 이 피부병 대문에 내키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 대책을 대신사에게 청원했던 것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앞서 선생께서 풍습(風濕)을 앓았는데 구슬 같은 물집이 온몸에 두종(痘 )처럼 생겨 통증은 없었지만 가려움이 심했다. 이후 북도중에 크게 번져 남녀와 노약자가 풍습으로 수행을 전폐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대신사가 먼저 앓았으며 전염이 되어 영해지방 도인들에 옮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날 영해 접주 박하선(朴夏善)이 찾아와 이런 사실을 고하자, 돌아가서 한울님에게 올리는 소지(所志=陳情書)를 지어 오라고 하였다. 박하선이 진정서를 준비해 오자 "한울님의 명교를 받아 해답을 얻어내리라"며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지는 어렵지 않다. 마음을 온화하게 하고 기운을 온화하게 하여 만물이 화하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영해지방에는 피부병을 앓는 이가 없어졌다고 한다.
    11월 하순경에 관의 지목은 더욱 심해졌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이 때 사방이 시끄럽고 인심도 빗나가 세상은 본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양학(洋學)이 널리 퍼지니 믿을 수 없는 허무한 말들이 돌아다녔다. 세인들은 단지 음해하는 단초로만 알고 … 동도(東道)의 이치를 모르고 서학에 들어가 해를 끼치니 안타깝도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랴. 집에 들면 마음으로 아니라 하고 나오면 길거리에서 수군거고 있으니 막아내기 어려워 마음이 두렵도다"고 하였다.
    정부는 10월 20일경에 대신사를 체포하기로 이미 결정하고 11월 20일에는 정운구(鄭雲龜, 龜龍)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였다. 무예별감 양유풍(梁有豊)과 장한익(張漢翼), 그리고 좌변포도군관 이은식(李殷植)과 종자 고영준(高英晙) 등을 거느리고 22일에 경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과천, 양지, 장호원, 충주 숭덕, 보안, 문경 요성(堯城)을 거쳐 유곡(幽谷)에서부터 경주 인근 고을에 이르기까지 매일처럼 탐문하였다.
    그는 장계에서 문경 새재를 넘자 고을마다 동학도들이 극성스럽게 움직였다고 하였다. "거의 날마다 동학 이야기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모두 동학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운구는 장계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새재에서 경주까지는 4백여 리이며 고을이 십 수 개가 있었다.
    거의 날마다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경주 인근의 제읍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다. 주막의 아낙네와 산골의 초동들까지도 … 위천주(爲天主) 또는 시천지(侍天地: 侍天主의 잘못)라는 글을 외며 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물든지 오래여서 극성스럽게 된 것을 알겠다.


    12월 5일경에 경주로 들어온 정운구 일행은 시장과 사찰 등을 찾아다니며 철저히 탐색하였다. 9일 밤이 되어 대신사를 체포하기로 결심하고 10시경에 경주부 교졸 30명을 출동시켰다. 곧 용담으로 달려가 10일 새벽 1시경에 도착하여 포위한 다음 일제히 습격하였다. 대신사와 제자 23명은 그들이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피를 흘렸다.
    교중 기록에 의하면 9일 오후에 경주 도인이 달려와 조정에서 선생님을 체포하러 내려 왔다고 알렸다 한다. 스승님은 자신이 피신하면 많은 도인들이 시달릴 것을 생각하여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한다. 김기전(小春 金起田)은 경주 김정설(金鼎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경주 … 형산강변(兄山江邊)의 어떤 나무 밑에 얽매어 놓아두었는데 얼굴에는 전면이 피가 되어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 체포된 신사(수운 선생)는 사닥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



    일단 경주 진영에서 일일이 신원을 확인한 다음 이튿날인 11일 아침에 대신사와 이내겸(李乃謙)만 포박하여 말에 태워 서울로 압상(押上)하게 되었다. 손발에 형구를 채워 말 등에 오르니 그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때는 엄동설한인 12월 중순이었다. 영천, 대구, 선산, 상주, 화령, 보은, 청안, 직산, 오산을 거쳐 과천으로 올라갔다. 12월 22일경 과천에 당도하니 철종(哲宗) 국상으로 한강을 건널 수가 없어 며칠을 머물러야 하였다.
    12월 25일경 조정으로부터 "경상감영으로 돌려보내 심문하여 죄의 경중을 가려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튿날 판교, 양지, 장호원, 충주 숭덕, 보안, 문경 요성의 노순으로 유곡(幽谷)에 이르렀다. 그믐이었으므로 사흘간 머물며 신정을 보내고 나서 낙동, 금호를 거쳐 갑자년(1864) 1월 6일에 대구 감영에 도착하였다.
    경상감영은 명사관(明査官)으로 상주목사 조영화(趙永和)와 지례(知禮)현감 정기화(鄭 和), 산청현감 이기재(李沂在)를 선임하였다. 이들은 1월 20일부터 경주옥에 수감된 제자와 박씨 사모님 그리고 큰아들 인득(仁得, 崔世貞)을 대구로 이감시켜 심문에 들어갔다. 1개월간이나 계속된 심문은 혹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신사는 전후 네 차례의 심문을 받았으며 2월 20일 마지막 심문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야 하였다.
    관은 수제자로 최자원(崔子元), 강원보(姜元甫), 백원수(白源洙), 최신오(崔愼五), 최경오(崔景五) 등 5명을 거명하였다. 그 중 최자원, 강원보, 백원수(白士吉)는 체포했으나 북도중주인인 최경오(崔景悟, 慶翔)는 체포하지 못하였다.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신사를 체포해야 하는데 소재를 몰랐으므로 대신사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감옥으로 돌아온 대신사는 시 한 수를 남겼다. "물위에 등불을 밝히니 혐의할 틈새가 없고. 기둥은 마른 것 같지만 그 힘은 남아 있어라"는 시였다. 서학으로 몰아 세우나 나에게는 혐의할 틈새가 없으며, 비록 나를 죽이겠지만 그 힘은 남아 있으리라는 뜻이다.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은 심문 결과를 조정에 보고하니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복술(福述)은 본시 요망한 종류로서 감히 황당한 술수를 품고 주문을 만들어 요언(妖言)으로 부추기며 천주(天主)를 위한다고 말한다. 서양을 배척한다면서 오히려 사학(邪學)을 도습하여 포덕의 글을 만들었다. 고로 거짓으로 꾸며 음으로 불순한 생각을 꾀하였으니 궁약(弓藥 靈符)을 비방이라 하고 칼춤과 검가를 퍼뜨려 흉악한 노래로 평세(平世)에 난리를 걱정토록 하여 남몰래 취당하였다. … 그 술책은 하내풍각(河內風角)이요 … 후한(後漢)의 미적(米賊)이라 법이 통치 않으니 조금도 허용하기 어렵다.



    조정은 서학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을 적용시켜 효수 경중(梟首警衆)하라고 명령하였다. {일성록}에는 대왕대비가 2월 하순에 묘당에서 서헌순의 장계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뒤이어 3월 2일에는 처리한 결과를 집행하도록 명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은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크리스트교)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 것이다. 세상을 현혹시키고 어지럽히니 엄벌로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 법을 세울 수 없다"는 교지를 내린 것이다. 형량은 다음과 같았다.


    대신사는 효수경중(梟首警衆)하고, 강원보(姜元甫), 최자원(崔子元)은 엄형 2차 후 절도(絶島)에 정배 보내 종신케 하고, 이내겸(李乃謙), 이정화(李正華), 박창욱(朴昌郁), 박응환(朴應煥), 조상빈(趙常彬), 조상식(趙相植), 정석교(丁錫敎), 백원수(白源洙)는 엄형 2차 후 원지에 정배 보내고, 신덕훈(申德勳), 성일규(成一奎)는 엄형 1차 후 정배 보내고, 나머지 죄수들은 도신(道臣)이 처리하라.

    대신사는 결국 41세의 나이로 갑자년(1864) 3월 10일에 대구 남문 앞 관덕당(觀德堂) 뜰에서 참형 당하여 순도하였다. 대신사가 활동한 기간은 1860년 4월에 득도한 다음 1년 후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겨우 2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남긴 글은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한글로 된 가사 8편(龍潭諭詞) 및 시문 몇 편이 있다. 묘소는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귀미산(龜尾山) 줄기에 있다.


    2. 종교와 도학

    모든 신념의 틀은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독자적인 정의를 내리게 마련이다. 종교학이나 종교 행정 분야에서는 연구와 행정의 범위를 정할 목적으로 공통점들을 추려내어 가설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종교 문화현상의 범위를 정해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행정 대상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정의는 서구 종교학자들이 처음으로 시도하였으며 종교 문화현상은 주로 중동이나 서양의 종교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종교의 정의는 하도 많아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기가 어려우나 중동과 서구 종교 문화현상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들 종교 문화현상의 공통점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었다. 'religion'의 개념에서 보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없는 신념체계는 종교가 아니다. 이들은 크리스트교를 원형으로 삼아 종교의 개념을 정의했던 것이다. 때문에 19세기초에 서구적인 종교 개념을 받아들인 동양에서는 전통적 신념체계들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진독수(陳獨秀)는 1916년에 유도를 국교로 만들자는 강유위(康有爲)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유도는 신과 사후 세계와 종교적 의례가 없으므로 종교가 아니다"고 하였다. 'religion'의 개념으로 보면 유도뿐만 아니라 원시불도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신념들은 종교라고 할 수 없다. 동양적인 신념들은 신을 내세우지 않고 수행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단일화 된 'religion'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종교학회 로마회의(1990)에서도 단일한 의미의 종교개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일본의 종교학자 키시모토(岸本英夫)는 1962년에, 종교란 "인간 생활의 구극적(究極的)인 의미를 밝혀서, 인간 문제의 구극적인 해결과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에 의해 믿어지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문화현상이다. 단 종교의 영위와 관련하여 신 관념이나 신성성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정의하였다. 서구적인 종교의 정의에 동양적인 신념 체계를 반영시켜 절충한 것이다.
    동양에도 서구의 종교 개념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신념의 틀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도와 학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1876년 개항 이전까지 신념의 틀을 도라 하여 유도, 불도, 선도, 서도(西道)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수행적인 측면을 지칭하는 말로 유술(儒術, 儒學), 불법(佛法), 서학(西學), 성교(聖敎), 선술(仙術)이라 하여 학, 법, 교, 술 등의 낱말을 사용하였다. 도는 신념의 틀을 이르는 말이요, 학, 법, 교, 술은 종교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 후 미군과 더불어 서양 종교문화가 휩쓸고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도와 학의 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서구적인 종교개념만이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유도, 불도, 선도라고 하면 부자연스럽게 들리고 유교, 불교, 도교라고 해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끔 되고 말았다. 결국 동양적인 신념들을 이해하는 데 혼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동양의 도는 우리말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오솔길, 큰길, 산길, 물길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길도 도요, 우주 천체가 움직이는 법칙의 길이나 식물과 미생물, 동물이 스스로 조직하고 복제하며 생성 소멸하는 이치의 길도 도라고 한다. 즉 눈에 보이는 길도 도요, 눈으로 볼 수 없는 길도 도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 무수히 있는 길들을 동양에서는 도라고 총칭하였다.
    도에는 크게 나누면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있다고 하였다. 즉 천체나 자연의 길을 천도라 하였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나 행해야할 인륜의 길을 인도라 하였다. 천도의 개념은 삼라만상이 이루어지게 된 근원이며 생명의 뿌리로 이해되어 왔으며, 인도의 개념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당위로 이해되어 왔다.
    {도덕경(道德經)}은 길(道)이란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 만물을 생성하고 형성시킨 근원이 되므로 만물의 어머니(萬物之母)가 된다"고 하였다. "도는 분명히 실재하지만 너무도 신묘하여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그저 이름하여 길이라 한다"고 하였다. 노자의 도는 우주 근원에 실재하는 원리와 같은 것을 일컫는다.
    {중용(中庸)}에서도 "하늘과 땅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랜 것이다"고 하였다. 천지의 도는 하도 무궁무진하여 언어로 규정지을 수 없어 그저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중용}은 {도덕경}과는 달리 천도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요, 그 성품에 따르는 것이 도요, 도를 닦는 것이 교(敎)라"고 하였다.
    우리의 성품은 하늘이 준 것이며 이 성품에 따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도가의 도 개념과는 달리 인륜의 도나, 사람이 지켜 행해야 할 도덕적인 규범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 주자(朱子)에 이르면 우주와 인간세계를 관통하는 질서의 근본원리를 리(理)라고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이 리를 도라고 하였다.
    대신사도 천도의 측면과 인도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다. <논학문>에서 "무릇 천도란 형상이 없는 듯하나 자취가 있다(夫天道者 如無形而有迹)"고 하였고, <수덕문>에서는 "만물을 낳고(元) 키우고(亨) 이루고(利) 거두는(貞) 것은 변함없는 것이 천도의 모습이다(元亨利貞 天道之常)"고 하였다. 앞서 얘기한 하늘의 도 개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무극대도 또는 천도라는 개념에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바른 길을 지칭하는 뜻이 들어 있다. 무극대도 또는 천도는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길이요, 사회적으로 이루어 내야 할 길이다. 개인이 지켜야 할 길에 대해서 "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나의 신념이 한결같은가 헤아려 보라. 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도요 다름이 아니다"고 하였다. 개인이 참되고 뜻 있고 바르게 사는 길을 말하고 있다.
    공동체적인 길에 대해서는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길이 바로 천도이며 무극대도라 하였다. 대신사에 의하면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이 무극대도이며 천도라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신념도 도의 범주에 들어가며 손문의 삼민주의도 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된다. 개인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신념체계라면 모두가 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학(學, 法, 敎, 術)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동학, 서학, 유학 등으로 이름하는 학은 "객관적 사실을 가치 중립적으로 통일되게 규명하려는 학문적인 학"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도를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는 것"을 학이라 하는데, 대신사는 특히 "도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을 학이라 하였다. 동학의 학은 넓은 의미에서 무극대도를 닦(修)고 익히(習)고 행(行)하는 수행과 한울님을 믿고 섬기고 위하는 신앙을 모두 합친 종교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대신사는 <좌잠(座箴)>에서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로 뜻풀이 할 필요가 없다. 다른 도리가 아니라 성하고 경하고 신하는 석자에 있다"고 하였다. 도(길)를 바로 알(信)고, 내 것으로 만들어(敬受), 실천하는(誠) 것이 학이요, 법이요, 교요, 술이라는 말이다. 즉 신념의 틀을 바르게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학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도와 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동양의 신념체계는 서구의 종교적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일 종교라는 잣대로 보면 동양의 신념체계들은 불완전한 종교가 되고 말며 심할 경우에는 종교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한다. 동양 전통의 신념체계는 도와 학의 개념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종교개념 보다는 도와 학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특히 대신사의 도와 학의 용어는 종교 개념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사용된 용어이다. 따라서 동학을 바로 이해하려면 종교의 개념을 잠시 유보하고 도와 학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논학문>에 "도는 천도라 하지만 학인즉 동학이다"고 하였고 크리스트교도 서도 또는 서학으로 호칭하였다. 서구의 종교도 도와 학의 개념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개별 신념체계를 종교개념이나 도학의 개념으로 일반화시켜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모든 신념체계들은 독자적인 시각에서 과제상황을 설정하였으며 그에 따른 해답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특성을 무시하고 일반화시킨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신념체계가 제기한 과제상황과 얻어진 해답의 체계를 있는 그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불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와 유도의 공자를 예시해 보면 적절할 것 같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 전 654년에 인도 북부의 작은 나라 카비라 성에서 태어나서 80세까지 살았다. 왕궁생활을 떨쳐버리고 구도에 나선 것은 29세 때였고 깨달은 것은 35세 때였다. 그의 과제상황은 인간의 기본조건인 생로병사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데 있었다. 당시 인도에는 원환적(圓環的) 순환관과 연기법(緣起法)이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이런 사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는 것이 그의 구도적 과제상황이었다.
    히말라야 산중에 들어가 6년간 고행 끝에 드디어 해탈의 길을 찾아내었다.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로 이루어진 고집멸도의 수행방법이 곧 해답의 길이었다. 인간은 집착과 애욕이 뭉쳐(苦集) 고통이 생기므로 이 집착과 애욕의 욕망을 단멸시키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욕망을 단멸시킨다는 것은 삶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끝내 해탈의 길을 찾아냈으니 팔정도(八正道)가 바로 그것이었다. ① 바르게 보고(正見) ② 바르게 생각하고(正思, 正思惟) ③ 바른 말을 하고(正語) ④ 바르게 행하고(正業) ⑤ 바르게 살고(正命) ⑥ 바르게 힘쓰고(正勤,正精進) ⑦ 바르게 염원하고(正念) ⑧바르게 마음의 자세를 정하는(正定) 것이 팔정도이다. 이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른 생각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생각이다. 만물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며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치를 깨닫고 나의 존재에 집착하지 말고 털어 버리는 것이 바른 생각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생로병사라는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기원 전 552년에 노나라 창평(山東省曲阜)에서 태어나 74세인 기원 전 479년까지 살았다. 당시는 춘추시대의 말기로 사회는 몹시 혼란하였다. 공자는 그 원인을 정치와 사회규범이 무너진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공자의 구도적 과제상황은 바른 정치와 건전한 규범을 세우는 일, 즉 '정명(正名)' 또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였었다.
    공자는 30세에 뜻을 세우고 50세에 노나라 요직을 담당하여 꿈을 실현해 보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56세에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에 걸쳐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통치자들을 설득하였다.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국왕이 하나도 없자 69세 때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정치를 담당하는 지배자들은 선왕의 어진 정치와 예를 본받아 그 정치를 되살리는 동시에 건전한 가정과 건전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특히 예악과 법도가 엄정한 주(周) 시대의 어진 정치를 그대로 본받아 치국평천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꿈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싯다르타와 공자의 예에서 보듯이 과제상황에 따라 해답이 다르므로 일반화된 도학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세계종교학회 로마회의에서 언급된 것처럼 단일한 의미의 종교개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동학을 바로 이해하자면 대신사의 구도적 과제상황과 그 해답의 체계를 낱낱이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대신사의 독특한 역사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3. 창조적 순환사관

    대신사는 21세 때부터 장사 길에 나서 전국을 누비다가 10년 만에 온 세상이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종말상도 보았고 1840년을 전후하여 영국이 도발한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도 들었다. 또한 중국의 왕조가 해체기에 접어들었고, 서양 문명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 "유도 불도 누 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평생에 하는 근심, 효박한 이 세상에 군불군 신불신과 부불부 자부자를 주소간 탄식하니 울울한 그 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어 처자산업 다 버리고 팔도 강산 다 밟아서 인심풍속 살펴보고…"라 하여 주유천하의 동기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정치와 도덕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경제가 핍박할 대로 핍박해졌으니 답답한 마음을 억제할 길이 없어 팔도 강산을 두루 밟아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생계의 어려움도 해결할 겸 장사를 하면서 팔도 강산을 누비었다.
    관변기록에는 무명(白木)장사를 했다 하며 교중 기록에는 무술 공부를 하다가 활을 거두어들이고 반천(飯泉, 장사)길에 나섰다 하였다. 돌아다니다 집에 와 머물고 다시 돌아다니기를 10년간이나 계속하였다.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대신사는 31세 때(1854년)까지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제일 큰 충격은 조선왕조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반상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고 세도정치는 온갖 횡포로 점철되었으며 수취체제는 민중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있었다. 한편 서양 세력들이 앞다투어 동방세계를 침범해 들어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영국은 중국의 남부 광동(廣東)에 거점을 잡고 아편을 밀수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의 아편 밀무역은 1837년에 3만4천 상자에 이르러 청국의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많은 국민이 마약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은 1838년에 아편 금수조치를 취하고 아편을 몰수하는 강경책을 취하였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1840년 7월부터 중국을 공격하였다. 연패를 거듭한 중국은 영국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 엄청난 배상과 함께 여러 항구를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아편 몰수 보상금 6백만 달러, 공행(公行) 부채 3백만 달러, 영국 군함 원정 비용 1천 2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주유팔로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왕조의 봉건체제가 해체기에 이르렀다는 점이요, 둘째는 서양 침략세력이 동방을 무력으로 침공함으로써 동양 각국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점이요, 셋째는 우리 문화를 지탱해 왔던 유도·불도가 한계에 이르러 우리 문화가 몰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유도·불도의 몰락을 중시한 것은 문화와 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도의 씨앗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씨앗 역할을 하는 도의 기능이 한계에 이르게 되면 문화도 쇠퇴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문화사가인 도슨(Christopher Dawson)은 "한 사회의 생명력이 종교와 얼마나 밀접하고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종교를 잃어버린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문화를 잃어버린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문화와 도(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10년간 팔도 강산을 누비던 대신사는 온 세상이 병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깨닫고 돌아다니기를 중단하는 한편 국운을 되살릴 길을 모색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몽중노소문답가>에 보면 "이 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시요,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이라. … 윤회시운 구경하소. 십이 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고 하였다.
    "십이 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이 한마디에는 대신사의 역사관이 들어 있고 구도적 과제상황이 담겨져 있다. 모든 종교와 도는 나름대로의 형이상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 유형은 크게 순환사관, 영원 회귀사관, 발전사관 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 대신사의 역사관은 이 중 어느 하나에 속하기보다는, 순환사관과 발전사관을 합친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할 수 있다.
    달이 둥글었다가 이지러지기를 반복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물이 성쇠하며 순환하는 것처럼 역사도 주기적으로 순환한다고 믿는 것이 순환사관이다. 그러나 사막 지역에서는 계절의 순환보다 천체의 운행에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런 지역에서 천문학(점성술)이 발전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천체는 돌고 도는 영원한 회귀 속에 있을 뿐이므로 인간의 역사도 영원히 회귀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중동 지역과 인도에서 회귀사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서구에서는 종교적인 신념과 18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 기술이 혼합하여 발전사관을 형성하였다.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언젠가는 이상사회가 실현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고 믿는 역사관의 토대 위에 과학 기술은 후퇴하지 않고 발전만을 거듭할 것이라는 신조가 더해져 발전사관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면 창조적 순환사관은 어떤 것인가. 대신사는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말 속에 자신의 역사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다시 개벽이란 개념을 분석해 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개벽이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모두 세 번 사용되었다. 한 번은 "개벽 후 오만 년"이라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개벽(開闢)이란 말뜻은 "열었다"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개벽은 열었던 무엇을 다시 연다는 뜻이다. 원래 개벽은 천지 개벽을 이르는 말이다. "개벽 후 5만 년"이라 하였으므로 천지만물이 처음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지구상에 생물이 처음 나타난 것(열린 것)은 35억 년 전이라 하며 사람이 지상에 나타난 것도 150만 년 전이라 한다.
    5만년 전이라면 농업사회의 출현을 상정하여 인문 개벽을 생각할 수 있다. 인문이란 인류의 문화이며 쉬운 말로 바꾸면 '삶의 틀'이라 할 수 있다. 즉 개벽 후 5만년이란 삶의 틀이 열린 지 5만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삶의 틀을 문명이라 해도 좋고 문화라 해도 좋다.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는 여럿이 공존한다는 다원론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양 문명, 동양 문명,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불교 문명, 유교 문명 등 지역이나 종교별로 나뉘어 다원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신사는 삶의 틀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라고 생각하는 점이 특이하다. 지역이나 종교에 따라 나뉜 다원적인 문명과 문화는 전체로서의 삶의 틀에 속하는 하위 개념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틀은 다시 몇 개의 틀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크게 나누면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법률, 규칙, 전래의 습속 및 습관 그리고 도덕적인 요소들을 합친 규범적인 틀이 첫 번째 틀이요, 과학과 기술에 의한 생산관계 및 시장관계, 배분관계 등을 포함한 경제적인 틀이 두 번째의 틀이다. 그리고 다양한 음향과 글자, 몸짓과 색채, 공간장식 등을 통한 언어 표현 및 전달수단의 틀이 세 번째 틀이요, 세계와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방향을 지향시키는 생각하는 틀이 네 번째 틀이라 할 수 있다.
    대신사는 이 삶의 틀이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탄생→성장→융성→노쇠→해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환의 측면은 동양적인 순환관과 통하고 있다. 맹자는 일찍이 왕조의 역사는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순환한다고 하였다. 요순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5백년마다 한 번씩 질서가 잡혔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 왕조들은 주기적으로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개벽 후 5만년", "5만년지 운수"라 하여 지난 시절도 5만년이요, 오는 시절도 5만년이라 하였다. 이 5만년을 실수(實數)로 보면 왕조의 순환사관처럼 5만년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순환사관이 된다. 실수로 보지 않고 온 시간의 절반이라는 상징적인 햇수로 보면 해석이 달라진다. 즉 상징수의 5만년이라고 할 때는 질적으로 다른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는 역사관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고고학에서는 실제로 문화의 발상 시기를 5만년 전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대신사는 "지난 시절, 오는 시절", "하원갑(下元甲), 상원갑(上元甲)", "전 만고 후 만고", "전 춘추(春秋), 후 춘추(春秋)" 등으로 온 시간을 과거와 미래, 전과 후, 하와 상으로 나누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실수의 5만년이 아니라 온 시간의 절반을 상징하는 5만년을 나타낸 것이다.
    소옹(邵雍, 邵康節)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을 예로 들면 대신사의 10만년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원(一元)을 129,600년으로 잡고 다시 64,800년씩 둘로 나누어 음양(陰陽) 또는 하원과 상원으로 나누었다. 소옹은 12(하루의 시간)와 30(한 달의 날짜)을 기본수로 하여 원회운세설에 따라 일원의 연수를 산정하였다. 이처럼 소옹은 일원 즉 온 시간을 129,600년으로 잡은 데 반해 대신사는 10만년을 온 시간으로 잡았다. 10만년은 어떤 계산에 의해 산출한 수가 아니라 온 시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수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십을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수로 여기고 있다. 십은 온 시간이며 그 절반은 5로써 상징한 것이다.
    이 전후와 상하의 절반을 상징하는 5만년의 표현은 창조적 순환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창조적 순환사관에 의하면 경신년 즉 1860년 4월 5일은 낡은 전반기의 5만년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후반기의 5만년 시대가 시작되는 대전환의 역사적 시점이다. 지금까지의 순환사는 커다란 삶의 틀 속에서 일어나는 잔물결과 같은 변화였다면 이제부터 맞게되는 변화는 지난 시절의 삶의 틀이 완전히 해체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틀로 뒤바뀌는 대전환의 변화인 것이다.
    그 동안의 사회 변동은 다른 문화와 접촉하거나, 다른 집단에 정복되거나, 과학 기술이 발전하거나,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거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등 여러 요인들이 겹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그 사회의 기본 틀은 변화하지 않고 외형적으로 동일한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변동의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변동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는 것이므로 과거의 변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외적인 요인들이 종합하여 이를 유발시키지만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창조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이루어 낼 수 없는 대변동인 것이다.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생각하는 틀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새로운 삶의 틀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춘하추동의 계절 변동은 자연의 법칙이요 숙명적인 것이지만 어떤 농법으로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는 농부의 주체적 선택에 달려 있듯이 어떤 삶의 틀을 창조하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인 우리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낡은 삶의 틀이 해체되고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려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생각하는 틀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 생각의 틀이 새롭게 바뀌면 이어서 규범의 틀, 경제의 틀, 언어표현의 틀과 교호작용을 일으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틀과 그 밖의 틀은 어느 시점에는 한쪽이 선도적 지위에 있기도 하다가 어느 시점에는 뒤따르기도 하는 교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한다. 그 특징은 삶의 틀이, 탄생→성장→융성→노쇠→해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일정한 시점에서 낡은 삶의 틀과 새로운 삶의 틀이 대전환하며 이는 새로운 생각의 틀을 갖춘 인간들의 창조적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4. 시천주의 신 관념

    새로운 삶의 틀의 씨앗이 될 도, 즉 새로운 생각의 틀을 찾아내기 위해 대신사는 31세 때(1854년)부터 6년간의 고행에 들어갔다. 여러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드디어 경신년(1860, 포덕 1년) 4월 5일(양 5월 25일)에 한울님으로부터 새로운 생각의 틀을 얻게 되었다. {용담유사}에서는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라고 하여 새로운 생각의 틀이 될 도를 받아냈다고 하였다.
    종교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의 틀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매우 엄숙하였다.
    종전의 가치체계들이 전도되는 체험은 너무나 생생하였으나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의 선약(仙藥)을 받아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건져내고 나의 글(呪文)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것은 천명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William James)에 의하면 아무리 선명한 종교체험이라도 그 내용을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우며 만일 개념화시켜 말로 표현하면 본래의 체험이 변질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체험하는 순간에 지금까지 과제로 삼았던 일들이 일시에 해결된다고 하였으며 체험은 일회적이어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본의 키시모토도 종교체험은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직관성과 실체감을 느끼게 되며, 기쁨이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종교학자 바하(Joachim Wach)는 세상 모든 것이 조건지어 지며, 무한한 궁극적 실재를 대면하는 실체감이 생기며, 지(知), 정(情), 의(意)의 전인격에 걸친 변화를 나타내며 행동하게끔 강제하는 힘을 느낀다고 하였다.
    경전에 나타난 대신사의 종교체험을 보면, ① 천지가 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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