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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리교사연구자료

    전라좌도 남원지역 동학혁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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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웹마스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704회   작성일Date 11-09-08 15:44

    본문

    전라좌도 남원지역 동학혁명운동
    (교사교리연구 제 2호 - 포덕 140년 11월)

    표 영 삼

    머리말
    초기 동학혁명운동은 여러 지역에서 동학군의 힘을 모아 관군을 무찌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황토재 전투와 황룡촌(黃龍村)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4월 27일에는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정부군과 화약을 도출하자 6월초에는 김학진 감사와 타협하여 고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6월 중순부터는 동학군에 의해 군·현 집강소가 세워졌고 폐정을 개혁하는 제2단계의 혁명운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6월 이후 민중들은 동학에 대거 몰려들어 명실공히 대중적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동학 지도부는 보다 체계적으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전주에 동학 대도소를 설치하고 우도와 좌도에 지역별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원평(金溝 院坪)에는 전봉준(全琫準) 장군이 총괄하는 호남우도 대도소가 설치되었고 남원에는 김기범(金箕範, 開南) 대접주가 총괄하는 호남좌도 대도소가 설치되게 되었다. 좌도 대도소의 영역은 전래의 좌도 영역을 넓혀서 금산(錦山), 진산(珍山), 용담(龍潭), 진안(鎭安), 무주(茂朱)를 포함하여 태인(泰仁), 장수(長水), 임실(任實), 순창(淳昌), 담양(譚陽), 곡성(谷城), 구례(求禮), 창평(昌平), 옥과(玉果), 순천(順天), 광양(光陽), 낙안(樂安), 보성(寶城), 흥양(興陽, 高興) 등 19개 지역으로 정하였다. 지역이 광범하여 보수세력이 강한 금산, 용담, 무주, 진산 지역과 순천, 광양, 낙안 지역은 별도로 동학군의 병력을 마련하여 제압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외의 군·현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대도소에 병력을 모아 제압하도록 하였다. 남원에 집결한 동학군 병력은 주로 남원지역을 위시하여 태인, 임실, 담양, 흥양지역의 동학군들이었다. 이들이 남원에 집결한 것은 6월 25일부터이며 멀리 흥양의 유희도(柳希道, 福萬) 대접주도 수천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김개남과 같이 남원성에 들어왔다. 필자는 이 글에서 금산지역과 순천지역을 제외한 남원, 태인, 임실, 장수, 순창, 담양, 곡성, 구례, 흥양, 낙안, 창평, 옥과 지역을 묶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동학이 정착한 경위를 살펴보고, 6월 중순 이후부터 집강소를 설치한 경위와 8월 25일에 열린 남원대회 이후의 항일전 준비, 10월 중순 이후의 동향과 청주성 공격의 실패, 끝으로 일본군과 보수새력의 반격에 밀린 동학군의 비참한 종말을 개관하려 한다.

    1. 동학조직의 정착과정
    전라도에 동학이 처음 들어온 곳은 남원지역이었다. 포덕 2년(1861년, 이하 서기로 표기함) 11월에 경주 관아로부터 탄압을 받은 동학의 창시자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 이하 大神師로 칭함)는 최중희(崔仲羲)을 대동하고 정처 없이 여행하다가 12월 중순에 남원에 당도하였다. 남원군종리원『종리원사부동학사(宗理院史附東學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포덕 2년…본군 남문외 광한루 아래 오작교 변 서형칠(徐亨七) 집에 오시어 수일을 유숙하다가 약방인 고로 번거하므로 인하여 격린(隔隣)에 재한 서형칠의 생질 공창윤(孔昌允) 집에 유숙하시며 서형칠, 공창윤, 양국삼(梁國三), 서공서(徐公瑞),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에게 전도하였고 전주군 신모(申某 명미상)가 대신사께 내알(來謁) 입도하였다"고 하였다. 대신사는 공창윤(孔昌允)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렀다가 12월 그믐께 남원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 교룡산성(蛟龍山城) 덕밀암(德密庵)으로 들어갔다. 이 곳을 은적암(隱蹟庵)이라 이름하고 1862년 7월 초순까지 6개월간을 체류하였다. 여기서 동학론과 교훈가, 수덕문 등 여러 글들을 썼으며 인근 고을에 왕래하며 포덕도 하였다. 『천도교전주종리원 연혁』에는 "포덕 2년 신유(辛酉)에 대신사께서 포덕차로 최중희 씨를 솔 하시고 자(自) 남원으로 본군(全州郡)에 와서(駕) 물태풍속(物態風俗)을 주람(周覽)하신 후 포교를 위시하시다"라고 하였다.『오하기문(梧下記聞)』에도 최제우(崔濟愚)는 동학이라 고쳐 부르고 지례(知禮), 김산(金山=金陵)과 호남의 진산(珍山)·금산(錦山)의 산골짜기를 오가며 …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계를 받게 하였다고 하였다. 전라도에는 대신사 자신이 1861년 12월에 와서 직접 포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신사가 경주로 돌아간 다음에는 도인들은 경주 용담을 왕래하며 도맥(道脈)을 이어 왔다. 양형숙(梁亨淑)은 "16세시에 용담에 가서 … 12일을 유하였다" 하며,『남원군종리원』에는 "… 서형칠, 양형숙, 공창윤 등이 용담에 왕래하며 도맥(道脈)을 유지하다가 포덕 5년 갑자 춘에 대신사가 순도하자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고 하였다. 남원, 전주, 진산, 금산 등 전라도 지역에 적지 않은 인원이 동학에 입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4년 3월에 대신사가 좌도난정율에 의해 순도하자 도맥은 점점 쇠퇴하였으며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1882년경에 동학은 다시 들어와 퍼지기 시작하였다.『천도교서』에 신사는 고산 도인 박치경(朴致京)의 주선으로 1884년 6월에 익산군 금마면 사자암(獅子庵)으로 가서 여러 도인들을 만났다고 한 기록이 있다. 아마도 1882년경부터 이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좌도에 속하는 군·현에 동학이 자리잡은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1880년부터라고 생각되며 도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1893년의 교조신원운동 이후라고 여겨진다. 군별로 동학이 자리잡은 과정과 동학혁명 때 기포한 접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남원군
    남원군에 동학이 다시 포교된 것은 1885년 이후로 추정된다. 임실군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에 사는 최봉성(崔鳳成, 字 贊國)은 신사(神師 海月 崔時亨, 이하 신사로 칭함)로부터 도를 받아 남원군 오수(獒樹)지역에 사는 강윤회(姜允會)와 종형인 김영기(金榮基)에게 먼저 포교하고 1890년에는 김종우(金鍾友), 이기면(李起冕), 김종황(金鍾黃), 유태홍(柳泰洪), 장남선(張南善) 조동섭(趙東燮) 등에게 포덕하였다 한다. 1891년에는 이기동(李起東), 황내문(黃乃文), 이규순(李奎淳), 최진악(崔鎭岳), 변홍두 (邊洪斗), 변한두(邊漢斗), 정동훈(鄭東勳) 등이 입도하면서 남원지역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동학세력이 자리잡게 되었다.『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환원기사(還元記事)에 보면 1890년부터 1892년 사이에 많은 입도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입도한 것은 1892년 11월에 삼례 교조신원운동이 있은 이후였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혁명의 깃발을 올린 접주는 적지 않았다. 김홍기(金洪基), 이기동(李起東), 최진학(崔鎭學), 전태옥(全泰玉), 김종학(金鍾學), 이기면(李起冕), 이창우(李昌宇), 김우칙(金禹則), 김연호(金淵鎬), 김시찬(金時贊), 박선주(金善周), 임동훈(林東薰), 이교춘(李敎春), 강종실(姜宗實) 등이 기포하였다. 이 중 오수접, 부동접, 조산접은 강접(强接)이었다고 한다.『오하기문』에는 화산당접(花山堂接)을 남원의 강접으로 꼽았으며 접주는 이문경(李文卿)이라 하였다.

    (2) 임실군
    『천도교임실교사』에는 "포덕 14년(1873) 계유(癸酉) 3월에 최봉성(崔鳳成, 字 贊國, 號 芝圃)씨가 신사에게 입교하사… 수백 호에 달했다"고 하였다. 신사는 1971년 3월에 영해(寧海) 교조신원운동의 후유증으로 강원도 정성군 남면 유인상(劉寅常, 改名 劉時憲)의 집에 피신 중이었으므로 임실로 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청운면 새목터 허선의 집에 왔을 때 입도하였다 하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운암면 선거리(仙居里)의 효암(孝菴) 김학원(金學遠)과 청웅면 새목터(鳥項里)의 허선(許善)이 입도한 날자는 1880년 3월 10일이다. 임실 지역 주요인물의 입도 연대를 보면『천도교창건록』에는 풍암( 菴) 이병춘(李炳春)이 입도한 연대는 1887년이다. 그리고『천도교회월보』환원 기사에 보면 운암면(雲岩面) 선거리(仙居里) 김영원(金榮遠)은 1889년 2월 24일에, 백암(伯菴) 이종현(李鍾鉉)과 집암(執菴) 엄민문(嚴海旼), 이종대(李鍾大)는 1889년 7월 25일과 9월에, 청운면(靑雄面) 조항리(鳥項里) 하암(河菴) 조석걸(趙錫杰)도, 성덕화(成德嬅)도 이 해 10월 20일에 입도하였다. 덕치면 회문리(回文里)의 김춘성(金春成)은 1890년 10월 3일에, 청웅면 향교리 이종근(李鍾勤)은 7월 17일에, 성수면(聖壽面) 월평리(月坪里) 박태준(朴奉俊)은 1891년 9월 30일에, 청웅면 향교리 이종태(李鍾泰)도 동년에 입도하였다. 1892년 11월에 삼례 교조신원운동 이후에 급격히 늘어났으며 1894년 동학혁명운동 때에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사실이 전해지자 전주 이씨 문중까지도 입도하였다. 특히 현감인 민충식(閔忠植) 마저 입도하자 군민 대다수가 동학도가 되었다. 박내홍(朴來弘)은『전라행(全羅行)』기행문에서 "청웅면 새목터는 갑오년간에 동학 제 두령의 거소(居所)였으므로 해월신사조차 행차하시어 … 동란시에는 일군이 도가(道家) 아닌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천도교회사초고』에는 1894년에 기포한 임실군 접주는 최승우(崔承雨), 최유하(崔由河), 임덕필(林德弼), 이만화(李萬化), 김병옥(金秉玉), 문길현(文吉賢), 한영태(韓榮泰), 이용학(李龍學), 이병용(李炳用), 곽사회(郭士會), 박경무(朴敬武), 한군정(韓君正) 등이라고 하였다. 조석걸(趙錫杰), 이병춘(李炳春), 허선(許善)도 기포한 유명 접주의 한사람이었다. 김정갑(金正甲)은 1894년 당시 임실에는 6대 연원(包)이 있었으며 그 산하에 31명의 접주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3) 순창군
    순창에 동학이 들어간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948년도 교인명부(敎譜)와『천도교회월보』의 환원기사를 보면 1889년에 입도한 사람이 보인다. 쌍치면(雙置面) 금성리(金城里)의 이병선(李炳善)은 1889년에, 쌍치면 시산리(詩山里)의 계두원( 斗源)은 1890년에, 금성리 김동화(金東嬅)는 1890년에, 동계면(東溪面) 관전리(官田里) 김만두(金萬斗)는 1891년에 각기 입도하였다. 금과면(金果面) 방성리(防聖里) 설임철(薛臨鐵)은 1892년 5월 4일에, 쌍치면 금성리 임병선(林炳善)은 1892년 7월에, 인계면(仁溪面) 세룡리(細龍里) 신석우(申錫雨)는 1894년에, 순창군(면미상) 안의만(安義萬)은 1894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48년에 작성된 것이므로 이미 환원(還元)한 도인들은 많이 누락되었을 것이다. 1893년 보은 척왜양창의운동 해산자들에 대해 관이 조사한 것을 보면 순창 동학도들도 끼어 있다. 『천도교서』에 의하면 이용술(李容述), 양회일(梁晦日), 오동호(吳東昊), 김치성(金致性), 방진교(房鎭敎), 최기난(崔琦煖), 지동섭(池東燮), 오두선(吳斗善) 접주들이 기포하였다 한다.『동학사』에는 "오동호가 1천 5백명의 동학군을 거느리고 기포하였다" 하였으므로 1894년 이전에 이미 수천 명에 이르는 동학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곡성군
    『남원군종리원사』부록인『구례군교구사』에 보면 1892년 봄에 남원에 사는 도인이 곡성군 기봉진(奇鳳鎭)에게 전도한 것이 처음이라 한다. 오곡면(梧谷面) 승법리(承法里)의 강치언(姜致彦)도 이 때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천도교창건록』에는 이병춘 관내 도인인 순암(舜菴) 김기영(金琪泳)과 능암(能菴) 전홍기(全洪基)도 1894년에 입도하였다 한다. 그리고 1894년에는 "조석하(趙錫夏), 조재영(趙在英), 강일수(姜日洙), 김현기(金玄基)" 등 4명의 접주가 기포하였다 한다.

    (5) 옥과현
    옥과현은 인근 고을에 비해 동학세력이 미약하였다.『순무선봉진등록』에 "처음에는 거괴가 없었고 단지 협종자로 전재석(全在錫), 김낙유(金洛有), 황찬묵(黃贊默) 3인 …"이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적어도 1890년경에 입도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6) 구례군
    곡성 사람 기봉진(奇鳳鎭)이 1892년에 허탁(許鐸), 임양순(林良淳), 임태순(林泰淳), 조경묵(趙慶默), 우공정(禹公鼎) 등에게 전도하였다 한다. 이들의 포덕 활동으로 수백 호를 만들었다 한다.『천도교회월보』환원기사에 보면 이보다 3년 전인 1889년 10월 28일에 용방면(龍方面) 용정리(龍井里)에 사는 강철수(姜喆秀)이 입도하였고, 1890년 1월 18일에는 광의면(光義面) 수일리(水日里)에 사는 위암(偉菴) 김석진(金錫振)이 입도하였다. 그런데 1894년에 기포한 접주는 임봉춘(林奉春)이 유일하다고 하였다. 『오하기문』에는 전 구례현감 남궁표(南宮杓)와 당시 현감 조규하(趙圭夏)가 동학에 입도하여 포덕에 앞장섰다 한다. "구례 전 현감 남궁표는 물러난 다음 구례에서 살았으며, 구례의 적(동학군) 임정연(林定然)으로부터 입도하고 나서 제자라며 현민들에게 입도를 권유하였다" 한다. 그리고 현감 조규하는 "적(東學軍)이 오면 주연을 베풀어 잘 대접하면서 … 전송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 사촌의 아들을 개남에게 딸려 보내고, 자신도 입도하여 자칭 구도인(舊道人)이라" 하였다 한다. 임봉춘은 임정연의 아들로 보인다.

    (6) 담양군
    동학혁명 당시의 활동으로 보아 담양군의 동학세력은 임실, 태인, 남원에 뒤지지 않았다.『천도교회월보』환원록에 의하면 담양면 백동리(栢洞里) 김학원(金學元)과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 추병철(秋秉哲)은 1892년에, 용면(龍面) 복용리(伏龍里) 전오봉(全伍奉)와 수북면(水北面) 남산리(南山里)의 황정욱(黃正旭)과 송구진(宋樞鎭)은 1894년에, 고서면(古西面) 보촌리(甫村里) 최수선(崔洙善)은 1889년에 입도하였다. 이 기록은 1919년의 것이므로 그 이전에 입도한 사람이 돌아갔을 것이므로 최소한 최수선이 입도한 1889년 이전에 동학이 자리잡았을 것으로 본다. 1894년에는 남응삼(南應三, 南周松), 김중화(金重華), 이경섭(李璟燮), 황정욱(黃正旭), 윤용수(尹龍洙), 김희안(金羲安), 이화백(李和伯) 등 접주들이 기포하였다. 황현이 지적한 담양의 강접 용귀동접은 읍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있는 수북면(水北面) 주평리(舟平里) 용귀동(龍龜洞)에 있었다. 김개남의 중군으로 활약했던 김중화(金重華)와 군수물자 조달을 책임졌던 남응삼은 이 지역 출신의 거물이었다.『순무선봉진등록』에서는 "광주 용귀동"이라 하였으며, 다른 기록에는 창평 용귀동이라 한 데도 있다. 원래 용귀산 아래의 일부는 창평현에 속하여 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 일대가 담양군 수북면으로 되었다. 용귀산 일대를 용귀동이라 하였다.

    (7) 창평현·낙안현
    창평현(昌平縣)은 일제 때 담양군 창평면으로 편입되었으나 원래 독립된 작은 현이었다. 1894년에 백학(白鶴)과 유형로(柳亨魯)가 기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언제 입도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낙안현(樂安縣)도 언제부터 동학이 자리잡았는지 기록이 없다. 1894년에 기포한 동학세력이 상당하였으며 김개남이 청주를 공격할 때 접주 강사원(姜士元)과 안귀복(安貴福), 이수희(李秀希) 3명이 선봉을 담당한 것으로 미루어 동학 세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8) 흥양현(興陽縣, 高興郡)
    『동학사』에는 유희도(柳希道), 구기서(具起瑞), 송년호(宋年浩) 접주가 기포하였다 하였고,『천도교서』에는 구기서(具起瑞), 송두호(宋斗浩), 정영순(丁永詢), 송년섭(宋年燮), 임기서(任琪瑞), 유동환(柳東煥) 접주가 기포하였다고 했다. 또한 "유희도는 4천군을 거느리고 흥양에서 일어났다"하여 흥양 동학세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수천에 이르는 동학군을 거느렸다는 것은 그만큼 동학세력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순천지역 동학혁명운동을 쓸 때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한다)

    (9) 장수군
    『취어(聚語)』에는 1893년 4월에 척왜양창의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군·현 동학도의 인원수를 기록한 대목이 있다. 그 중 "초 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간 자 중에는 전라도 장수접 동학도가 23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하여 주목을 끌었다. 1936년에 작성된 천도교보에는 1890년 11월에 장수면 용계리(龍溪里)에서 장영섭(張永燮)이 입도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신사로부터 신암(信菴)이라는 도호를 받은 김신학(金信學)은 이보다 먼저 입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1894년에 장수에서 기포한 접주는 "황학주(黃鶴周), 김학종(金學鍾), 김숙여(金淑汝), 김병두(金炳斗), 김홍두(金洪斗) 접주들이 기포하였다" 한다. 그리고『영상일기』와『오하기문』에는 황내문(黃乃文)이 대표적인 접주라고 하나 이상의 6명도 황내문에 못지 않게 수천 명을 이끌어 간 장수군의 유수한 접주들이었다.

    (10) 태인군
    당시의 태인현 지역은 현 정읍군 태인면(泰仁面), 옹동면(瓮東面), 산외면(山外面), 감곡면(甘谷面), 칠보면(七寶面), 산내면(山內面), 보림면(寶林面), 용북면(龍北面)이었다.『천도교서(天道敎書)』1886년 조에는 "이 때 충청·전라·경상·경기 등지의 인사들이 … 신사를 찾아오는 분이 많았다"고 하였다. 원평 용계장(龍溪丈, 金德明)도 1886년 10월에 여러 인사와 동행하여 상주군 화서면 봉촌리(鳳村里) 앞재(前城)로 가서 신사로부터 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태인 지역 인사들도 이 무렵에 동학을 받아 온 것으로 추측한다. 『천도교서』등에 의하면 1894년 동학혁명 때 태인 지역에서 기포한 접주는 김기범(金箕範, 開南)을 위시하여 최영찬(崔永燦) 김지풍(金智豊), 김한술(金漢述), 김영하(金永夏), 유희도(柳希道), 김문행(金文行) 등이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김삼묵(金三默), 김연구(金煉九), 임홍택(林弘澤) 등이었다. 한 때 신사가 시산 김삼묵의 집에 가서 임첩을 발행한 일도 있었으며, 지금실에 있는 김기범의 집에 가서 15일간이나 유숙하면서 동학을 지도한 일도 있었다. 김기범을 정점으로 한 수 천여 명의 동학도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활발했던 곳은 산외면과 칠보면, 태인면이었다.

    2. 혁명 초기의 상황
    1894년 3월 21일에 백산(당시 古阜 白山)에서 혁명을 선포한 동학군은 한 고을씩 차례로 점령하였다. 태인, 남원, 임실, 순창, 담양, 장수, 구례, 곡성, 흥양, 낙안지역 동학군들은 전봉준 장군의 휘하에 모여 황토재 전투와 황룡촌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이어서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라좌도에 속했던 동학군들이 초기에 얼마나 참가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인원수는 적었으나 모든 군·현에서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임실에서는 3월 16일에 청웅면 향교리에 모였다가 3월 18일경에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로 가서 김개남 동학군과 합류 기포하여 백산으로 갔다한다. 남원 동학군들도 오수에 모였다가 지금실로 가서 김개남 동학군과 합류하여 기포한 다음 백산으로 갔다 한다. 전주화약의 성립되어 5월 8일(양 6월 11일) 에 고을로 돌아온 이후에는 군·현별로 도세(道勢)를 늘리는데 힘을 기울였다.『오하기문』에는 남원지역의 경우 "구도인(舊道人)이 많았으며 5월 이후에는 따라붙는 백성들이 늘어나 수 천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구도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학을 해 왔던 도인이고 신참도인은 말 그대로 새로 들어 온 도인을 말한다. 일부 부자들도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동학에 들어온 이가 많았다 한다. 5월 하순부터 전라도 일대는 동학세력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고을마다 도소를 차려놓고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의 뿌리를 뒤흔드는 신분제 타파운동이 활발하였고 악질 부호나 구실아치들을 괴롭히는 일이 연달았다. 혁명의 기세가 높아가자 보수세력들은 동학군을 가리켜 약탈자요 난동자로 몰아 갔다. 정부는 자신들이 불러들인 청일 양군을 물리치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동학군의 귀화를 권고하는 효유문(曉諭文)까지 발표하게 되었다.『오하기문』에는 6월 3일에,『초정집(草亭集)』에는 5월에 효유문을 반포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5월 하순에 발송하였으나 6월초에 이르러 일반에게 알려진 것 같다. 김학진 감사도 5월 하순에 귀화를 권하는 효유문을 발송하였다. 김학진의 효유문에는 면·리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관이 임명하는 집강으로 하여금 동학군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것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저지른 죄나 민소(民訴)는 모두 없었던 것으로 덮어둘 것이며, 금년에는 실농하였으므로 일체의 부역을 면제하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면·리 단위로 집강소 설치하여 동학군의 억울한 일들을 해결해 줄 것이니 안심하고 귀화하여 영농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면·리 단위 집강소가 자신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은 일은 면·리 집강이 취급하고 큰 일은 감영에서 처리한다는 이 안은 일종의 속임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모순들은 동학군이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지 않으면 보장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병기를 버리고 농사일로 돌아가 각자 생업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곳에서 병기를 버리지 않고 모여있다 하니 어찌된 까닭인가. 임금께서 여러 번 타이르는 말씀을 내렸으므로 잘 헤아릴 줄 안다. … 다시 한 번 진심을 전하니, 의심하거나 겁내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 … 평민이 된다면 안정된 생업을 누릴 것이다. … 몇 가지 적어 약조하니 …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① 너희들의 귀화는 허락되었다. … 지난 허물로 침학 토색하지 못하게 엄금하리라. 마을에 집강(執綱)을 두어 원통한 일은 집강을 거쳐 감영에 호소하면 조처해 주리라. ② 무기 반납을 제외하고, 재물과 곡식에 관한 민소(民訴)가 있어도, 없었던 것으로 사면하리라. ③ 실농(失農)하고 가산을 탕진하였으니 부역과 각종 공납금은 면제하여 주리라.
    효유문을 검토한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한 동학지도부는 일단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대안을 만들었다. 즉 집강소는 군·현 단위로 두되 동학군이 집강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봉준과 김학진은 의외로 합의를 이루어 동학군의 요구대로 군·현 단위 집강소를 설치하며, 집강은 동학군이 맡도록 하였다. 김학진 감사는 합의한 대로 6월 7일에 각 군·현에 군수·현감에게 집강소 설치에 대한 감결을 내렸다. 김성규(金星圭)의『초정집(草亭集)』에는 "너희들은 살고 있는 고을에 가서 … 의로운 사람을 집강으로 뽑아 위법자가 나타나면 포착하여 고을 수재와 상의해서 처리하라. 만일 집강이 전결하기 어려운 일은 관에 보고한다면 법대로 포착할 것이다"고 하였다. 정석모(鄭碩謨)의『갑오약력(甲午略歷)』에도 "6월에 관찰사가 전봉준 등을 감영에 불러들이자… 전봉준은 삼배 옷에 멧산자 관을 쓰고 의젓이 들어왔다. … 관찰사는 관민간에 상화(相和)할 방책을 의론하고 각 고을에 집강을 설치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오하기문』6월 조에도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 김학진이 여러 번 공문을 보내어 지금의 (동학과의) 화해국면(撫局)을 깨뜨리지 말라하여 … 어쩔 수 없이 아전과 백성들이 동학에 기탁하여 도소를 설치하고 집강을 배치하였다"고 하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관찰사가 집강소 설치를 군·현에 시달하자 일부 수재(守宰)들이 혹시 집강소 설치에 반발할 염려가 있어 여러 고을을 순회하기로 하였다. 김개남은 6월 12일경부터 태인 동학군을 거느리고 순창,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낙안, 순천, 흥양, 곡성을 거쳐 10여 일이 지난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전봉준도 6월 중순부터 20명의 측근들을 대동하고 장성, 담양, 순창, 옥과, 남원, 창평, 운봉을 거쳐 6월 28일경에 원평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두 지도자는 이미 합의하여 김개남은 좌도지역을, 전봉준은 우도지역을 맡아 혁명을 이끌어 가기로 하였다. 김개남은 6월 25일에 남원으로 들어올 때 담양 접주 남응삼(南應三)과 흥양접주 유희도(柳希道, 福滿)와 같이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 왔다. 남원부사 윤병관(尹秉觀)은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으며 이속(吏屬)들도 뿔뿔이 흩어져 관아는 비게 되었다. 부중에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한 김개남은 자리가 잡혀가자 여러 고을의 부자나 악질 구실아치들을 조사하게 하였다. 수천의 병력을 유지하자면 식량과 금전이 필요하였다. 이것을 이들로부터 강제로 조달하려는 계획이었다. 다음은 동학의 포덕 사업에 힘을 기울여 혁명세력을 키워가기로 하였다. 새로 입도한 사람에게는 새 세상이 온다는 "다시 개벽(開闢)"의 신념을 심어주었고,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수행을 권장하였다.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누구나 한울님과 같이 존엄하다는 인내천(人乃天)의 인간관"과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과 "모든 사람은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을 향해 나가자고 가르쳤다. 이 때 제일 먼저 나타난 행동은 양반 신분제를 타파하는 일이었다. 1860년 창도 당시부터 실천하여 온 신분제 타파운동은 1865년 10월에 "사람이 곧 한울님이니 도인 된 사람은 귀천(貴賤)을 타파하라"고 한 신사의 설법으로 일상적인 수행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동학군의 신분제 타파운동에 나타난 행위에 대해『오하기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의 집 종으로서 적(동학)을 따르는 자들은 물론이오, 적을 따르지는 않아도 적을 끌어다 주인에게 겁을 주어 노비문서를 불태우게 하거나 억지로 면천하게 하였다. 혹은 주인을 묶고 주리를 틀거나 곤장을 치기도 하였다. … 양반으로 노비와 함께 적(동학)을 따르는 자들은 서로를 접장(接長)이라 하며 동학의 규범에 따랐다. 백정(白丁)이나 재인(才人)에 속한 자에게도 평민이나 양반과 같이 대등하게 대해주니 사람들은 더욱 분하게 여겼다.
    태인 집에 머물고 있던 전봉준은 7월 2일경에 남원으로 내려와 김개남과 여러 가지를 협의하였다. 김학진 감사의 무장해제 요구와 일본군에 대한 동학군의 대책을 주로 의논하였다. 그리고 동학에 들어온 일부 불량배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빼앗는 약탈행위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협의하였다. 결론은 일단 무기류는 관에 바치도록 하고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항쟁은 당분간 추세를 보아 마련하도록 하였다.

    3. 일본의 주권 침해
    1만 명의 병력을 서울에 진주시킨 일본은 6월 21일(양 7월 23일) 새벽에 왕궁을 점령, 꼭두각시로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한편 국군기무처(國軍機務處)를 두어 중요문제를 전결하게 하여 대원군의 서정을 차단하였고,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화시키는 동시에 청국군을 몰아내는 권한을 일본군에 위임하도록 강제하였다. 일본군은 이런 절차를 마치자 6월 25일에 아산 앞 풍도 근해에서 고승호(高昇號)를 격침하였고, 28일에는 4천 병력으로 성환(成歡)의 섭사성( 士成) 휘하의 2천여 청군을 격퇴시켰다. 이에 앞서 7월 21일(양 8월 20일)에는『한일합동잠정조관(韓日合同暫定條款)』을 억지로 체결하였고, 27일(양 26일)에는『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大朝鮮大日本兩國盟約)』을 강제하였다. 이 문건에는 "경부선·경인선 두 철도를 일본 자금으로 건설하고, 한국정부는 개통 후 50년이 지나 건설비를 상환하게 하고, 그 때까지 철도 운수사업을 일본이 독점하게" 하였으며 "일본군이 이동하거나 식량을 준비하는데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7월 5일 전봉준은 김학진 감사와 협상하기 위해 전주로 올라갔다.『수록』에는 "이 달 6일에 전봉준은 그 학도(學徒)와 같이 영문(營門)으로 찾아와 진심을 털어놓고 굳게 언약한 다음, 열읍의 집강에게 통문(通文)을 띄웠다. … (김학진은) 그 대강을 감결(甘結)로 군·현에 시달하였다"고 하였다. 감사의 감결(甘結) 중에는 전봉준이 각 접에 보낸 통문 후록(後錄)이 덧붙여져 있다. 통문의 요지는 첫째, "이번 거사는 백성에게 가해지는 해악을 제거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교사한 부랑배들이 함부로 날뛰어 평민을 침학하며 마을을 해치고 있다. … 착한 이를 해치는 무리이니 각 읍의 집강은 명찰하여 금단하라". 둘째, "이미 거둔 포창검마(砲槍劍馬)는 소속 관청에 바치고 관내 접주는 그 결과를 문건으로 감영에 올리라. … 그리고 역마나 상마(商馬)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이후로는 포(砲)와 말을 뺏는 일이 없도록 하고 전재(錢財)를 토색하는 자는 영문에 보고하면 군율로써 처리하게 될 것이다. 남의 무덤을 파헤치거나 사사로운 빗을 받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비도 논하지 말라. 만약 이 조목을 어기는 자는 감영에 보고하여 법으로 다스리게 할 것이다"고 하였다. 7월 9일경에 남원으로 내려온 전봉준은 김개남과 여러 접주들을 만나 의논하여 7월 15일에 남원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전라도 전역에 사람을 보내니 모여든 인원은 수만 명에 이르렀다.『오하기문』에는 "이 달 망간(望間)에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남원에 수만 인을 모아 대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봉준은 각 읍에 … 집강을 세워 수령의 일을 수행하게 하니 호남의 군사권과 재정권은 모두 적(동학)이 장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7월 16일에 전라감사 김학진은 급히 군관 송사마(宋司馬)를 남원에 보내어 전봉준을 전주에 오라고 하였다.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로 와서 함께 지키자"는 것이었다. 중앙정부가 친일파 소굴로 변하자 김학진은 반일항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은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7월 17일에 전주로 올라갔다. 이 때 여러 지역에서 모였던 수만 명의 동학군들도 각기 자기 고을로 돌아갔다. 김개남은 임실 성수면(聖壽面) 성수산 상이암(上耳庵)으로 들어갔다.『오하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봉준은 편지를 받고 … 무리를 정돈하여 전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개남은 불응하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샛길로 도망하듯 돌아갔다. 봉준은 … 가까운 동지 40∼50명과 같이 선화당으로 들어가 학진을 만났다. … 학진은 군대의 지휘권을 봉준에게 넘겨주었다. … 이에 봉준은 학진을 옆에 끼는 절호의 기회로 잡아 호남을 마음대로 요리하였다. … 사람들은 학진을 도인 감사라고 불렀다.
    "개남은 샛길로 도망하듯 돌아갔다"는 황현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같이 동행하여 임실까지 올라와서 본래의 계획대로 헤어져서 성수산 상이암으로 들어간 것이다.『오하기문』에는 "김개남이 … 정기(精騎) 백 여명을 거느리고 상여암(上輿菴, 上耳庵)으로 들어가 더위를 피했다"고 하였으나 이 대목도 사실과 다르다. 이 해에는 6월부터 가뭄이 심하여 강물이 마르고 곡식이 타죽었다. 이런 때에 수천의 동학군을 남원에 주둔시키는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남원을 떠난 것이나 수만의 병력을 해산시킨 것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실 집으로 갈 생각도 했을 것이다. 좁고 외져서 오가는 이들을 재울 만 큼 넓지도 못했고 교통 또한 불편했기 때문에 상이암으로 정한 것이다. 상이암은 깊은 산중이지만 남원, 장수, 임실, 태인은 물론 남쪽에 있는 담양과 곡성, 구례 등지에서 왕래하기도 편하였고 아담한 암자라 여러 명이 기거할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물 맑고 시원하여 100명의 정예만 이끌고 7월 17일에 들어갔다. 전주에 당도한 전봉준은 김학진을 만나 항일대책을 의논하였다. 좌우도 도집강(左右 都執綱)의 이름으로 군·현 집강에게 보낸 통문을 보면 대중 짐작할 수 있다.『수록』의 문건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방금 왜구가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君父)에게 욕을 보였으니 우리들은 응당 다같이 의롭게 나가서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들 왜구는 바야흐로 청국병을 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그들의 전투력은 매우 날카롭다. 만일 지금 급하게 대항하여 싸우면 그 화가 종묘 사직에 미칠지 모르므로 물러나 있다가 시세를 관망한 연후에 그 정세에 따라 (동학군의)기세를 독려하고 계책을 세워서 만전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바라건대 통문을 발송하여 경내(境內) 각 접주들과 하나하나 상의하도록 하라.
    항일투쟁을 위한 김학진과 전봉준의 대책은 당분간 관망하기로 한 것 같다. 청국군을 제압한 일본군의 전투력이 예상외로 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앞잡이로 하여 나라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8월 초순에 이르러 항일전쟁(抗日戰爭)을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뜻밖에도 8월초에 경상도 안의(安義)에서 불상사가 일어났으며, 운봉에서 박봉양이 배신한 사실이 전해졌다. 안의의 불상사란 남원 동학군이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안의로 갔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다.『오하기문』에는 8월 초에 남원 동학군은 운봉을 거쳐 함양군 지곡면(池谷面) 개평리(介坪里)로 가서 부민(富民) 정씨(鄭氏)로부터 많은 식량을 얻어내었다. 동학군은 20리를 더 가서 안의현(安義縣)에 이르러 현감 조원식(趙元植)에게 협력을 구했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음식과 술을 대접하였다. 날이 저물자 현감은 숨겨두었던 장정들로 동원하여 불시에 습격하였다. "3백여 명이 죽었다" 하였으나 안의에 간 동학군은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살해된 이도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박봉양에 대한『오하기문』의 내용은 "전 주서(注書) 박문달(朴文達)은 …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남원의 적 황접주(黃乃文, 長水人)에게 입도하여 … 한 달 남직 주문(呪文)도 읽었다. … 그러나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한다는 글을 보냈다"는 것이다.『영상일기』에도 "운봉의 부호 구실아치로 적당(동학군)이 심하게 전곡을 토색하자 빼앗기지 않으려고 장수(長水)의 황내문에게 입도(暗附)하여 화를 피하려 하였다"고 하였다. 『박봉양경력서(朴鳳陽經歷書)』에는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 들과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30여 인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놓고 도둑을 막는 계략을 설명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8월초에 반기를 든다고 동학 남원 대도소에 보내왔다.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 상동면 부절리(釜節里 )에서 450m나 높은 해발 600m의 지대에 있다.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3㎞나 올라가야 하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동학군을 막아낼 자신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군수 이의경(李義絅)마저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동학 지도부는 배후에서 경상도 민보군과 결탁하여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책이 필요하였다. 우선 방아재 밑에 있는 부동(釜洞) 동학군으로 하여금 막아내게 하였다.『영상일기』에는 "8월 19일(양 9월 18일) 남원부 부동(釜洞=上東面 釜節里)의 적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타읍의 동학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본부(本府)에 있던 군기인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釜洞)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부동은 큰 동리일 뿐만 아니라 동학세력이 강하여 무력만 갖추면 자체 방어력이 있었던 마을이다. 이 때 흥양의 유복만 접주도 다시 남원으로 올라온 것 같다. 그는 수천 동학군을 이끌고 교룡산성(蛟龍山城)에 들어가 군기고의 병기를 부내(府內)로 옮겨 놓았다.『오하기문』에는 "길에 뿌려진 화약은 두께가 한치나 되었고 화살은 땔감으로 대신했다. 마름쇠( 藜鐵)도 수십 석(石)이나 어지러이 내버렸다"고 하였다. 당시 항일전을 준비하던 동학군은 무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화약을 길에 뿌리거나 화살을 땔감으로 대신하거나 마름쇠를 버렸을 리가 없다. 상이암에 들어가 있던 김개남은 임실 일대에 3만여 명의 동학군을 집결시켰다. 아마도 24일경부터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 여러 고을 동학군들을 관촌면(館村面), 신평면(新平面), 임실읍(任實邑), 성수면(聖壽面) 일대에 모이게 하여 대오를 짜고 깃발을 준비한 다음 25일 아침에 남원으로 출발한 것 같다. 『오하기문』에는 "25일 김개남은 임실에서 남원으로 들어왔다. … 좌도 여러 적들이 남원 부중(府中)으로 모이니 무려 7만여 인이었다"고 하였다. 남쪽에 있는 순창, 담양, 곡성, 구례, 창평, 옥과, 낙안, 흥양 동학군들도 올라왔을 것이다.『오하기문』에는 "징과 북의 장단에 맞춘 동학군의 행렬은 남원까지 80리를 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도적이 이처럼 치열했던 바는 아직 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두 행렬이 남원에 이르자 "군복을 갖춘 많은 동학군들이 김개남을 맞아 들였다". 부민이나 유생들은 모두 도망가고 남원읍내는 동학군으로 가득 찼으며 부중과 교룡산성 두 곳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김개남은 남원관아를 비로소 차지하고 전라좌도 도회소(全羅左道 都會所)라는 정청(政廳)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니 전 영장(前營將)은 담양 접주 남응삼(南應三)을, 후영장(後營將)은 남원 오수(獒樹)접주 김홍기(金洪基)를, 우영장(右營將)은 김대원(金大爰)을, 좌영장(左營將)은 김용관(金龍關)을, 중영도통장(中營都統將)은 김개남 자신이 맡았다. 그리고 모주(謀主)는 남원 김우칙(金佑勅=金禹則)이 맡도록 하였다. 각 영의 병력 수는 5∼6천 명씩이라 하며 각 영에는 일원장(一元將)과 이원장(二元將)을 두었고 그 밑에 군수군(軍守軍)과 영군(營軍)이 속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영에는 성찰(省察), 통찰(統察)을 수십 명씩 두었다. 한편 각 군·현의 집강소 활동도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서기와 성찰, 집사(執事), 동몽(童蒙)을 두어 업무를 보게 하니 마치 관청을 방불케 하였다. 『갑오약력』에 의하면 이 오영제는 대원군의 효유문을 가져갔다 체포된 정석모 자신의 건의로 채택된 제도라고 한다. 만일 그가 건의했다면 그 시기는 9월 20일 이후에서 9월 25일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정석모는 9월 19일에 김삼묵을 만났으며 9월 30일에는 남응삼을 따라 담양으로 갔으므로 건의 시기는 20일∼25일 사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영상일기』와『남원군동학사』에 오영제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석모의 건의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갑오약력』에 보성 안 접주의 처소에 머물었을 때 "그는 근자에 오방(五方)기치를 7∼8천 개나 만들어 오늘(9월 12일경) 장대에서 기제(旗祭)를 올리기로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오방기제(五方旗祭)는 곧 오영제도를 시행하기 위한 제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영제는 정석모의 건의에 의해 창설된 제도가 아니라 김개남 동학군이 스스로 창제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접들은 이 오영제에 소속되어 움직이었다. 대접주(大接主)는 흥양의 유복만, 담양의 남응삼, 태인의 정창규(鄭昌奎), 김연구(金煉九), 진안의 이사명(李士明), 금구의 김봉덕(金鳳德=金鳳得), 임실의 최찬국(崔贊國) 대접주와 도접주 최준필(崔準弼=崔承雨) 등이었다. 이밖에 중급의 접들도 모두 오영에 속하여 움직였다. 그리고 남원지방 큰 접주는 김홍기(金洪基), 황내문(黃乃文), 이규순(李奎淳), 이기동(李起東), 박세춘(朴世春), 유태홍(柳泰洪), 변홍두(邊洪斗), 최진악(崔鎭岳), 김소호(金沼鎬), 심노환(沈魯煥), 이문경(李文卿), 조동섭(趙東燮), 김형진(金亨鎭) 등이었다. 이외에도 김우칙(金禹則), 이춘종(李春宗), 박정래(朴定來), 박중래(朴仲來), 김원석(金元錫) 등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오영에 소속된 지역별 군·현은 알 수 없다. 이웃인 임실군에서도 6월 중순부터 읍내에 동학도소를 설치하고 현감 민충식(閔忠植)이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당시 대접주 최찬국과 김영원(金榮遠), 도접주 최승우을 비롯하여 30명의 접주가 있었다. 접의 사무를 담당하였던 접사(接司)로는 김교필(金敎弼) 등이었고 교장 ,교수 등 육임직도 많았다 한다.

    大接主 崔贊國, 金榮遠, 都接主 崔承雨.
    接主 金學遠, 韓榮泰, 崔由河, 崔東弼, 許善鍾, 趙錫杰, 李炳春, 朴京(敬)武, 林德弼, 黃熙榮, 李鍾勤, 林再洙, 梁京(景)寶, 嚴鍾聲, 文吉鉉, 李萬化, 李龍擧, 李炳用, 郭士會, 韓君正, 崔鳳頊, 崔鳳九, 朴廷煥, 朴成根, 金茂龍, 朴準承, 楊化三, 崔鳳商, 崔鎭學.
    接司 金敎弼, 李鍾鉉, 李龍洙, 朴萬澤, 宋光浩, 金景煥, 申鶴來, 崔賢弼, 崔學弼, 崔權瑞,
    六任職 禹成五, 崔宗箕, 李治悅, 全勇琦, 李龍必, 李昌化, 李白雨, 李鍾仁, 崔太瑞, 李化先, 鄭相容, 白弼煥, 李光儀, 姜喜鎭, 鄭相悅, 金判奉, 李鍾文, 李起煥, 朴龍雲, 金敎奉, 朴順萬, 魯炳喆, 崔學胤.

    동학군이 항일전을 논의한 시기는 7월 중순부터이고, 전봉준과 김개남이 행동으로 옮긴 것은 8월 하순경이다.『갑오약력』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김개남이 기병한 것은 서울을 치려는 뜻이 없지 않다며 그 시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항일전 준비에 전봉준과 김개남이 견해를 달리하였다는 설이 없지 않으나 사실과는 다르다고 여긴다. 『오하기문』에 김개남이 8월 25일에 남원을 점거하자 전봉준이 달려와 항일전 준비를 말렸다고 하였다. 즉 "봉준은 … 전주에서 남원으로 달려와 개남에게 지금의 정세로 보아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 중에 있는데 어느 쪽이 승리하든 우리에게 총뿌리(군대)를 돌릴 것이다. 우리들은 비록 인원수는 많으나 오합지졸이라 쉽게 무너져 끝내 우리들의 뜻을 실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차라리) 귀화하여 여러 고을로 흩어져서 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자 개남은 큰 무리를 한 번 흩어지게 하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다며 듣지 않았다"고 하였다. 황현의 기록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므로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봉준이 반대한 것으로 기록했으나 그도 8월 하순부터 거병하기 시작하였다.『갑오실기』9월 조의 김학진이 전부에 올린 장계에 의하면 "남원부에 모인 비도는 5∼6만이며 각기 병기를 갖고 밤낮으로 날뛴다. 금구에 모인 무리들도 이미 귀화했다가 어긋난 행실로 돌아섰다", "근일 비도들이 점차 늘어나니 이는 전에 없었던 변으로 임금님의 명령에 항거하며 의병(義兵)이라 칭하니 가히 이를 용서할 수 있으랴"고 하였다. 같은 시기에 전봉준도 금구 원평에서 거병했음이 확실한데 김개남을 말렸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김학진은 9월초의 일을 20일간이나 미루어 9월 22일경에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날짜를 이처럼 지연시켰으니 (김학진을) 중고(重考)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김학진이 장계를 지연시킨 것은 의도적이었으며 동학군의 편의를 보아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정부에서 이를 문제삼자 김학진은 스스로 사직하려 하였으나 동학군을 무마시킬 인물이 없어 정부는 유보하고 말았다. 항일전을 위한 준비에서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무기였다. 그 중 무기는 병기고를 털면 되지만 식량을 확보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추수가 끝나야 했으며 무리하게 징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령 5천명을 2개월간 먹이려면 1일 1인 700g로 쳐도 200여 톤이 필요하다.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전량관(典糧官)의 적임자를 물색하던 김개남은 담양 접주 남응삼을 선정하였다. 남응삼은 숙고끝에 각 군·현에 일정량을 할당하여 시달하였다. 결당(結當) 쌀 7말, 매호당(每戶當) 말먹이 콩 1승(升) 씩을 부과하였고, 장태(鷄籠), 동아줄, 짚배자( 褙子), 화약, 상차(廂車, 수례에 싣는 상자?)를 만드는데 쓰일 물품으로 푸른 대나무, 짚신, 삼껍질(皮麻), 껍질 벗긴 삼 줄기(骨麻), 볏집(稻 ), 목판(木板) 등을 할당하였다. 군수품 할당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을 가능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처벌할 수 있어야 하므로 집강들이 군·현 관리들을 억지할 힘이 없다면 집행하기 어렵다. 당시 좌도에서는 운봉현을 제외하면 군수물자 할당에 저항한 사례가 없었다. 그만큼 동학군에게 행정권과 사법권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4. 대원군의 효유문
    항일전 준비에 힘쓰던 시기인 9월 8일에 뜻밖에도 대원군 효유문(曉諭文)이 전달되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고향 전주에 내려와 있던 정석모(鄭碩謨)에게 대원군의 서찰이 전달되었다. "충청과 경상 양도에는 이미 사람을 보내 선유하였으나 유독 호남만 맡길 사람이 없어 (선유하지 못하고) 있으니 군이 (나라를 위해) 전해주는 노고를 아끼지 말아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김태정(金泰貞)과 고영근(高永根) 두 사람이 대원군의 효유문을 갖고 왔다. 김학진 관찰사는 대원군의 뜻에 따라 전주 대도소를 통해 전봉준에게 보여주었고, 남원으로 사람을 보내 김개남에게도 전해 주기로 하였다. 전주 집강인 송덕인(宋德仁)과 영교(營校) 1인, 사령 1인을 차출하여 정석모와 대원군의 심복 2인과 같이 가게 하였다. 9월 7일 하오에 떠난 6인은 어두워서야 임실에 도착하였다. 현감 민충식의 환대로 식사를 마치고 밤길을 달려 남원성에 들어갔다. 8일 아침에 김태정과 고영근을 동반하고 정석모는 김개남을 찾아갔다. 『갑오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개남이 정청에 정좌하니 그 위의(威儀)는 대단했다. 인사 후 국태공의 효유문과 뜻을 전하였다. 개남은 '그대들이 온 뜻은 이미 알고 있다. 잠시 물러가 쉬었다가 상의하자'고 하였다. 성찰이 인도로 나누어 머물게 하니 서로 만나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보성의 안 접주 처소에 머물었다. … 그는 '근자에 오방(五方=五營)기치를 7∼8전 개나 만들어 오늘 장대에서 기제(旗祭)를 올리기로 하였다. 기제 때에는 반드시 모진 풍파가 있게 마련이다'고 하였다. 신시(申時) 쯤에 군졸 30여 명이 와서 안 접주에게 '지금 대접주(개남)가 막 기제를 올리려고 정석모를 잡아 대기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였다. … 군졸을 따라 장대에 이르니 군중은 바다처럼 모였다. 김태정과 고영근, 영교 송씨가 항쇄(項鎖)를 채운 채 계하에 있었다. 나도 계하에 끌려가 앉았다. … 개남은 꾸짖기를 '네 나이 소년인데 집에서 책을 볼 것이지(말인즉 옳다) 어찌 무모하게도 공명심에 사로잡혀 개화당에 휩쓸려 국태공을 유인 농간하여 효유문을 받아 왔느냐. 이것이 어찌 국태공의 본 뜻이랴.
    김개남은 대원군의 밀지나 효유문과 무관하게 추진하여 왔던 항일전 준비를 계속하였다.『갑오약력』에서 정석모는 "추후에 들은 말"이라며 대원군은 속으로 밀지를, 겉으로 효유문을 전하였다고 하였다. 즉 이준용(李埈鎔)이 전 승지(前承旨)인 이건영(李建英)을 (정석모가 남원에 오기) 하루 전날 김개남에게 보내 '기병하여 서울로 올라오라'는 밀령을 전하였다 한다. 대원군이 전한 효유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방백수령들의 탐학과 토호 강족들의 무단(武斷)과 간사 교활한 구실아치들의 침삭(侵削) 행위가 나날이 더해가고 다달이 늘어가자 … 호소할 길이 없어 동학에 탁명하여 무리를 모아 스스로 보전하여 단 하루라도 행복한 생활을 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 처음에는 원통함을 호소하려 일어났으나 점점 기세가 올라 발동하기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요란을 거듭하여 기강을 침범하고 분수를 넘어서 관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지 못하게 하며 나라의 명령이 시행되지 못하게 하니 … 과연 이것이 의거인가, 패거(悖擧) 인가. … 조정은 이미 삼도에 특사를 보내어 덕으로 다스리려는 뜻을 시달하였으니 너희들은 말을 듣고도 돌아오지 않으면 이는 조정에 항거하는 것이다. … 너희들이 만약 병기를 놓고 농사일로 돌아가면, 털끝만치도 죄를 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오늘은 너희들이 사느냐 귀신이 되느냐의 갈림에 임하였다. 후회함이 없게 간절히 타이른다.
    효유문을 보고난 김개남은 격분하여 정석모 일행을 처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면 민심에 영향을 줄 염려가 있다하여 유보하였다. 그래서 정석모 일행을 감금상태에 두었던 것이다. 이런 전후 관계를 살펴볼 때 9월 재기포는 독자적으로 결정한 항일전쟁이었다. 일부에서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재기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으로 여겨진다. 이 점은 전봉준 공초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전봉준은 심문관으로부터 대원군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 당하자 한마디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3차 심문에서 심문관이 "대원군이 동학의 거사에 관여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대원군은 권한이 없으며 네 죄의 경중은 오직 이 (재판장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런데 너는 끝내 바른 말을 아니하고 대원군이 (너희) 뒤를 보아주리라 믿는 것 같으니 무슨 뜻에서 그리하는가"고 하였다. 이에 대한 전봉준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대원군이 다른 동학도 수백과 관련이 있었다 하여도 나는 애초부터 관련이 없었다", "나와 관련이 있는 것들도 (모두) 숨기지 않고 (말을 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것을 숨기겠는가?"라고 했다. 이처럼 분명하게 말한 것을 갖고 대원군을 보호하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좌우간 진정한 전지(傳旨)이든 위조 밀지(密旨)이든 간에 중앙으로서의 연락 선동이 그들의 기포를 자극하고 격려하였다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고 주장한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일본의 꼭두각시인 대원군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동학을 탄압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말을 듣고 거사할 동학도는 없었다. 전봉준은 송희옥과 대원군의 관련설도 단호히 부인하였다. "(송희옥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고 묻자 전봉준은 "송희옥과 대원군 사이에 만일 증표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너무도) 자명한 일이니 관련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잘라서 말하였다. 9월 18일(양 10월 17일)에 신사 법헌(法軒)이 항일전을 위해 기포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주목할 말을 남겼다. "호랑이가 물려 들어오면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나서서 싸우자"고 하였다. 정부가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자 이 나라의 주권을 스스로 지켜보려는 동학군의 충정에서 일어난 거사였다. 김개남은 10월에 접어들자 관아에 보관 중인 무기로 무장시키는 동시에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무기를 거두어 들였다. 5천명의 동학군을 완전 무장하기에는 태부족이었으므로 무기를 제작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군수물자의 확보와 식량 확보, 그리고 겨울옷을 마련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일부 보수세력들이 비협조로 뜻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오하기문』에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등 5읍이 하동과 운봉을 본따 민포들이 일어나 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운봉을 제외하면 10월까지 이 지역 보수세력들이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동학군은 운봉 민보군의 움직임이 수상하여 이를 제압하기 위해 9월 중순경에 부동(釜洞) 유학규(劉學圭) 접주로 하여금 백여 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야간 기습을 감행하게 하였다.『영상일기』에는 "9월에 남원의 적인 유학규가 밤을 타서 용령( 嶺)을 넘어 운촌(雲村)에 (들어와 가옥을) 불태우고 갈곡( 穀)하는 잔학 행위가 우심했다. 박봉양이 이 사실을 알고 아침이 좀 지나 수성군을 끌고가서 맞아 싸워 크게 부셔버리니 적당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로부터 운봉민은 죽기로 수비하였다"고 하였다. 『박봉양경력서』에는 "9월 17일 야반에 백여 포군을 거느리고 달려가 돌격하여 거괴 임창순(林昌順)을 참하고 싸웠다. 군수 이의형(李義絅)이 끌고 온 수성군과 함양군에서 온 원병이 당도하여 힘을 합쳐 기세가 올라 적도들을 10여 리 밖으로 몰아냈다. 이 때 … 살해한 자는 17명이요 부상을 입고 달아난 자는 부지기수이다"고 하였다.『영상일기』에는 이튿날 아침이 좀 지나서 나타났다한 것으로 보아 동학군은 아침이 되도록 큰 타격을 주고 물어난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자 운봉의 보수세력들은 잠잠해졌다. 군수물자는 9월 하순부터 예정대로 거두어들였다.『영상일기』에 "적도는 본도의 대동목(大同木, 무명)과 민간으로부터 공전(公錢)과 전세미(田稅米)도 매결(每結) 10두씩을 거두었다. 앞서 적이 각방(各坊)에서 거둔 쌀은 대방(大坊)에서 백 석, 소방(小坊)에서 80∼90석이므로 48방에서 거둔 쌀은 몇 백 석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오하기문』에는 남원 산동방(山洞坊)과 구례에서 거두어들인 쌀은 300섬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9월 15일(양 10월 13일)자 오수 찰방(獒樹察訪) 양주혁(梁柱赫)의 보고에 "관고에 쌓아 놓은 쌀과 상납할 여러 군목(軍木) 20동(同) 27필(匹)을 모두 탈취해 갔다" 하였고, 16일에는 능주 목사 조존두(趙存斗)가 "남원 대도소의 지시라 하며 동전 2만냥과 백목(白木) 30동을 탈취하여 갔다"고 하였다. 17일에는 광주목사 이희성(李羲性)이 "남원 대도소에서 군수물자가 시급하니 동전 10만냥과 백목 100동을 수송해서 바치라"고 사통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9월 26일(양 10월 26일)에 일본군은 구룡성과 단동(丹東)을 점령하자 3만 병력을 출동시켜 대륙침략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대동강 이남 지역의 수송로 확보를 위해 후비보병(後備步兵)을 창립하게 되었다. 즉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제18대대 제1중대, 제6연대 제4, 제6, 제7, 제8중대 및 제10연대 제4중대를 창설하였다. 이 중 제6연대 제4중대, 제6중대, 제7중대, 제8중대는 황해도 지역에 투입하였고 나머지는 삼남 일대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강원도에는 서울수비대를 일시 투입하였다. 후비병은 현역 3년, 예비역 4년을 마치고 다시 5년간의 후비병역에 근무하는 병사들로 30세에 이른 노병들이다. 제19대대는 '야마구찌현(山口縣)'의 수비 병력으로 편성하여 10월 6∼7일(양 11월 3∼4일)에 한국으로 급파하였다. 당시 한국군의 병력으로는 일본군의 훈련을 받은 교도중대가 있었고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이 있었는데 모두 신식무기(스나이더 총)로 무장하도록 하여 전투력을 크게 보강하였다. 김홍집 내각은 전라도와 충청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당황한 나머지 일본군에게 동학군 토벌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이 허락하자 김홍집은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동학군 토벌을 위해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하여 제군(諸軍)을 통솔하게 하였다. 한편 각 고을에 민포군을 조직하게 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정부의 조치가 내려지자 나주의 민종렬과 운봉의 박봉양은 더욱 기세를 올렸고 금산의 정숙조, 장흥의 박헌양도 반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동학군 지도부는 정부와 민보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선제공격에 나섰다.

    5. 항일전의 전개
    동학군의 주력은 항일전을 위해 대병력을 동원하여 북으로 출진하였다. 충청도 수부(首府)인 공주(公州)와 병영이 있는 청주(淸州)와 그리고 홍주성(洪州城) 공격이 일차 목표였다. 제일 먼저 충청도 서부지역 동학군들은 10월 28일에 홍주성을 공격했다. 출동한 일본군과 관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막강한 화력으로 수비하자 수백 명의 희생자만 내고 물러섰다. 전봉준은 공주를 향해 10월 22일부터 출진하였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이 때 남원 토박이 동학군인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오수 접주인 김홍기, 임실접(任實接) 접주인 최승우, 흥양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인 남응삼, 장수 접주인 황내문에게 서로 협력하여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으나 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전투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개남 동학군이 14일 저녁 때 임실에 당도하자 현감 민충식(閔忠植)이 환영하였다. 민영준(閔泳駿)의 조카인 그는 김개남이 상이암에 있을 때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까지 맺었다. 개화당 세력에 밀려난 처지이므로 김개남의 항일전을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주병사 민준호(閔駿鎬)도 이런 처지로 김인배 동학군과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튿날(15일) 김개남이 전주로 향할 때 그는 행군도성찰(行軍都省察)로서 군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올라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임실 현감 민충식은 동비와 결탁하여 비도들이 전주를 공격할 때 전봉준, 김개남 등과 동행하면서 공모하였고, 또 비도들이 공주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현감은 전봉준을 수행하여 노성(忠淸 魯城)까지 갔다. … 의당 사형을 내려야 하지만 관직에 있으므로 처리가 지체되고 있었다. 순사 2명과 병정 3명으로 하여금 압송하다가 … 1895년 1월 4일 천안군 상동에 이르렀을 때 …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김개남은 임실에서 병력을 보충하여 16일에 전주로 올라갔다. 신원(新院)에 도착했을 때 순천 부사 이수홍(李秀弘)과 고부 군수 양성환(梁性煥)을 만나자 군수전을 염출할 목적으로 이들을 체포하여 전주로 끌고 가 진중(陣中)에 가두었다. 이수홍 순천 부사는 군수전 3천냥을 바치고 풀려났으나 고부 군수 양성환은 저항하다 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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