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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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
(교사교리연구 제 1호 - 포덕 140년 10월)
표 영 삼
머 리 말
포덕35년(1894년, 이하 서기로 표기함) 동학혁명운동 때 어느 지역보다 제일 먼저 기포한 곳은 금산(錦山) 지역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 동학군들은 12월까지 항쟁하였으나 금산 지역만은 1895년 1월 하순(음)까지 일본군과 끈질기게 싸웠다. 혁명기간 중에도 보수세력과의 공방전은 어느 지역보다 처참하였다. 남원과 하동, 성주(星州), 홍천, 홍성, 장흥 그리고 나주 지역이 처참하였다 하나 사상자의 규모나 재산상의 피해로나 금산 지역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금산지역의 대결구도는 보수세력이 강한 금산(錦山) 쪽과 동학세력이 강한 진산(珍山) 쪽의 대결로 나타났다. 금산 쪽은 보부상(褓負商) 조직이 강했으며 보수세력은 이들을 앞세워 동학군을 괴롭혔다. 반대로 진산 쪽은 동학조직이 강하여 보수세력을 공격 제압하였다. 이 지역의 동학세력은 조재벽(趙在壁) 연원조직(包組織)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조재벽 포(包=淵源)는 청산(靑山), 옥천(沃川), 황간(黃澗), 영동(永同)과 연산(連山) 일부 지역, 고산(高山) 일부 지역, 금산 일부 지역, 그리고 진산 전체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원수도 수천명에 이르렀고 결속력도 매우 견고했다. 그는 1892년 11월에 전라도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서장옥,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등과 연대를 가졌으며 1893년 2월 광화문 앞 복소운동과 3월의 보은 및 원평의 척왜양창의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이끈 고부민란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서인주(徐璋玉),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과 뜻을 같이하여 혁명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3월 초(3월 8일 또는 12일)에 금산에서 처음 깃발을 올린 것은 우연한 기포가 아니었다. 관원들의 심한 주구(誅求)도 인심을 이탈케 하였겠지만 금산 지역의 기포는 호남 동학 지도부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기포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기부터 다른 지역 동학군을 불러들여 연합전선을 폈던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3월 중순경에 진산(珍山)으로 달려온 동학군은 멀리 남원, 임실, 태인 지역을 위시하여 인근의 연산, 고산, 전주 동학군들이었다. 그 후 10월의 시리니재 전투에도 김개남 휘하의 동학군과 다른 지역 동학군들이 많이 참가하여 싸웠다. 이 지역의 혁명운동은 조재벽 연원의 항쟁으로만 국한시켜 보지 말고 전라도 동학혁명운동의 전체 흐름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금산 지역의 혁명운동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동학이 자리잡은 과정을 살펴보고, 둘째, 기포과정과 보수세력과의 대결과정을 살펴보고, 셋째 집강소 활동 상황과, 넷째 10월의 소리니재(松院峙) 전투 상황과, 다섯째 일본군과의 항쟁, 끝으로 대둔산(大芚山) 전투와 염정골의 최후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동학의 포교와 조재벽포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경주의 최제우(大神師 水雲 崔濟愚)가 지례(知禮), 김산(金山=金陵) 및 호남의 진산(珍山), 금산(錦山) 산골을 왕래하였다"고 했다. 대신사가 생존했을 당시이므로 1862년 상반기에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1861년 10월에 경주관아로부터 탄압을 받은 대신사는 11월에 제자인 최중희(崔仲羲)를 대동하고 경주를 떠나 정처 없는 여행길에 나섰다. 울산, 진해, 고성, 승주를 거쳐 12월 15일경에 당도한 곳은 전라도 남원(南原)이었다. 남문밖 서형칠(徐亨七)을 만나 거처를 정하게 되었고 이들에게 포교하여 후원을 받아 12월 그믐께 교룡산성 덕밀암(德密庵·隱蹟庵)으로 들어갔다. 6개월간 머물면서 인근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포덕(布德=傳敎)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진산과 금산 지역에서도 여러분이 찾아와 사제지간이 것 같다. 이들은 대신사를 모셔가기도 하고 수도방법을 지도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7월 초경에 대신사가 경주로 돌아가자 이들은 용담을 왕래하면서 도맥(道脈)을 이어왔다. 그러다 2년 후인 1864년 3월에 대신사가 조선왕조에 의해 순도하자 도맥은 끊어져 버렸다. 1887년에 이르러 황간(黃澗)의 조재벽(趙在壁·趙敬重)이 입도하면서 포덕을 시작하여 20여 년만에 동학의 도맥을 다시 잇게 되었다. 그는 옥천, 영동, 청산 지역에서 포덕(布德=布敎)을 하다가 1890년경부터는 금산, 진산, 고산, 용담지역으로 넓혀 갔다. 1892년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자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기 시작하여 엄청나게 포덕이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조재벽은 알아주는 동학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93년 2월 광화문 교조신원운동 때에는 상소장에 서명인이 되어 많은 도인을 이끌고 참가 하였으며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와 전라도 원평에서 일어난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에도 많은 도인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이 때 신사(神師 海月 崔時亨)은 포제(包制)를 제도화하고 각포(各包)에 대접주를 임명하였다. 『동학도종역사』에는 서장옥(徐仁周=徐璋玉)이 호서(湖西) 대접주로 임명되고 조재벽은 서장옥의 지도를 받는 관계로 임명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93년 2월 광화문 교조신원운동 이후 서장옥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동학혁명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재벽은 자연스럽게 대접주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 같다. 조재벽은 신사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상주 왕실(旺室)에서 신사를 1893년 7월에 청산현 문바위골(閑谷里)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이사하게 주선한 것도 그였다. 김성원은 바로 조재벽 포중(包中)의 한 사람이었다. 1894년 12월 중순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신사와 손병희 동학군과 합류하여 영동전투, 북실전투, 12월 24일의 되자니 최후전투에도 신사와 같이 싸웠다. 또한 1896년 1월에는 강원도 치악산 수례너미에서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김현경(金顯卿)과 같이 신사로부터 경암(敬菴)이라는 도호까지 받았다. 1897년 4월에는 앵산동(利川郡 樹上里)에서 신사와 교리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어디에 살았는지 생활근거지가 분명치 않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황간(黃澗)의 수령이라고 여러번 나온다. 권병덕(權秉悳) 기록과 『천도교회사초고(天道敎會史草稿)』에는 "조재벽, 최사문, 최공우(崔公雨)가 …(진산에서) 기포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1897년에 사망하였는데 어디에 묘소가 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조재벽의 연원조직(包組織)은 옥천, 영동, 황간, 청산, 금산, 진산, 고산, 용담 등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2. 금산서 최초로 기포
금산 지역에서 최초로 기포한 날짜는 3월 8일 또는 12일이라 하였다. 『금산피화록(錦山被禍錄)』에는 "3월 초에 기포하였다"고 했으며 『금산군지(錦山郡誌)』에는 "3월 8일에 무장한 동학군이 제원역(濟原驛)에 회합하여 이야면(李也勉)을 선봉장으로 5천여 명이 죽창과 농기를 들고 대거 금산읍에 들어와 관아를 습격하여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胥吏)들의 가옥을 파괴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금(3월) 12일에 동학도 수천 명이 몽둥이로 무장, 흰 수건을 두르고 읍으로 몰려와 관리들의 집을 불살랐다"고 하였다. 『금산군지』의 3월 8일 기포설은 근거가 분명치 않으나『금산피화록』과『오하기문』의 3월 초라는 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하기문』의 3월 12일 기포일은 3월 초라기 보다 중순에 가깝다. 3월 초라고 한 『금산피화록』으로 보면 3월 8일설이 맞을 것 같다. 지금까지 최초의 기포일은 3월 18일에 전봉준과 손화중이 당산(現 高敞郡 孔音面 九岩里 堂山)에서 기포한 날짜를 치지만(김개남도 지금실(現 井邑郡 山外面 東谷里 지금실에서 3월 18일에 기포하였다 함) 금산에서 기포한 날짜는 이보다 10일 내지 6일이나 빨랐다. 따라서 최초의 기포지는 고창 당산(堂山)이 아니라 금산 제원역(濟原驛)과 진산 방축리라 할 수 있다. 제원역은 읍에서 동쪽 4㎞지점에 있는 제원도(濟原道) 찰방역(察訪驛)이다. 삼례도(參禮道)·청암도(靑巖道)·벽사도(碧沙道)·오수도(獒樹道)·경양도(景陽道)와 같이 제원도(濟原道)는 전라도의 주요 역도의 하나이다.『동국여지승람』에는 무주의 소천역(所川驛)·용담현의 달계역(達溪驛)·진안군의 단령역(丹嶺驛)·고산현의 옥포역(玉包驛) 등 4개역을 관할하고 있었으며 많은 역졸과 12결의 둔전(屯田)을 가지고 있던 역참이다. 진산 방축리(防築里)는 진산읍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그 당시에는 각종 상거래가 많았던 장거리였다. 동학군은 동서 양쪽에서 금산읍을 공격하여 무난히 점령하였다. 제원역에 모여 있던 동학군은 이야면이 통솔하였고 방축리에 모여 있던 동학군은 조재벽(趙在壁·敬重)과 최공우(崔公雨) 접주가 통솔하였다. 그리고 금산 동학도들은 박능선(朴能善) 접주가 지휘하였다고 보여진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의하면 영동 옥천접주와 접사(接司) 13명을 잡아 조사한 결과 "금산 도륙자(錦山 屠戮者)"들이라 하여 혁명기간 동안 영동과 옥천 도인들이 많이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진산읍 방축리(防築里)에는 진산 동학군과 인근지역 연산이나 고산 동학군들도 가세하였다고 추측된다. 동학군들은 금산읍을 점령하고 악질 관리들을 응징하는 선에서 그친 것 같다. 이 때 금산군수 민영숙(閔泳肅)은 동학군에게 해를 입지 않은 것 같다. 동학군이 금산읍을 점령한 후의 기록은 두 가지가 있다. 『금산군지』에는 "동학군은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들의 가옥을 파괴하였다" 하였고 <정공순의비(鄭志煥殉義碑)>에는 "적은 먼저 제원역을 접거하니 정지환은 군민을 규합하여 바로 김제룡(金濟龍)등을 몰아냈다"고 하였다. 또한 3월 23일자로 당시 군수였던 민영숙의 보고를 받은 의정부는 "동학도소라 칭하며 통문을 발송하자 모인 자가 근 천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미 소원하고 있는 것을 해당 읍에서 (폐정을) 바로잡아 주고 그 연고를 소상히 효유하여 퇴산시키라는 뜻으로 제칙(題飭)을 따로 보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군수를 해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금산피화록』에는 "3월 초에 보부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錫), 사인 정두섭(丁斗燮)이 힘을 모아 막아 지킴으로써 참혹한 화를 간신히 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숙조(鄭 朝)의 순의비문(殉義碑文)에는 "적을 막으려 의를 일으켜 공(鄭 朝)을 주맹(主盟)으로 추대하여 좁은 목을 나누어 방어하였다"고 하였다. 관아까지 점령하고 악질 서리들을 응징한 것이 사실이므로 동학군을 물리쳤다는 비문들은 사실과 다르며 공적을 높이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동학군은 금산읍을 공격할 때 용담현도 공격하였다. 『동학당정토약기』에 용담현령(龍潭縣令) 오정선(吳鼎善)의 말에 "동비(東匪)가 봉기하여 먼저 금산과 용담을 습격하자 … 쫓아내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일단 격퇴하였다"고 하였다. 제원역에 모였던 동학군 일부는 용담현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것이다. 즉 현령 오정선(吳鼎善)은 중과부적임을 알고 동학군과 타협하여 대결을 피했으며 그러자 동학군은 며칠 후 물러났던 것이다. 이것을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격퇴하였다"고 표현한 것이다. 금산지역 동학군의 기포는 금산읍과 용담읍을 점령함으로써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0여 일이 지나자 보수세력들은 동학군의 근거지인 진산 방축리를 공격하여 보복하기 위해 보부상 우두머리인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이 인근 고을의 보부상들을 모았다. 그리하여 4월 2일 방축리를 공격하여 동학군 다수를 살해하였다. 수록(隨錄) 영기조(營寄條)에는 "4월 초 2일 신시(申時) 금산군 행상(行商, 褓負商)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은 읍민과 행상 천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진산(珍山) 방축리(防築里)로 달려가 동학도들을 공격, 114명을 육살 하였다"고 하였다. 황현(黃玹)도 "금산의 행상 우두머리인 김치홍, 임한석 등이 상인과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인솔하여 진산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114명을 베어죽였다"고 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은 "금산 백성과 보부상 5∼6백명이 동학당을 공격하여 100명을 살상하였다 하더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단석(李丹石, 時聞記)은 "4월에 금산군수가 동학도를 많이 죽였다"고 하였다. 교중의『김낙봉이력(金洛鳳履歷)』과『동학사』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부안에서 청산으로 신사를 찾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진산 방축점에서 일박하고 4월 1일 아침에 떠난 김낙봉은 다음날 "금산 포군(砲軍)에게 (진산 동학군이) 함몰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했다.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에는 "갑오 춘(春)에 이병춘(李炳春, 任實接主)이 진산 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로잡혀 총살될 뻔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옆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함께 쓰러져 … 살아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장계에는 "이달 초 3일 금산군 사람인 박병중(朴秉仲) 등이 의병 3천여 명을 일으켜 동학도를 토벌하였다. 죽은 이가 70여 명이요 부상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가 600∼700명이나 되었다. 동학 여당들은 도망쳐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 용담현령 오정선은 공초(供招)에서 "금년 3월에 … 금산군 보부상을 출의(出義)시켜 진산군을 공격하여 동학도 100여 명을 진멸시켜 그 공로로 진산군수에 승진, 3개월간 부임한 바 있다"고 하였다. 금산 민보군의 공격으로 진산 동학군은 최소한 70여 명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부상한 것 같다. 금산의 보부상 세력은 전라도에서도 강력한 조직이었던 것 같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금산 부상패가 소원할 일이 있어 수 천인이 모였다. 때마침 태인에 모이라는 말을 듣고 … 그 곳에 가보니(金山面 巨野) 동학당이라 …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 의정부는 부상들이 잇따라 동학도들을 싸워 몰아낸 공은 있으나 명령 없이 제멋대로 취당하며 싸운다. 이런 폐단이 커지기 전에 … 마땅한 조처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부에서도 금산 부상배들이 강대하여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한 것 같다. 기습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진산 동학군은 곧 보복할 준비에 들어갔다. 수록(隨錄)에 4월 3일자 금산 공형(錦山公兄)의 보고가 있는데 "수천 명이 방금 진산 방축리와 충청도 옥천 서화면(西化面)에 모여 금산읍에 돌입, 생령들을 도륙하리라는 풍설이 낭자하다" 고 하였다. 금산군민은 이 소식을 들고 공포에 떨었으나 진산 동학군은 전봉준 동학군과 합류하기 위해 금산 보수세력을 보복할 여유가 없었다. 즉 이 때 혁명을 선포한 전봉준 동학군은 4월에 접어들면서 인근 고을을 차례로 점령해 들어갔다. 수령들은 관찰사에게 방비책을 마련하라고 아우성이었고 김문현(金文鉉) 감사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인근 고을 장정 수백 명씩 징발하였다. 한편 보부상들도 불러들여 4월 6일 영장 이광양(李光陽)에게 영병 2백 50명과 보부상 1천여 명을 이끌고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소식을 들은 동학군도 결전을 앞두고 인근 동학군을 불러모으게 되었고 진산 동학군들도 금산 보수세력에 대한 보복을 미루고 이 곳으로 출동하였다.
3. 6월 중순에 집강소 설치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군과 감영군은 4월 7일(양 5월 11일)에 황토재에서 결전을 벌인 결과 동학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동학군이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자 정부는 홍계훈을 출동시켰다. 홍계훈 경군은 황룡천에서 동학군을 만나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장성 월평(月坪)장터에서 점심을 먹던 4천명의 동학군은 경병의 기습을 받고 당황했으나 곧 반격에 나서 신효리(辛孝里)까지 밀고 들어가 이학승(李學承) 대장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경군이 영광에서 머뭇거리는 때를 타서 동학군은 전주로 달려갔다. 4월 27일(양 5월 31일) 드디어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를 점령하였다. 홍계훈 경군은 달려 왔으나 완산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여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다급한 나머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를 탐지한 일본군도 뒤따라 출동하게 되었다. 사태는 뜻밖에도 청일 양군의 대결장으로 변하여 나라는 위기에 빠져들었다. 정부는 "동학란을 수습하였으니 양군은 물러가라"는 구실을 내 세우기 위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勳)에게 동학군과 화약(全州和約)을 맺어 종결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교섭은 급진전하여 5월 7일에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새로 임명된 김학진(金鶴鎭) 전라감사는 삼례에서 감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동학란은 평정되었으니 물러가라" 했으나 일본군은 본색을 드러내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김학진 감사는 사태를 평온하게 끌고 가기 위해 동학군을 포용하였고 전봉준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탐관오리의 발호를 청산하기 위해 동학군이 주도하는 집강소(執綱所)를 각 고을마다 설치하기로 하였다. 6월 초순에 지시하여 각 고을에는 6월 중순부터 집강이 임명되어 동학군의 집강업무가 시작되었다. 정석모(鄭碩謨)의『갑오약력(甲午略歷)』에는 "6월에 관찰사는 전봉준을 감영으로 초치(招致)하고 … 전봉준의 요구한 집강소를 각 고을에 설치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금산 보수세력들은 여러 형태로 동학군에 저항하였다. 퇴리 정지환(鄭志煥) 등과 공형(公兄), 그리고 촌외 인사 박승호·고제학·박승숙·전첨사·박항래 등이 전참판 정숙조(鄭 朝)를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의군(義旅)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수였던 조명호(趙命鎬)는 김학진 감사의 지시에 따라 동학군을 자극하려 하지 않자 하나 둘씩 떠나 버렸다. 『금산군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월에 도내 동학군이 더욱 강성하여 재침할 우려가 있으니 토벌할 것을 김진용(金震龍 致洪?)이 군수 이규문(李奎文)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군수는 이에 응하지 않고 희미한 태도로 대답을 했다. 격분한 김진용이 떠나자 읍민들도 관의 처사에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집을 버리고 떠나 금산읍 천호(千戶) 부중은 동학도만 남아 공허해졌다. 6월 중순에 이르자 집강 업무가 시작되면서 사태는 뒤바뀌었다.『금산피화록』에는 "거괴 전봉준이 감영에 있으면서 보낸 사통(私通)이 종종 내려오자 잇따라 각 고을에는 집강(執綱)이 있게 됐다"고 하였다. 아마도 금산에 집강소가 설치된 것은 6월 중순경으로 보인다. "최초로 집강(執綱)에 차임(差任)된 동학도는 용담현에 사는 김기조(金己祚)이며 그 후임은 금산읍에 사는 조동현(趙東賢)이었다" 한다. 금산읍 어디에 집강소와 도소를 설치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일단 관찰사의 명령으로 동학군 집강소가 설립되자 보수세력의 저항은 중단되었다.『금산피화록』에는 "(동학군의) 유인에 빠져들어 한결같이 빗나가 교화가 먹혀들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읍의 백성들은 노인들을 부축하고 어린 것들을 안고 서로 바라보며 흩어지니 성중은 비어 버렸다"고 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 동학도가 일어나자 그 읍(진산) 백성들은 모두 비도에 가담했다. 금산현에 사자(使者)를 보내 동비도(東匪徒)에 가담하라고 날짜까지 정해주며 승낙여부를 대답하라고 했다. 금산현민 들은 현감에게 제안하자 그는 … '비도에 가담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 동학의 권유를 거절했다. 이것이 작년 6월의 일이었다. 그 후 진산 사람이 다시 와서 동학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지만 또 이를 거절했다. … 작년 6월에 진산 동학도가 대거 이 읍을 습격하고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했다. 일본군이 1894년 11월(음)에 들은 것을 적은 것으로 10월의 사건을 6월로 착각한 것 같다. "6월에 진산 동학도가 대거 이 읍을 습격하고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금산피화록』에는 "5월 망간에 동도들은 모두 귀화했다"하였고 "인심이 안정되자 전후 5개월에 걸쳐 농민은 농사 짓고 상민은 장사하였다"고 했다. 귀화했다는 것은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과 관이 상화(相和)했다는 뜻이고, 5개월 간 화평했다는 것은 10월 중순까지 대립이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 동학군이 진산과 금산에서 집강소 활동으로 제일 먼저 강조했던 일은 신분제타파(身分制打破) 운동이었다. 동학은 1860년에 창도된 이래 신분제 타파를 부르짖으며 인간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동학혁명 중 제일 먼저 조선왕조의 기둥이었던 신분제를 때려부수는 일을 하였다. 동학군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양반을 조롱하거나 모욕을 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일반 민중들과 천민을 대하는 몸가짐이나 태도는 겸손하고 친밀하기 그지없었다. 3. 동학군 재기와 보수세력의 저항 일본군은 장차 이 나라를 강점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6월 21일 새벽에 일본군은 왕군을 강점하고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는 한편 고종을 구석으로 몰아부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앉히고 국군기무처(國軍機務處)를 만들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밀려난 민씨들은 물론이요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없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은 친일정권에 편들어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동학군을 섬멸하기만 바랬다. 7월 초부터 일본군을 몰아낼 대책을 숙고하던 동학군은 8월 1일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로 전쟁을 확대시키자 항일전을 결의하게 된다. 8월 25일 남원대회에 모인 5만여 명 동학군은 항일투쟁을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동학군은 정예군을 조직하고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전주 동학 도집강소(都執綱所)는 각 고을에 농토 1결(結)당 7두의 쌀과 호당 말먹이 콩 1되씩을 할당하고 9월 하순부터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9월 13일경에 동학지도부는 재기포에 대해 의견을 모았고 18일에는 신사가 청산에서 전 동학군에게 기포령(起包令)을 내렸다. 대륙침략을 기도한 일본군은 9월 26일(양 10월 26일)에 전쟁을 확대하여 압록강을 건너 구룡성과 안동을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대동강 이남의 수송로의 안전을 위해 동학군을 섬멸시킬 목적으로 후비보병(後備步兵)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주축으로 제18대대 제1중대, 제6연대 제4, 제6, 제7, 제8중대 및 제10연대 제4중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후비보병 제6연대 제4, 제6, 제7, 제8중대는 황해도 지역에, 나머지는 삼남 일대에 투입하였다. 강원도에는 서울수비대를 투입하였다. 현역 3년, 예비역 4년, 다시 5년간의 후비병역에 복무하고 있는 이들은 30세 전후로 노련하였다. 10월 6∼7일( 양 11월 3∼4일)부터 삼남으로 출동하면서 경병도 신식무기로 무장시켜 같이 출동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동학군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나서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한국 정부도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였다. 일본군과 경병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각 군현 보수세력들은 민보군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동학에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특히 순무영(巡撫營)은 9월 27∼8일에 금산의 정두섭(丁斗燮)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수교(首校)인 정지환(鄭志煥)을 본영 군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곧 정숙조(鄭 朝)를 맹주로 추대하고 민보군 조직에 착수하였다. "(군관으로 임명된) 정지환은 전 참판 정숙조와 길기순(吉基淳)·신준호(辛埈濠)·박승호(朴勝鎬)·고제학(高濟學)·박제군(朴齊君)·박연수(朴延壽)·박승숙(朴勝淑)·김진용(金震龍)·정두섭(丁斗燮)·엄채영(嚴寀永) 등과 창의군을 만들어 동학군을 초멸하리라는 설단(設壇=금산성 북문 외에 설단)의 맹세까지 하였다. 『금산군지』에는 "맹주에 정숙조(鄭 朝), 회장에 박승호(朴勝鎬)·고제학(高濟學), 참모장에 박승숙(朴勝淑), 참모에 이석구(李錫九), 감군에 김두진(金斗振)·곽병규(郭秉奎), 의병장에 신구석(辛九錫-龜錫)·양재봉(梁在鳳), 포사장에 정두섭(丁斗燮), 향군에 지영복(池永福)·한영운(韓永云), 훈장에 고주석(高疇錫) , 도비장에 임한석(任漢錫), 비장에 변순여(卞順汝), 전초장에 엄포영(嚴 永), 초장에 김성초(金性初) 등을 임명하였으며 무사(武士)는 250명이라 하였다.『검암유고(儉庵遺稿)』에도 의회장(義會長)에 고제학·박승호, 맹주에 정숙조, 포대장에 정두섭, 무대장(武隊長)에 정지환, 참모에 양재봉(梁在鳳), 신귀석(辛龜錫)이었다고 하였다. 10월 초에 경병과 일본군이 출동하였음을 알게 된 동학군은 10월 중순부터 행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0월 15일 전후하여 전봉준이 이끄는 정예 동학군은 삼례에서 논산으로 진출하였고, 손병희도 북접 동학군을 이끌고 논산에 와서 전봉준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옥천, 영동, 진산, 금산, 고산 지역 동학군들도 논산으로 가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런데 금산 보수세력은 민보군을 동원하여 동학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진산에 집결했던 동학군은 금산 민보군을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때마침 삼례에 진출하여 있던 김개남 동학군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오하기문』에는 "남원 김개남이 청주로 출동하는 길에 삼례에 이르렀을 때 전봉준을 성원하고자 한 지대를 보내고, (자신은 금산으로 진출하여) 금산읍을 점령, 현감 이용덕(李容德)을 쫓아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동학군의 주력은 삼례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일부 병력만 논산과 진산에 보내 지원하였다. 진잠 공형의 보고에 "김개남 동학군은 11월 10일에 금산에서 진잠(鎭岑)으로 진출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5천명 대군을 이끌고 11월 8일에 삼례를 떠나 금산에 들러 11월 10일에 진잠으로 진출한 것 같다. 금산 민보군 수천명과 동학군 수천명은 22일에 진산군과 금산군의 접경인 소리니재(松院峙) 일대에서 대진하게 되었다. 22일 오후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2일간 대치했던 전투는 24일 오전 10시에 동학군의 총공격으로 바뀌었다. 산 위에서 함성을 지르며 노도처럼 밀고 내려가자 민보군은 금산으로 달아났다. 여유를 주지 않고 동학군이 추격하자 민보군은 64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져 버렸다.『금산피화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충청도 비류들이 연대하여 금산을 도륙하려 하였다. 소모관 정두섭은 포수 200명과 군관 정지환, 총독무사 및 병졸을 이끌고 진산현 경계에 당도했다. 그들은 … 높은 산상을 선점하고 진을 치니 수만이었고 포창(砲 )의 진세는 군율이 있는 듯했다. 양식 마련과 밥 짓는 것은 진산에서 맡았고 마치 개미 떼처럼 모였으니 … 모두 진산 남녀노소였다. 정오께 서로 접전하니 금성산·삽치(揷峙)·민치(民峙) 등 세곳이었다. … 적과 싸운지 5주야(3일) 만인 24일 사시(巳時)에 당해낼 수 없어 패산하였다. …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니 64인이오 돌아오지 않아 생사를 모르는 자도 얼마인지 모른다. 군관 정지환은 금산 관아로 끌려가 사살 당하였고, 동생 정영백(鄭永白)도 사기점에 끌려가 살해 당하였다. 아들 정집종(鄭集鍾)는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둘째 아들 정회종(鄭晦鍾)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소모관 정두섭(丁斗燮)은 부하 수십명과 같이 경상도 초포사(剿捕使) 박항래(朴恒來)를 찾아가다 유가면(柳加面) 오동리(梧桐里)에서 동학군에게 체포되어 금산읍 장대에 끌려와 포살(砲殺)되었다. 맹주인 정숙조는 25일 제원역에서 체포되어 살해 당했다. 금산읍에 돌입한 동학군은 공청과 향교, 보수세력의 집들을 소각하였다. 금산읍의 보수세력은 재기불능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이로부터 인근 고을 동학군들은 수 없이 드나들었다. "영동·옥천·무주 등의 적도들이 차례로 들어왔다.…그밖에 개남포·연산포·공주포·강경포 등도 들어왔다 나가고,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한다.『금산군지』에는 "군수 이용덕(李容德)은 동학군이 들어오자 허둥대며 도망갔다"하였고, 일성록(日省錄)에는 "무례히 인부(印符)를 몸에 지니고 도피하였으므로 부득이 파출(罷黜)한다"고 하였다.『동학당정토약기』에는 "(동학군에 붙잡혀) 한쪽 팔이 잘렸고 주리를 틀려 다리에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의 대 병력은 11월 7일에 용담현으로 출동하였다. 10월 하순부터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탄압하자 진안과 고산, 무주 동학군들과 연합하여 공격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1월 8일에 동학군 수천명이 북쪽에서 공격하였다 한다. 때마침 무주접주 이응백(李應伯) 삼부자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배후인 동쪽을 공격하여 왔다. 양쪽에서 협공 당한 민보군은 이튿날 9일 오시에 항복하고 말았다. 뜻밖에도 지난 달(11월) 초 8일에 진안·고산·진산·금산 등지의 동학도 수만 명이 북쪽에서 쳐들어와 접전이 벌어졌다. 무주접주 이응백(李應伯) 삼부자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와 동쪽에서 갑자기 배후를 공격했다. 두 갈래의 적세가 너무 커서 적을 당해 낼 수가 없어 초 9일 오시에 패전하고 말았다 위세를 떨치고 있던 진산과 금산, 옥천 지역 동학군들은 뜻밖에도 11월 11일과 13일에 공주전투와 청주전투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대패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조재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가 이끄는 동학군들은 끝까지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다. 다른 지역 동학군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일본군이 금산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길목을 지키다가 기습하기로 하였다. 무기체계가 월등한 일본군을 맞아 항쟁하기 위하여 천여 명의 동학군은 옥천 방면에 집결하였다.
4. 일본군의 금산 진입
인천 병참사령관(伊藤祐義)이 내린 훈령을 보면 동쪽, 중부, 서쪽 등 세갈래로 1개중대씩 출동시켰으며 대대본부(대대장 南小四郞)는 중부 분진대(分進隊)와 같이 내려오게 되어 있었다. 중부로 내려오던 일본군(中尉 白木誠太郞)은 11월 6일에 옥천(沃川)에 이르러 금산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공주로부터 동학군에 의해 거의 포위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공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이들은 제원역에서 10km 동쪽 지점인 양산(陽山) 마을로 와서 유숙하게 됐다. 동학군 천여 명은 11월 8일(양 12월 4일) 밤에 양산(陽山)을 에워싸고 야습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오후 3시 양산에 도착하니 동학군은 금산현과 옥천군 방향으로 퇴각하고 없었다. 민가에서 사영(舍營)하고 있었는데 밤 10시경에 동학군 1천여 명이 마을 보초선을 넘어 진입하여 왔다"고 하였다. 맹렬한 교전이 벌어지자 200m 전방 민가에 동학군이 불을 질렀다. 주변이 환해지자 일본군은 동학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시간 여나 교전하였는데 11시 3분께 동학군은 금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수적으로 월등한 동학군은 일본군의 연발총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동학군의 전사자는 40명이었고, 일본군은 탄약 1,152발을 사용하였다. 이튿날인 11월 9일에 금산읍 동쪽 1km 지점에 일본군이 나타나자 길목 언덕에 매복했던 동학군은 다시 기습을 감행하였다. 백목(白木 中尉)은 "12월 5일(음 11월 9일) 오전 8시 30분 양산촌을 출발, 금산현을 향해 전진하다 오후 3시 10분경 금산현에서 약 600m 떨어진 곳에 당도하자 적도들은 금산현 북단으로부터 사격해 왔다. 지대는 즉시 산재 전진하자 적은 저항해 올 기력이 없었는지 고산·용담 쪽으로 퇴각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기습전은 3시부터 4시 반까지 1시간 여에 걸쳐 벌어졌다. 동학군은 스나이더총 6정 정도(3정은 일본군이 노획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군도 고전한 것으로 보인다. "즉시 산재 전진하자 적은 저항해 올 기력이 없었는지 고산·용담 방향으로 퇴각하였다"고 하였으나 사실과 다르다. 6명이 전사하며 1시간 남짓하게 맹렬히 공격하였으므로 쉽게 물러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날 오후 5시 패잔한 적 5∼60명은 금산현 북쪽에서 읍내로 침입하려 하다가 우리 초병이 사격하자 용담 쪽으로 퇴각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금산읍에서도 다시 기습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금산에 들어온 일본군은 몸져 누워 있던 금산군수 이용덕을 만났다. 그는 소 한 마리와 담배 2묶음을 일본군에 보내어 아첨하였다. 이틀간 체류했던 일본군은 11월 12일에 진산(珍山)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에도 동학군은 산발적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진산에 도착하여 보니 동학군은 흔적도 없이 숨어버렸다. 동학군을 지원하던 현감 신협(申 )도 15리 떨어진 산중에 피신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간신히 현감을 불러다 알아보니 동학군에 가담한 사실을 밝혀냈다. 포박하여 끌고 가려 했으나 동행했던 내무아문(內務衙門)이 "일반 죄수 처럼 포승 지우는 것은 혹독하다" 하여 구금하지는 않았다 한다. 12월 8일(음 11월 12일) 금산현을 출발하여 진산현으로 향했다. 본대가 진산현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연도 곳곳에는 시체가 뒹굴어 까마귀 떼의 밥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동학당인지 또는 인민인지 … 분명치 않았다. 진산현을 향해 가는 본대는 곳곳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했지만 격렬한 적은 만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공주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13일 아침 서둘러 연산(連山)으로 떠나갔다. 일본군이 동학군을 제압하자 보수세력들은 날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이 원래 강했기 때문에 진산 보수세력들은 준동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물러가자 동학군은 다시 나타나 활동하였다. 이로부터 관군이 쳐들어오면 숨었다가 떠나가면 다시 나타나는 게릴라식 전법을 구사하였다.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하였다. 물색한 끝에 전북 완주군 운주면(雲洲面) 산북리(山北里) 기동(基洞, 터골 垈谷) 북서쪽 '석도골' 대둔산 미륵바위(715.1m) 정상으로 정하고 11월 중순께 산상에다 도소를 마련하였다.
6. 대둔산서 최후의 항쟁
바위 꼭대기에는 초막을 칠 수 있는 평평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정상에 있는 120㎡ 정도의 장소에는 축대를 쌓아 제1 초막을 쳤다. 뒤쪽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바위가 있어 아늑하였고 주위는 낭떠러지 암벽으로 되어 있다. 동쪽으로 내려가다 좌측 바위 틈을 빠져 나가면 50㎡ 정도의 평평한 공간이 있다. 여기에는 제2의 초막을 쳤다. 제1초막에서 25m 쯤 남동쪽 계곡으로 내려오면 역시 초막을 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능선 너머 15분 거리에는 절터가 있어 샘물이 나온다. 또한 염정동과 능선으로 이어져 식량을 운반하기 쉬운 곳이다. 최공우 등 진산 동학군 지도부는 11월 16일께 5∼6명이 이 곳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도와줄 부인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의산유고(義山遺稿)에는 "산후동(山後洞)에 한참산(漢 山)이 있으며 그 상봉인즉 마천대(摩天臺)이다. 낭떠러지 절벽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 … 지금 이름 있는 적괴(賊魁)가 도당을 모아 굴 집에 들어갔으며, 부근의 적들도 때때로 숨어들고 있다 한다. 기찰을 보내 탐색하니 과연 위려(危慮)할만 하다"고 하였다. 『일본공사관기록』에는 "한덕산(寒德山 한듬산) 에서 한참 아래쪽에 있으며 … 대단히 큰 바위산으로 한 줄기 작은 길이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야 오르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일제 말인 1942년부터 이 곳에 정착한 이규만(李揆萬, 1933년)은 토박이로부터 동학군이 일본군과 싸운 이야기를 들었다 하며, 나무하러 여러차례 올라가 보았다 한다. 대둔산 케이블카 정상 정류장에서 서쪽 계곡 아래에 있는 육각정(六角亭)으로 내려가서 서쪽 가파른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가서 가파른 고개를 넘어 석도골 골짜기로 다시 내려간다. 거대한 미륵바위를 좌측으로 끼고 계곡으로 올라가면 정상 능선에 이른다. 좌측에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 데 여기가 미륵바위이다. 정면은 사다리가 필요하나 좌측 옆을 돌아가면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위 위에 동학군들이 초막을 쳤던 자리가 있다. 말라죽은 나무가 많아 나무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오른쪽 계곡에는 샘물도 있었다.. 『의산유고(義山遺稿)』에는 "산상에 … 여러 개의 바위 돌이 포개져 있었다. 그 속에 두 칸 집을 지었고 돌로 벽을 쌓아 처마 끝만 드러나 있었다. 동서와 북쪽 삼면은 깎아 세운 듯하여 날개를 달지 않으면 들어 갈 길이 없다. 앞쪽 아래로 한 줄기 길이 있으나 삼층 사다리를 늘어뜨려야 올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군 기록에는 초막이 3채라 하였다. 처음에는 정상에 한채를 지었다가 인원이 늘어나자 두 곳에 더 지은 것으로 보인다. 들어간 동학군 지도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崔士文)과 접주 최공우(崔公雨)를 위시하여 접주 김재순(金在醇)·김석순(金石醇)·진수환(陳秀煥), 그리고 교수(敎授)인 강태종(姜泰鍾) 등이었다. 도금찰은 육임직인 교장 교수급과 같이 접주의 부친이나 어른에게 발령하는 관례가 있어 최학연은 접주 최공우의 부친으로 보인다.『의산유고』에는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 십수명이 입산하였다고 하였다. 일단 자리를 잡은 동학 지도부는 수시로 내려가 진산 여러 곳의 동학군을 결속시켰다. 대접주인 조재벽은 12월 중순께 호남에서 철수한 신사와 손병희 동학군이 영동에 당도하여 민보군과 전투할 때 합류하여 싸우다가 보은 북실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다시 음성 무극에 가서 역시 일본군과 싸웠다. 해가 바뀌어 1895년 1월 9일(양 2월 3일)에 이르자 충청감영은 병력을 출동시켜 대둔산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산세를 보자 기가 질렸다. 동학군을 공략할 방도가 서지 않아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신식총(洋砲)으로 사격하여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2일간 체류하다 대책이 없자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는 여기서 식량 공급을 10일간만 끊으면 굶어죽을 것이라는 양도(糧道) 봉쇄 작전도 구상해 보았으나 그럴 병력이 없었다. 대책이 궁한 그는 3일 만인 1월 13일에 떠나 버렸다. 이 때 금산 의병장 김진용(金鎭容 震龍 致洪)이 300명을 이끌고 왔으나 그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이 물러가자 이들 동학군은 영군을 불러들인 진산군관 하경석(河景奭)을 처단하고 금산읍까지 달려가서 수성군을 공격하여 많은 병사들을 죽였다고 한다. 17일 유시에 대둔산 적도들이 또 다시 함부로 날뛰어 진산군관 하경석(河景奭)을 살해하고 금산에 들어와 지키는 병사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연산 동면 비도들이 내응하니 그 무리들이 화를 일으킬 때가 머지 않았다. 감영군은 이 소식을 듣고 1월 19일에 문석봉 소모사를 다시 출동시켰다. 지난번과 같이 공격할 대책이 없자 진산읍으로 물러났다.『의산유고』에는 이간책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터골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주암(舟巖)에서 최공우와 친한 김공진(金公眞)을 꾀여 산상으로 올려보내 김치삼(金致三)과 장문화(張文化)에게 속임수를 노리는 서찰을 전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서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치삼 장문화는 보아라. 너희들이 산에 오르던 날, 정녕 나와 약속하기를 최사문, 최공우 삼부자와 숙질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그 공적으로 죄를 대신 용서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기일을 많이 어기고 있다. 기회를 얻지 못해 아직 손을 쓰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변심한 것인가. 어떤 사람인들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고치면 착하게 되리라. 너희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도륙될 것이다. 그러니 빨리 계책을 시행하여 조만간 최씨 적 3부자와 숙질의 머리를 베어 와 공을 세워야 죄를 용서받으리라. 22일에 김공진을 입산시켜 최공우에게 서신을 보이자 분노한 그는 김치삼과 장문화 그리고 뒤에 들어간 6명을 묶어 낭떠러지에 던져 죽여 버리니 계략이 성공했다고 하였으나 한마디로 엉터리 기록이다. 문석봉이 이곳에 처음 온 것은 1895년 1월 10일이었다. 3일만에 떠난 그가 김치삼과 장문화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최사문과 최공우 부자는 문석봉의 잔꾀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며 생사를 같이하는 동덕(同德)을 의심할 위인도 아니다.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문석봉의 잔꾀로 꾸며진 기록이다. 문석봉이 다시 출동하자 금산 보부상 두목 김치홍은 용담에서 대포를 끌고 왔다. 포탄은 골짜기 중간에 떨어지니 소리만 요란스러웠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주에서 따로 영병(營兵)이 온 것은 아니고 문석봉과 김치홍이 온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심영병(沁營兵=壯衛營兵)과 일본군 3개분대가 터골에 도착하여 사태는 급전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895년 1월 24일(양 2월 18일) 새벽에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안개와 비가 내려 날이 밝아서야 공격을 개시 하였다. 그가 보고한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동학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하였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요지 (1895년 2월 18일 특무군조) 1). 2월 17일(양)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2).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경부터 5, 6명의 적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그 후 민병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3). 18일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시 30분 일본군 1개 대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4).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시 40분,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는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또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5).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이 보고서는 과장되고 조작된 곳이 몇 군데 있다. 첫째, 동학군 전사자가 25명이라 했으나 노획한 화승총은 50자루였으니 절반도 못된다. 지방민들이 지금 50명 정도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나머지 20여 명은 좌우로 흩어져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쳤다.『동학사(東學史, 吳知泳』에는 접주 최공우가 벼랑에서 뛰어 내려 살아났다 했으며, 주민들도 다래 넝쿨로 뛰어내려 많이 살았다고 한다. 초막에서 4m 가량 내려오면 좌측 암벽에 뛰어 내릴 곳이 있었고 초막에서 6m 정도 내려오다 좌측 암벽사이로 빠지면 좌·우에도 뛰어 내릴 곳이 있었다. 다음은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고 하였다. 일본군은 뒤쪽 바위 2m 거리에서 일제히 사격하였다. 그런데 10m 아래쪽에 있던 한병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모두 죽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일본군은 자기들이 임신부까지 죽인 만행을 한병에게 떠 넘기려 한 기록이다. 또한 "몇 길의 암석이 담벽처럼 서 있었다"고 한 것도 과장된 기록이다. 암벽 높이가 4m 정도이니 젊은이면 누구나 기어오를 수 있는 바위이다.
7. 염정골의 최후항쟁
일본군에 의해 대둔산 항쟁에서 완패한 동학 지도부는 염정동(廉貞洞)으로 후퇴하였다. 염정동은 진산에 속하지만 연산 관내에 속한 도산동(道山洞) 일대까지 통털어 염정골이라 한다. 당시 400호 정도가 살았다 하며 최사문과 최공우, 양량옥(梁良玉), 박중집(朴仲執), 이홍기(李洪基), 김치선(金致善) 등은 이 곳에서 수백명의 동학군을 다시 모아 항쟁을 다짐하였다. 도소는 김세마(金洗馬)의 집이었다고 여겨진다. 마을 남쪽을 흐르는 실개천을 건너 수락으로 넘어가는 길 초엽 우측 한 가운데 있다. 연산현감 정대위는 동학군 활동이 다시 일어나자 충청감사에게 보고하였고 충청감사는 문석봉 양호소모사에게 초멸하라고 명령하였다.『의산유고』에는 "청산(靑山)의 적도가 재기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천여 명의 도당을 모아 서로 응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43명의 병력(병정 20명과 장관 23명)을 이끌고 1월 26일 새벽에 진잠(鎭岑)을 떠나 남면 증촌(增村)까지 20리를 행군하였다. 염정동까지는 30리가 남았으나 동학군에 대한 정보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였다. "무기와 양초(糧草)가 얼마인지 알 수 없어" 보부상 2명을 뽑아 탐지해 오라고 보냈다. 20리 정도 떨어진 이수령(梨樹嶺)까지 갔다가 동학군 파수막에서 붙들려 죽고 말았다. 연산현감도 며칠 전에 별감을 보냈으나 동학군에게 붙들려 살해 된 일이 있었다. 문석봉은 염정동으로 통하는 세곳의 길을 지키다가 나오는 사람을 붙들어 오게 하였다. 피난민 한 사람을 잡아오니 염정골 진사 권도현(權道賢)이었다. 동학군의 상황과 함께 도소는 김세마의 집에 정했다고 하였다. 43명의 병력으로 동학군을 공격할 대책이 서지 않아 시간을 보내던 그는 오후부터 대설이 내리자 출동하였다. 동학군도 폭설이 내리니 방심하리라 예측한 것이다.『의산유고』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가 실려 있다. 증촌(增村)에서 염정동까지는 30리로 … 5시 경에 길을 떠나 … 술시(戌時, 오후 8시)경에 20리 지점인 이수령에 당도하였다. 산 위 동학군 파수막에서 7명을 잡아 가두었다. … 숯을 피워 손발을 녹이고 염정동 김세마집으로 달려갔다. 장은 (키보다) 2척이 높았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대설로 적도들은 방심하고 잠들어 우리가 출동한 것을 상상치 못했다. 사람의 등을 밟고 담장을 넘어 … 대문 빗장을 풀어 병사들을 살금살금 방문 앞까지 접근시켰다. … 창거울로 들여다 보니 두 칸 큰방으로 비도의 대장막임을 알 수 있었다. 적들은 뒤섞여 누워 있고 북쪽 벽 모서리에 수십정의 총을 모아 세웠다. … 철편과 환도를 쥐고 달려들어 적을 밟고 총을 세워둔 곳에 이르렀다. 이때 … 밖에서 "저항하면 살갗을 이겨 버릴 것이다. … 거괴는 죽이되 협종자는 용서한다"고 소리치니 … 때는 자시(子正, 밤 11시∼1시)였다. … 비도들이 총이 있는 곳을 향해 (방으로) 들어오는 대로 찍으니 16명이었다. 나머지는 투항하여 결박하였고 400여 명은 옷을 벗겨 빈방에 가두었다. … 때는 축시말 인시 초(밤 3시)였다. 다시 토굴로 가서 40여명을 사로 잡아 … 5명의 괴수는 참하고 나머지 무리는 귀화시키니 1월 28일이었다. 마치 동학군을 4백여 명이나 잡은 것처럼 기록하였으나 이들은 주민들이었다. 50명 정도가 동학군이었고 그 중에서도 방안에서 찍어 죽였다는 16명과 괴수로 처단한 5명 등 21명이 진짜 동학군이었다. 최사문과 최공우는 체포되지 않았다.『동학사』에는 대둔산에서 내려와 기병하자 관병들이 출동하여 최공우의 집을 에워싸고 그를 결박하였다. 최공우는 처자를 불러 수 천금을 관병에게 주고 주찬(酒饌)도 차려오게 하여 후대하였다. 술을 마신 병정들은 호활한 마음으로 그를 풀어주었다. 최공우는 비호같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아 이놈도 치고 저놈도 치고 탈출하였다 한다.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염정동 자기 집에서 잡혔다는 것이며, 날짜는 1895년 1월 27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염정동 노인들은 동학군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최공우와 같은 유명한 인물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운주면 산중리(山中里) 장평에 사는 유인권(柳寅權, 1908년생) 옹은 최공우가 대둔산 산상에서 뛰어 내려 살아났다는 이야기와 그 후 북쪽 지방으로 가서 살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진산 어디에 살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일제 때 면장을 지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결 론
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진산 동학군이 주축이 되어 조재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 및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고산, 금산의 여러 접주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초기 기포는 무장 당산과 태인 지금실 기포보다 8일 내지 6일이나 빨랐다. 보수세력과 밀고 당기는 대립관계도 어느 지역 못지 않게 치열하였다. 이 지역의 대립 구도는 금산군의 보수 및 보부상 세력과 진산군의 동학세력간의 대결로 나타났다. 양군 사이에 지역감정이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립할만한 원인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다만 혁명과 보수간의 대립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동학사상과 유교사상의 대립으로 여겨지는데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이중세계의 구조를 부정하는데 기초하여 신분제를 배척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동학이 지향하는 이상이다. 이에 반해 당시 유교는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질서를 지향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동학과 유교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이단이었으며 반사회 집단이었다. 이상하게도 진산군 사람들은 동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관장을 비롯한 관원들도 동학에 가담하여 적지 않게 지원하였다. 이에 반해 금산 지역은 보수세력이 완강하였고 보부상 세력이 강하여 반동학 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혁명과정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혁명운동은 동학혁명 전체의 흐름을 잘 반영시키고 있다. 최초의 기포에서부터 집강소 활동기와 10월 소리니재 전투에서, 그리고 최후의 항쟁에서 일체감과 연대성과 저항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군과 경병에 의해 동학군이 고전할 때 이 곳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북접 주력과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대둔산과 염정골을 근거로 끝까지 항쟁하였다. 조재벽은 12월 중순께 신사와 손병희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영동전투를 거쳐 12월 18일의 보은 북실전투, 12월 24일의 음성 되자니전투에서 일본군과 끝까지 항쟁하였다. 한편 최사문, 최공우 부자를 위시하여 많은 동학 지도자들은 대둔산과 염정골에서 최후까지 끈질기게 항쟁하였다. 낡은 봉건왕조의 신분제를 극복하고 인간 평등사회 거설을 위해 보국안민을 지향하면서 목숨을 걸고 일본 침략세력을 물리치는 싸움에 나섰던 진산, 금산, 옥천, 영동, 황간, 용담, 고산, 연산 지역 동학군들의 숭고한 발자취는 이 시대의 역사를 전환시키는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
(교사교리연구 제 1호 - 포덕 140년 10월)
표 영 삼
머 리 말
포덕35년(1894년, 이하 서기로 표기함) 동학혁명운동 때 어느 지역보다 제일 먼저 기포한 곳은 금산(錦山) 지역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 동학군들은 12월까지 항쟁하였으나 금산 지역만은 1895년 1월 하순(음)까지 일본군과 끈질기게 싸웠다. 혁명기간 중에도 보수세력과의 공방전은 어느 지역보다 처참하였다. 남원과 하동, 성주(星州), 홍천, 홍성, 장흥 그리고 나주 지역이 처참하였다 하나 사상자의 규모나 재산상의 피해로나 금산 지역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금산지역의 대결구도는 보수세력이 강한 금산(錦山) 쪽과 동학세력이 강한 진산(珍山) 쪽의 대결로 나타났다. 금산 쪽은 보부상(褓負商) 조직이 강했으며 보수세력은 이들을 앞세워 동학군을 괴롭혔다. 반대로 진산 쪽은 동학조직이 강하여 보수세력을 공격 제압하였다. 이 지역의 동학세력은 조재벽(趙在壁) 연원조직(包組織)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조재벽 포(包=淵源)는 청산(靑山), 옥천(沃川), 황간(黃澗), 영동(永同)과 연산(連山) 일부 지역, 고산(高山) 일부 지역, 금산 일부 지역, 그리고 진산 전체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원수도 수천명에 이르렀고 결속력도 매우 견고했다. 그는 1892년 11월에 전라도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서장옥,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등과 연대를 가졌으며 1893년 2월 광화문 앞 복소운동과 3월의 보은 및 원평의 척왜양창의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이끈 고부민란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서인주(徐璋玉),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과 뜻을 같이하여 혁명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3월 초(3월 8일 또는 12일)에 금산에서 처음 깃발을 올린 것은 우연한 기포가 아니었다. 관원들의 심한 주구(誅求)도 인심을 이탈케 하였겠지만 금산 지역의 기포는 호남 동학 지도부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기포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기부터 다른 지역 동학군을 불러들여 연합전선을 폈던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3월 중순경에 진산(珍山)으로 달려온 동학군은 멀리 남원, 임실, 태인 지역을 위시하여 인근의 연산, 고산, 전주 동학군들이었다. 그 후 10월의 시리니재 전투에도 김개남 휘하의 동학군과 다른 지역 동학군들이 많이 참가하여 싸웠다. 이 지역의 혁명운동은 조재벽 연원의 항쟁으로만 국한시켜 보지 말고 전라도 동학혁명운동의 전체 흐름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금산 지역의 혁명운동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동학이 자리잡은 과정을 살펴보고, 둘째, 기포과정과 보수세력과의 대결과정을 살펴보고, 셋째 집강소 활동 상황과, 넷째 10월의 소리니재(松院峙) 전투 상황과, 다섯째 일본군과의 항쟁, 끝으로 대둔산(大芚山) 전투와 염정골의 최후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동학의 포교와 조재벽포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경주의 최제우(大神師 水雲 崔濟愚)가 지례(知禮), 김산(金山=金陵) 및 호남의 진산(珍山), 금산(錦山) 산골을 왕래하였다"고 했다. 대신사가 생존했을 당시이므로 1862년 상반기에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1861년 10월에 경주관아로부터 탄압을 받은 대신사는 11월에 제자인 최중희(崔仲羲)를 대동하고 경주를 떠나 정처 없는 여행길에 나섰다. 울산, 진해, 고성, 승주를 거쳐 12월 15일경에 당도한 곳은 전라도 남원(南原)이었다. 남문밖 서형칠(徐亨七)을 만나 거처를 정하게 되었고 이들에게 포교하여 후원을 받아 12월 그믐께 교룡산성 덕밀암(德密庵·隱蹟庵)으로 들어갔다. 6개월간 머물면서 인근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포덕(布德=傳敎)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진산과 금산 지역에서도 여러분이 찾아와 사제지간이 것 같다. 이들은 대신사를 모셔가기도 하고 수도방법을 지도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7월 초경에 대신사가 경주로 돌아가자 이들은 용담을 왕래하면서 도맥(道脈)을 이어왔다. 그러다 2년 후인 1864년 3월에 대신사가 조선왕조에 의해 순도하자 도맥은 끊어져 버렸다. 1887년에 이르러 황간(黃澗)의 조재벽(趙在壁·趙敬重)이 입도하면서 포덕을 시작하여 20여 년만에 동학의 도맥을 다시 잇게 되었다. 그는 옥천, 영동, 청산 지역에서 포덕(布德=布敎)을 하다가 1890년경부터는 금산, 진산, 고산, 용담지역으로 넓혀 갔다. 1892년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자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기 시작하여 엄청나게 포덕이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조재벽은 알아주는 동학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93년 2월 광화문 교조신원운동 때에는 상소장에 서명인이 되어 많은 도인을 이끌고 참가 하였으며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와 전라도 원평에서 일어난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에도 많은 도인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이 때 신사(神師 海月 崔時亨)은 포제(包制)를 제도화하고 각포(各包)에 대접주를 임명하였다. 『동학도종역사』에는 서장옥(徐仁周=徐璋玉)이 호서(湖西) 대접주로 임명되고 조재벽은 서장옥의 지도를 받는 관계로 임명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93년 2월 광화문 교조신원운동 이후 서장옥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동학혁명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재벽은 자연스럽게 대접주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 같다. 조재벽은 신사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상주 왕실(旺室)에서 신사를 1893년 7월에 청산현 문바위골(閑谷里)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이사하게 주선한 것도 그였다. 김성원은 바로 조재벽 포중(包中)의 한 사람이었다. 1894년 12월 중순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신사와 손병희 동학군과 합류하여 영동전투, 북실전투, 12월 24일의 되자니 최후전투에도 신사와 같이 싸웠다. 또한 1896년 1월에는 강원도 치악산 수례너미에서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김현경(金顯卿)과 같이 신사로부터 경암(敬菴)이라는 도호까지 받았다. 1897년 4월에는 앵산동(利川郡 樹上里)에서 신사와 교리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어디에 살았는지 생활근거지가 분명치 않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황간(黃澗)의 수령이라고 여러번 나온다. 권병덕(權秉悳) 기록과 『천도교회사초고(天道敎會史草稿)』에는 "조재벽, 최사문, 최공우(崔公雨)가 …(진산에서) 기포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1897년에 사망하였는데 어디에 묘소가 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조재벽의 연원조직(包組織)은 옥천, 영동, 황간, 청산, 금산, 진산, 고산, 용담 등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2. 금산서 최초로 기포
금산 지역에서 최초로 기포한 날짜는 3월 8일 또는 12일이라 하였다. 『금산피화록(錦山被禍錄)』에는 "3월 초에 기포하였다"고 했으며 『금산군지(錦山郡誌)』에는 "3월 8일에 무장한 동학군이 제원역(濟原驛)에 회합하여 이야면(李也勉)을 선봉장으로 5천여 명이 죽창과 농기를 들고 대거 금산읍에 들어와 관아를 습격하여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胥吏)들의 가옥을 파괴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금(3월) 12일에 동학도 수천 명이 몽둥이로 무장, 흰 수건을 두르고 읍으로 몰려와 관리들의 집을 불살랐다"고 하였다. 『금산군지』의 3월 8일 기포설은 근거가 분명치 않으나『금산피화록』과『오하기문』의 3월 초라는 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하기문』의 3월 12일 기포일은 3월 초라기 보다 중순에 가깝다. 3월 초라고 한 『금산피화록』으로 보면 3월 8일설이 맞을 것 같다. 지금까지 최초의 기포일은 3월 18일에 전봉준과 손화중이 당산(現 高敞郡 孔音面 九岩里 堂山)에서 기포한 날짜를 치지만(김개남도 지금실(現 井邑郡 山外面 東谷里 지금실에서 3월 18일에 기포하였다 함) 금산에서 기포한 날짜는 이보다 10일 내지 6일이나 빨랐다. 따라서 최초의 기포지는 고창 당산(堂山)이 아니라 금산 제원역(濟原驛)과 진산 방축리라 할 수 있다. 제원역은 읍에서 동쪽 4㎞지점에 있는 제원도(濟原道) 찰방역(察訪驛)이다. 삼례도(參禮道)·청암도(靑巖道)·벽사도(碧沙道)·오수도(獒樹道)·경양도(景陽道)와 같이 제원도(濟原道)는 전라도의 주요 역도의 하나이다.『동국여지승람』에는 무주의 소천역(所川驛)·용담현의 달계역(達溪驛)·진안군의 단령역(丹嶺驛)·고산현의 옥포역(玉包驛) 등 4개역을 관할하고 있었으며 많은 역졸과 12결의 둔전(屯田)을 가지고 있던 역참이다. 진산 방축리(防築里)는 진산읍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그 당시에는 각종 상거래가 많았던 장거리였다. 동학군은 동서 양쪽에서 금산읍을 공격하여 무난히 점령하였다. 제원역에 모여 있던 동학군은 이야면이 통솔하였고 방축리에 모여 있던 동학군은 조재벽(趙在壁·敬重)과 최공우(崔公雨) 접주가 통솔하였다. 그리고 금산 동학도들은 박능선(朴能善) 접주가 지휘하였다고 보여진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의하면 영동 옥천접주와 접사(接司) 13명을 잡아 조사한 결과 "금산 도륙자(錦山 屠戮者)"들이라 하여 혁명기간 동안 영동과 옥천 도인들이 많이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진산읍 방축리(防築里)에는 진산 동학군과 인근지역 연산이나 고산 동학군들도 가세하였다고 추측된다. 동학군들은 금산읍을 점령하고 악질 관리들을 응징하는 선에서 그친 것 같다. 이 때 금산군수 민영숙(閔泳肅)은 동학군에게 해를 입지 않은 것 같다. 동학군이 금산읍을 점령한 후의 기록은 두 가지가 있다. 『금산군지』에는 "동학군은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들의 가옥을 파괴하였다" 하였고 <정공순의비(鄭志煥殉義碑)>에는 "적은 먼저 제원역을 접거하니 정지환은 군민을 규합하여 바로 김제룡(金濟龍)등을 몰아냈다"고 하였다. 또한 3월 23일자로 당시 군수였던 민영숙의 보고를 받은 의정부는 "동학도소라 칭하며 통문을 발송하자 모인 자가 근 천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미 소원하고 있는 것을 해당 읍에서 (폐정을) 바로잡아 주고 그 연고를 소상히 효유하여 퇴산시키라는 뜻으로 제칙(題飭)을 따로 보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군수를 해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금산피화록』에는 "3월 초에 보부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錫), 사인 정두섭(丁斗燮)이 힘을 모아 막아 지킴으로써 참혹한 화를 간신히 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숙조(鄭 朝)의 순의비문(殉義碑文)에는 "적을 막으려 의를 일으켜 공(鄭 朝)을 주맹(主盟)으로 추대하여 좁은 목을 나누어 방어하였다"고 하였다. 관아까지 점령하고 악질 서리들을 응징한 것이 사실이므로 동학군을 물리쳤다는 비문들은 사실과 다르며 공적을 높이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동학군은 금산읍을 공격할 때 용담현도 공격하였다. 『동학당정토약기』에 용담현령(龍潭縣令) 오정선(吳鼎善)의 말에 "동비(東匪)가 봉기하여 먼저 금산과 용담을 습격하자 … 쫓아내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일단 격퇴하였다"고 하였다. 제원역에 모였던 동학군 일부는 용담현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것이다. 즉 현령 오정선(吳鼎善)은 중과부적임을 알고 동학군과 타협하여 대결을 피했으며 그러자 동학군은 며칠 후 물러났던 것이다. 이것을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격퇴하였다"고 표현한 것이다. 금산지역 동학군의 기포는 금산읍과 용담읍을 점령함으로써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0여 일이 지나자 보수세력들은 동학군의 근거지인 진산 방축리를 공격하여 보복하기 위해 보부상 우두머리인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이 인근 고을의 보부상들을 모았다. 그리하여 4월 2일 방축리를 공격하여 동학군 다수를 살해하였다. 수록(隨錄) 영기조(營寄條)에는 "4월 초 2일 신시(申時) 금산군 행상(行商, 褓負商)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은 읍민과 행상 천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진산(珍山) 방축리(防築里)로 달려가 동학도들을 공격, 114명을 육살 하였다"고 하였다. 황현(黃玹)도 "금산의 행상 우두머리인 김치홍, 임한석 등이 상인과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인솔하여 진산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114명을 베어죽였다"고 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은 "금산 백성과 보부상 5∼6백명이 동학당을 공격하여 100명을 살상하였다 하더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단석(李丹石, 時聞記)은 "4월에 금산군수가 동학도를 많이 죽였다"고 하였다. 교중의『김낙봉이력(金洛鳳履歷)』과『동학사』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부안에서 청산으로 신사를 찾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진산 방축점에서 일박하고 4월 1일 아침에 떠난 김낙봉은 다음날 "금산 포군(砲軍)에게 (진산 동학군이) 함몰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했다.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에는 "갑오 춘(春)에 이병춘(李炳春, 任實接主)이 진산 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로잡혀 총살될 뻔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옆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함께 쓰러져 … 살아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장계에는 "이달 초 3일 금산군 사람인 박병중(朴秉仲) 등이 의병 3천여 명을 일으켜 동학도를 토벌하였다. 죽은 이가 70여 명이요 부상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가 600∼700명이나 되었다. 동학 여당들은 도망쳐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 용담현령 오정선은 공초(供招)에서 "금년 3월에 … 금산군 보부상을 출의(出義)시켜 진산군을 공격하여 동학도 100여 명을 진멸시켜 그 공로로 진산군수에 승진, 3개월간 부임한 바 있다"고 하였다. 금산 민보군의 공격으로 진산 동학군은 최소한 70여 명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부상한 것 같다. 금산의 보부상 세력은 전라도에서도 강력한 조직이었던 것 같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금산 부상패가 소원할 일이 있어 수 천인이 모였다. 때마침 태인에 모이라는 말을 듣고 … 그 곳에 가보니(金山面 巨野) 동학당이라 …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 의정부는 부상들이 잇따라 동학도들을 싸워 몰아낸 공은 있으나 명령 없이 제멋대로 취당하며 싸운다. 이런 폐단이 커지기 전에 … 마땅한 조처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부에서도 금산 부상배들이 강대하여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한 것 같다. 기습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진산 동학군은 곧 보복할 준비에 들어갔다. 수록(隨錄)에 4월 3일자 금산 공형(錦山公兄)의 보고가 있는데 "수천 명이 방금 진산 방축리와 충청도 옥천 서화면(西化面)에 모여 금산읍에 돌입, 생령들을 도륙하리라는 풍설이 낭자하다" 고 하였다. 금산군민은 이 소식을 들고 공포에 떨었으나 진산 동학군은 전봉준 동학군과 합류하기 위해 금산 보수세력을 보복할 여유가 없었다. 즉 이 때 혁명을 선포한 전봉준 동학군은 4월에 접어들면서 인근 고을을 차례로 점령해 들어갔다. 수령들은 관찰사에게 방비책을 마련하라고 아우성이었고 김문현(金文鉉) 감사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인근 고을 장정 수백 명씩 징발하였다. 한편 보부상들도 불러들여 4월 6일 영장 이광양(李光陽)에게 영병 2백 50명과 보부상 1천여 명을 이끌고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소식을 들은 동학군도 결전을 앞두고 인근 동학군을 불러모으게 되었고 진산 동학군들도 금산 보수세력에 대한 보복을 미루고 이 곳으로 출동하였다.
3. 6월 중순에 집강소 설치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군과 감영군은 4월 7일(양 5월 11일)에 황토재에서 결전을 벌인 결과 동학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동학군이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자 정부는 홍계훈을 출동시켰다. 홍계훈 경군은 황룡천에서 동학군을 만나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장성 월평(月坪)장터에서 점심을 먹던 4천명의 동학군은 경병의 기습을 받고 당황했으나 곧 반격에 나서 신효리(辛孝里)까지 밀고 들어가 이학승(李學承) 대장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경군이 영광에서 머뭇거리는 때를 타서 동학군은 전주로 달려갔다. 4월 27일(양 5월 31일) 드디어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를 점령하였다. 홍계훈 경군은 달려 왔으나 완산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여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다급한 나머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를 탐지한 일본군도 뒤따라 출동하게 되었다. 사태는 뜻밖에도 청일 양군의 대결장으로 변하여 나라는 위기에 빠져들었다. 정부는 "동학란을 수습하였으니 양군은 물러가라"는 구실을 내 세우기 위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勳)에게 동학군과 화약(全州和約)을 맺어 종결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교섭은 급진전하여 5월 7일에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새로 임명된 김학진(金鶴鎭) 전라감사는 삼례에서 감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동학란은 평정되었으니 물러가라" 했으나 일본군은 본색을 드러내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김학진 감사는 사태를 평온하게 끌고 가기 위해 동학군을 포용하였고 전봉준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탐관오리의 발호를 청산하기 위해 동학군이 주도하는 집강소(執綱所)를 각 고을마다 설치하기로 하였다. 6월 초순에 지시하여 각 고을에는 6월 중순부터 집강이 임명되어 동학군의 집강업무가 시작되었다. 정석모(鄭碩謨)의『갑오약력(甲午略歷)』에는 "6월에 관찰사는 전봉준을 감영으로 초치(招致)하고 … 전봉준의 요구한 집강소를 각 고을에 설치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금산 보수세력들은 여러 형태로 동학군에 저항하였다. 퇴리 정지환(鄭志煥) 등과 공형(公兄), 그리고 촌외 인사 박승호·고제학·박승숙·전첨사·박항래 등이 전참판 정숙조(鄭 朝)를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의군(義旅)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수였던 조명호(趙命鎬)는 김학진 감사의 지시에 따라 동학군을 자극하려 하지 않자 하나 둘씩 떠나 버렸다. 『금산군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월에 도내 동학군이 더욱 강성하여 재침할 우려가 있으니 토벌할 것을 김진용(金震龍 致洪?)이 군수 이규문(李奎文)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군수는 이에 응하지 않고 희미한 태도로 대답을 했다. 격분한 김진용이 떠나자 읍민들도 관의 처사에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집을 버리고 떠나 금산읍 천호(千戶) 부중은 동학도만 남아 공허해졌다. 6월 중순에 이르자 집강 업무가 시작되면서 사태는 뒤바뀌었다.『금산피화록』에는 "거괴 전봉준이 감영에 있으면서 보낸 사통(私通)이 종종 내려오자 잇따라 각 고을에는 집강(執綱)이 있게 됐다"고 하였다. 아마도 금산에 집강소가 설치된 것은 6월 중순경으로 보인다. "최초로 집강(執綱)에 차임(差任)된 동학도는 용담현에 사는 김기조(金己祚)이며 그 후임은 금산읍에 사는 조동현(趙東賢)이었다" 한다. 금산읍 어디에 집강소와 도소를 설치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일단 관찰사의 명령으로 동학군 집강소가 설립되자 보수세력의 저항은 중단되었다.『금산피화록』에는 "(동학군의) 유인에 빠져들어 한결같이 빗나가 교화가 먹혀들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읍의 백성들은 노인들을 부축하고 어린 것들을 안고 서로 바라보며 흩어지니 성중은 비어 버렸다"고 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 동학도가 일어나자 그 읍(진산) 백성들은 모두 비도에 가담했다. 금산현에 사자(使者)를 보내 동비도(東匪徒)에 가담하라고 날짜까지 정해주며 승낙여부를 대답하라고 했다. 금산현민 들은 현감에게 제안하자 그는 … '비도에 가담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 동학의 권유를 거절했다. 이것이 작년 6월의 일이었다. 그 후 진산 사람이 다시 와서 동학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지만 또 이를 거절했다. … 작년 6월에 진산 동학도가 대거 이 읍을 습격하고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했다. 일본군이 1894년 11월(음)에 들은 것을 적은 것으로 10월의 사건을 6월로 착각한 것 같다. "6월에 진산 동학도가 대거 이 읍을 습격하고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금산피화록』에는 "5월 망간에 동도들은 모두 귀화했다"하였고 "인심이 안정되자 전후 5개월에 걸쳐 농민은 농사 짓고 상민은 장사하였다"고 했다. 귀화했다는 것은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과 관이 상화(相和)했다는 뜻이고, 5개월 간 화평했다는 것은 10월 중순까지 대립이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 동학군이 진산과 금산에서 집강소 활동으로 제일 먼저 강조했던 일은 신분제타파(身分制打破) 운동이었다. 동학은 1860년에 창도된 이래 신분제 타파를 부르짖으며 인간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동학혁명 중 제일 먼저 조선왕조의 기둥이었던 신분제를 때려부수는 일을 하였다. 동학군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양반을 조롱하거나 모욕을 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일반 민중들과 천민을 대하는 몸가짐이나 태도는 겸손하고 친밀하기 그지없었다. 3. 동학군 재기와 보수세력의 저항 일본군은 장차 이 나라를 강점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6월 21일 새벽에 일본군은 왕군을 강점하고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는 한편 고종을 구석으로 몰아부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앉히고 국군기무처(國軍機務處)를 만들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밀려난 민씨들은 물론이요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없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은 친일정권에 편들어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동학군을 섬멸하기만 바랬다. 7월 초부터 일본군을 몰아낼 대책을 숙고하던 동학군은 8월 1일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로 전쟁을 확대시키자 항일전을 결의하게 된다. 8월 25일 남원대회에 모인 5만여 명 동학군은 항일투쟁을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동학군은 정예군을 조직하고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전주 동학 도집강소(都執綱所)는 각 고을에 농토 1결(結)당 7두의 쌀과 호당 말먹이 콩 1되씩을 할당하고 9월 하순부터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9월 13일경에 동학지도부는 재기포에 대해 의견을 모았고 18일에는 신사가 청산에서 전 동학군에게 기포령(起包令)을 내렸다. 대륙침략을 기도한 일본군은 9월 26일(양 10월 26일)에 전쟁을 확대하여 압록강을 건너 구룡성과 안동을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대동강 이남의 수송로의 안전을 위해 동학군을 섬멸시킬 목적으로 후비보병(後備步兵)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주축으로 제18대대 제1중대, 제6연대 제4, 제6, 제7, 제8중대 및 제10연대 제4중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후비보병 제6연대 제4, 제6, 제7, 제8중대는 황해도 지역에, 나머지는 삼남 일대에 투입하였다. 강원도에는 서울수비대를 투입하였다. 현역 3년, 예비역 4년, 다시 5년간의 후비병역에 복무하고 있는 이들은 30세 전후로 노련하였다. 10월 6∼7일( 양 11월 3∼4일)부터 삼남으로 출동하면서 경병도 신식무기로 무장시켜 같이 출동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동학군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나서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한국 정부도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였다. 일본군과 경병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각 군현 보수세력들은 민보군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동학에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특히 순무영(巡撫營)은 9월 27∼8일에 금산의 정두섭(丁斗燮)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수교(首校)인 정지환(鄭志煥)을 본영 군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곧 정숙조(鄭 朝)를 맹주로 추대하고 민보군 조직에 착수하였다. "(군관으로 임명된) 정지환은 전 참판 정숙조와 길기순(吉基淳)·신준호(辛埈濠)·박승호(朴勝鎬)·고제학(高濟學)·박제군(朴齊君)·박연수(朴延壽)·박승숙(朴勝淑)·김진용(金震龍)·정두섭(丁斗燮)·엄채영(嚴寀永) 등과 창의군을 만들어 동학군을 초멸하리라는 설단(設壇=금산성 북문 외에 설단)의 맹세까지 하였다. 『금산군지』에는 "맹주에 정숙조(鄭 朝), 회장에 박승호(朴勝鎬)·고제학(高濟學), 참모장에 박승숙(朴勝淑), 참모에 이석구(李錫九), 감군에 김두진(金斗振)·곽병규(郭秉奎), 의병장에 신구석(辛九錫-龜錫)·양재봉(梁在鳳), 포사장에 정두섭(丁斗燮), 향군에 지영복(池永福)·한영운(韓永云), 훈장에 고주석(高疇錫) , 도비장에 임한석(任漢錫), 비장에 변순여(卞順汝), 전초장에 엄포영(嚴 永), 초장에 김성초(金性初) 등을 임명하였으며 무사(武士)는 250명이라 하였다.『검암유고(儉庵遺稿)』에도 의회장(義會長)에 고제학·박승호, 맹주에 정숙조, 포대장에 정두섭, 무대장(武隊長)에 정지환, 참모에 양재봉(梁在鳳), 신귀석(辛龜錫)이었다고 하였다. 10월 초에 경병과 일본군이 출동하였음을 알게 된 동학군은 10월 중순부터 행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0월 15일 전후하여 전봉준이 이끄는 정예 동학군은 삼례에서 논산으로 진출하였고, 손병희도 북접 동학군을 이끌고 논산에 와서 전봉준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옥천, 영동, 진산, 금산, 고산 지역 동학군들도 논산으로 가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런데 금산 보수세력은 민보군을 동원하여 동학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진산에 집결했던 동학군은 금산 민보군을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때마침 삼례에 진출하여 있던 김개남 동학군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오하기문』에는 "남원 김개남이 청주로 출동하는 길에 삼례에 이르렀을 때 전봉준을 성원하고자 한 지대를 보내고, (자신은 금산으로 진출하여) 금산읍을 점령, 현감 이용덕(李容德)을 쫓아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동학군의 주력은 삼례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일부 병력만 논산과 진산에 보내 지원하였다. 진잠 공형의 보고에 "김개남 동학군은 11월 10일에 금산에서 진잠(鎭岑)으로 진출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5천명 대군을 이끌고 11월 8일에 삼례를 떠나 금산에 들러 11월 10일에 진잠으로 진출한 것 같다. 금산 민보군 수천명과 동학군 수천명은 22일에 진산군과 금산군의 접경인 소리니재(松院峙) 일대에서 대진하게 되었다. 22일 오후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2일간 대치했던 전투는 24일 오전 10시에 동학군의 총공격으로 바뀌었다. 산 위에서 함성을 지르며 노도처럼 밀고 내려가자 민보군은 금산으로 달아났다. 여유를 주지 않고 동학군이 추격하자 민보군은 64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져 버렸다.『금산피화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충청도 비류들이 연대하여 금산을 도륙하려 하였다. 소모관 정두섭은 포수 200명과 군관 정지환, 총독무사 및 병졸을 이끌고 진산현 경계에 당도했다. 그들은 … 높은 산상을 선점하고 진을 치니 수만이었고 포창(砲 )의 진세는 군율이 있는 듯했다. 양식 마련과 밥 짓는 것은 진산에서 맡았고 마치 개미 떼처럼 모였으니 … 모두 진산 남녀노소였다. 정오께 서로 접전하니 금성산·삽치(揷峙)·민치(民峙) 등 세곳이었다. … 적과 싸운지 5주야(3일) 만인 24일 사시(巳時)에 당해낼 수 없어 패산하였다. …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니 64인이오 돌아오지 않아 생사를 모르는 자도 얼마인지 모른다. 군관 정지환은 금산 관아로 끌려가 사살 당하였고, 동생 정영백(鄭永白)도 사기점에 끌려가 살해 당하였다. 아들 정집종(鄭集鍾)는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둘째 아들 정회종(鄭晦鍾)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소모관 정두섭(丁斗燮)은 부하 수십명과 같이 경상도 초포사(剿捕使) 박항래(朴恒來)를 찾아가다 유가면(柳加面) 오동리(梧桐里)에서 동학군에게 체포되어 금산읍 장대에 끌려와 포살(砲殺)되었다. 맹주인 정숙조는 25일 제원역에서 체포되어 살해 당했다. 금산읍에 돌입한 동학군은 공청과 향교, 보수세력의 집들을 소각하였다. 금산읍의 보수세력은 재기불능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이로부터 인근 고을 동학군들은 수 없이 드나들었다. "영동·옥천·무주 등의 적도들이 차례로 들어왔다.…그밖에 개남포·연산포·공주포·강경포 등도 들어왔다 나가고,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한다.『금산군지』에는 "군수 이용덕(李容德)은 동학군이 들어오자 허둥대며 도망갔다"하였고, 일성록(日省錄)에는 "무례히 인부(印符)를 몸에 지니고 도피하였으므로 부득이 파출(罷黜)한다"고 하였다.『동학당정토약기』에는 "(동학군에 붙잡혀) 한쪽 팔이 잘렸고 주리를 틀려 다리에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의 대 병력은 11월 7일에 용담현으로 출동하였다. 10월 하순부터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탄압하자 진안과 고산, 무주 동학군들과 연합하여 공격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1월 8일에 동학군 수천명이 북쪽에서 공격하였다 한다. 때마침 무주접주 이응백(李應伯) 삼부자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배후인 동쪽을 공격하여 왔다. 양쪽에서 협공 당한 민보군은 이튿날 9일 오시에 항복하고 말았다. 뜻밖에도 지난 달(11월) 초 8일에 진안·고산·진산·금산 등지의 동학도 수만 명이 북쪽에서 쳐들어와 접전이 벌어졌다. 무주접주 이응백(李應伯) 삼부자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와 동쪽에서 갑자기 배후를 공격했다. 두 갈래의 적세가 너무 커서 적을 당해 낼 수가 없어 초 9일 오시에 패전하고 말았다 위세를 떨치고 있던 진산과 금산, 옥천 지역 동학군들은 뜻밖에도 11월 11일과 13일에 공주전투와 청주전투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대패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조재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가 이끄는 동학군들은 끝까지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다. 다른 지역 동학군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일본군이 금산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길목을 지키다가 기습하기로 하였다. 무기체계가 월등한 일본군을 맞아 항쟁하기 위하여 천여 명의 동학군은 옥천 방면에 집결하였다.
4. 일본군의 금산 진입
인천 병참사령관(伊藤祐義)이 내린 훈령을 보면 동쪽, 중부, 서쪽 등 세갈래로 1개중대씩 출동시켰으며 대대본부(대대장 南小四郞)는 중부 분진대(分進隊)와 같이 내려오게 되어 있었다. 중부로 내려오던 일본군(中尉 白木誠太郞)은 11월 6일에 옥천(沃川)에 이르러 금산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공주로부터 동학군에 의해 거의 포위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공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이들은 제원역에서 10km 동쪽 지점인 양산(陽山) 마을로 와서 유숙하게 됐다. 동학군 천여 명은 11월 8일(양 12월 4일) 밤에 양산(陽山)을 에워싸고 야습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오후 3시 양산에 도착하니 동학군은 금산현과 옥천군 방향으로 퇴각하고 없었다. 민가에서 사영(舍營)하고 있었는데 밤 10시경에 동학군 1천여 명이 마을 보초선을 넘어 진입하여 왔다"고 하였다. 맹렬한 교전이 벌어지자 200m 전방 민가에 동학군이 불을 질렀다. 주변이 환해지자 일본군은 동학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시간 여나 교전하였는데 11시 3분께 동학군은 금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수적으로 월등한 동학군은 일본군의 연발총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동학군의 전사자는 40명이었고, 일본군은 탄약 1,152발을 사용하였다. 이튿날인 11월 9일에 금산읍 동쪽 1km 지점에 일본군이 나타나자 길목 언덕에 매복했던 동학군은 다시 기습을 감행하였다. 백목(白木 中尉)은 "12월 5일(음 11월 9일) 오전 8시 30분 양산촌을 출발, 금산현을 향해 전진하다 오후 3시 10분경 금산현에서 약 600m 떨어진 곳에 당도하자 적도들은 금산현 북단으로부터 사격해 왔다. 지대는 즉시 산재 전진하자 적은 저항해 올 기력이 없었는지 고산·용담 쪽으로 퇴각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기습전은 3시부터 4시 반까지 1시간 여에 걸쳐 벌어졌다. 동학군은 스나이더총 6정 정도(3정은 일본군이 노획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군도 고전한 것으로 보인다. "즉시 산재 전진하자 적은 저항해 올 기력이 없었는지 고산·용담 방향으로 퇴각하였다"고 하였으나 사실과 다르다. 6명이 전사하며 1시간 남짓하게 맹렬히 공격하였으므로 쉽게 물러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날 오후 5시 패잔한 적 5∼60명은 금산현 북쪽에서 읍내로 침입하려 하다가 우리 초병이 사격하자 용담 쪽으로 퇴각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금산읍에서도 다시 기습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금산에 들어온 일본군은 몸져 누워 있던 금산군수 이용덕을 만났다. 그는 소 한 마리와 담배 2묶음을 일본군에 보내어 아첨하였다. 이틀간 체류했던 일본군은 11월 12일에 진산(珍山)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에도 동학군은 산발적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진산에 도착하여 보니 동학군은 흔적도 없이 숨어버렸다. 동학군을 지원하던 현감 신협(申 )도 15리 떨어진 산중에 피신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간신히 현감을 불러다 알아보니 동학군에 가담한 사실을 밝혀냈다. 포박하여 끌고 가려 했으나 동행했던 내무아문(內務衙門)이 "일반 죄수 처럼 포승 지우는 것은 혹독하다" 하여 구금하지는 않았다 한다. 12월 8일(음 11월 12일) 금산현을 출발하여 진산현으로 향했다. 본대가 진산현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연도 곳곳에는 시체가 뒹굴어 까마귀 떼의 밥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동학당인지 또는 인민인지 … 분명치 않았다. 진산현을 향해 가는 본대는 곳곳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했지만 격렬한 적은 만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공주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13일 아침 서둘러 연산(連山)으로 떠나갔다. 일본군이 동학군을 제압하자 보수세력들은 날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이 원래 강했기 때문에 진산 보수세력들은 준동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물러가자 동학군은 다시 나타나 활동하였다. 이로부터 관군이 쳐들어오면 숨었다가 떠나가면 다시 나타나는 게릴라식 전법을 구사하였다.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하였다. 물색한 끝에 전북 완주군 운주면(雲洲面) 산북리(山北里) 기동(基洞, 터골 垈谷) 북서쪽 '석도골' 대둔산 미륵바위(715.1m) 정상으로 정하고 11월 중순께 산상에다 도소를 마련하였다.
6. 대둔산서 최후의 항쟁
바위 꼭대기에는 초막을 칠 수 있는 평평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정상에 있는 120㎡ 정도의 장소에는 축대를 쌓아 제1 초막을 쳤다. 뒤쪽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바위가 있어 아늑하였고 주위는 낭떠러지 암벽으로 되어 있다. 동쪽으로 내려가다 좌측 바위 틈을 빠져 나가면 50㎡ 정도의 평평한 공간이 있다. 여기에는 제2의 초막을 쳤다. 제1초막에서 25m 쯤 남동쪽 계곡으로 내려오면 역시 초막을 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능선 너머 15분 거리에는 절터가 있어 샘물이 나온다. 또한 염정동과 능선으로 이어져 식량을 운반하기 쉬운 곳이다. 최공우 등 진산 동학군 지도부는 11월 16일께 5∼6명이 이 곳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도와줄 부인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의산유고(義山遺稿)에는 "산후동(山後洞)에 한참산(漢 山)이 있으며 그 상봉인즉 마천대(摩天臺)이다. 낭떠러지 절벽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 … 지금 이름 있는 적괴(賊魁)가 도당을 모아 굴 집에 들어갔으며, 부근의 적들도 때때로 숨어들고 있다 한다. 기찰을 보내 탐색하니 과연 위려(危慮)할만 하다"고 하였다. 『일본공사관기록』에는 "한덕산(寒德山 한듬산) 에서 한참 아래쪽에 있으며 … 대단히 큰 바위산으로 한 줄기 작은 길이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야 오르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일제 말인 1942년부터 이 곳에 정착한 이규만(李揆萬, 1933년)은 토박이로부터 동학군이 일본군과 싸운 이야기를 들었다 하며, 나무하러 여러차례 올라가 보았다 한다. 대둔산 케이블카 정상 정류장에서 서쪽 계곡 아래에 있는 육각정(六角亭)으로 내려가서 서쪽 가파른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가서 가파른 고개를 넘어 석도골 골짜기로 다시 내려간다. 거대한 미륵바위를 좌측으로 끼고 계곡으로 올라가면 정상 능선에 이른다. 좌측에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 데 여기가 미륵바위이다. 정면은 사다리가 필요하나 좌측 옆을 돌아가면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위 위에 동학군들이 초막을 쳤던 자리가 있다. 말라죽은 나무가 많아 나무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오른쪽 계곡에는 샘물도 있었다.. 『의산유고(義山遺稿)』에는 "산상에 … 여러 개의 바위 돌이 포개져 있었다. 그 속에 두 칸 집을 지었고 돌로 벽을 쌓아 처마 끝만 드러나 있었다. 동서와 북쪽 삼면은 깎아 세운 듯하여 날개를 달지 않으면 들어 갈 길이 없다. 앞쪽 아래로 한 줄기 길이 있으나 삼층 사다리를 늘어뜨려야 올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군 기록에는 초막이 3채라 하였다. 처음에는 정상에 한채를 지었다가 인원이 늘어나자 두 곳에 더 지은 것으로 보인다. 들어간 동학군 지도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崔士文)과 접주 최공우(崔公雨)를 위시하여 접주 김재순(金在醇)·김석순(金石醇)·진수환(陳秀煥), 그리고 교수(敎授)인 강태종(姜泰鍾) 등이었다. 도금찰은 육임직인 교장 교수급과 같이 접주의 부친이나 어른에게 발령하는 관례가 있어 최학연은 접주 최공우의 부친으로 보인다.『의산유고』에는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 십수명이 입산하였다고 하였다. 일단 자리를 잡은 동학 지도부는 수시로 내려가 진산 여러 곳의 동학군을 결속시켰다. 대접주인 조재벽은 12월 중순께 호남에서 철수한 신사와 손병희 동학군이 영동에 당도하여 민보군과 전투할 때 합류하여 싸우다가 보은 북실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다시 음성 무극에 가서 역시 일본군과 싸웠다. 해가 바뀌어 1895년 1월 9일(양 2월 3일)에 이르자 충청감영은 병력을 출동시켜 대둔산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산세를 보자 기가 질렸다. 동학군을 공략할 방도가 서지 않아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신식총(洋砲)으로 사격하여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2일간 체류하다 대책이 없자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는 여기서 식량 공급을 10일간만 끊으면 굶어죽을 것이라는 양도(糧道) 봉쇄 작전도 구상해 보았으나 그럴 병력이 없었다. 대책이 궁한 그는 3일 만인 1월 13일에 떠나 버렸다. 이 때 금산 의병장 김진용(金鎭容 震龍 致洪)이 300명을 이끌고 왔으나 그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이 물러가자 이들 동학군은 영군을 불러들인 진산군관 하경석(河景奭)을 처단하고 금산읍까지 달려가서 수성군을 공격하여 많은 병사들을 죽였다고 한다. 17일 유시에 대둔산 적도들이 또 다시 함부로 날뛰어 진산군관 하경석(河景奭)을 살해하고 금산에 들어와 지키는 병사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연산 동면 비도들이 내응하니 그 무리들이 화를 일으킬 때가 머지 않았다. 감영군은 이 소식을 듣고 1월 19일에 문석봉 소모사를 다시 출동시켰다. 지난번과 같이 공격할 대책이 없자 진산읍으로 물러났다.『의산유고』에는 이간책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터골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주암(舟巖)에서 최공우와 친한 김공진(金公眞)을 꾀여 산상으로 올려보내 김치삼(金致三)과 장문화(張文化)에게 속임수를 노리는 서찰을 전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서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치삼 장문화는 보아라. 너희들이 산에 오르던 날, 정녕 나와 약속하기를 최사문, 최공우 삼부자와 숙질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그 공적으로 죄를 대신 용서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기일을 많이 어기고 있다. 기회를 얻지 못해 아직 손을 쓰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변심한 것인가. 어떤 사람인들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고치면 착하게 되리라. 너희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도륙될 것이다. 그러니 빨리 계책을 시행하여 조만간 최씨 적 3부자와 숙질의 머리를 베어 와 공을 세워야 죄를 용서받으리라. 22일에 김공진을 입산시켜 최공우에게 서신을 보이자 분노한 그는 김치삼과 장문화 그리고 뒤에 들어간 6명을 묶어 낭떠러지에 던져 죽여 버리니 계략이 성공했다고 하였으나 한마디로 엉터리 기록이다. 문석봉이 이곳에 처음 온 것은 1895년 1월 10일이었다. 3일만에 떠난 그가 김치삼과 장문화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최사문과 최공우 부자는 문석봉의 잔꾀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며 생사를 같이하는 동덕(同德)을 의심할 위인도 아니다.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문석봉의 잔꾀로 꾸며진 기록이다. 문석봉이 다시 출동하자 금산 보부상 두목 김치홍은 용담에서 대포를 끌고 왔다. 포탄은 골짜기 중간에 떨어지니 소리만 요란스러웠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주에서 따로 영병(營兵)이 온 것은 아니고 문석봉과 김치홍이 온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심영병(沁營兵=壯衛營兵)과 일본군 3개분대가 터골에 도착하여 사태는 급전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895년 1월 24일(양 2월 18일) 새벽에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안개와 비가 내려 날이 밝아서야 공격을 개시 하였다. 그가 보고한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동학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하였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요지 (1895년 2월 18일 특무군조) 1). 2월 17일(양)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2).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경부터 5, 6명의 적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그 후 민병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3). 18일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시 30분 일본군 1개 대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4).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시 40분,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는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또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5).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이 보고서는 과장되고 조작된 곳이 몇 군데 있다. 첫째, 동학군 전사자가 25명이라 했으나 노획한 화승총은 50자루였으니 절반도 못된다. 지방민들이 지금 50명 정도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나머지 20여 명은 좌우로 흩어져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쳤다.『동학사(東學史, 吳知泳』에는 접주 최공우가 벼랑에서 뛰어 내려 살아났다 했으며, 주민들도 다래 넝쿨로 뛰어내려 많이 살았다고 한다. 초막에서 4m 가량 내려오면 좌측 암벽에 뛰어 내릴 곳이 있었고 초막에서 6m 정도 내려오다 좌측 암벽사이로 빠지면 좌·우에도 뛰어 내릴 곳이 있었다. 다음은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고 하였다. 일본군은 뒤쪽 바위 2m 거리에서 일제히 사격하였다. 그런데 10m 아래쪽에 있던 한병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모두 죽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일본군은 자기들이 임신부까지 죽인 만행을 한병에게 떠 넘기려 한 기록이다. 또한 "몇 길의 암석이 담벽처럼 서 있었다"고 한 것도 과장된 기록이다. 암벽 높이가 4m 정도이니 젊은이면 누구나 기어오를 수 있는 바위이다.
7. 염정골의 최후항쟁
일본군에 의해 대둔산 항쟁에서 완패한 동학 지도부는 염정동(廉貞洞)으로 후퇴하였다. 염정동은 진산에 속하지만 연산 관내에 속한 도산동(道山洞) 일대까지 통털어 염정골이라 한다. 당시 400호 정도가 살았다 하며 최사문과 최공우, 양량옥(梁良玉), 박중집(朴仲執), 이홍기(李洪基), 김치선(金致善) 등은 이 곳에서 수백명의 동학군을 다시 모아 항쟁을 다짐하였다. 도소는 김세마(金洗馬)의 집이었다고 여겨진다. 마을 남쪽을 흐르는 실개천을 건너 수락으로 넘어가는 길 초엽 우측 한 가운데 있다. 연산현감 정대위는 동학군 활동이 다시 일어나자 충청감사에게 보고하였고 충청감사는 문석봉 양호소모사에게 초멸하라고 명령하였다.『의산유고』에는 "청산(靑山)의 적도가 재기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천여 명의 도당을 모아 서로 응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43명의 병력(병정 20명과 장관 23명)을 이끌고 1월 26일 새벽에 진잠(鎭岑)을 떠나 남면 증촌(增村)까지 20리를 행군하였다. 염정동까지는 30리가 남았으나 동학군에 대한 정보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였다. "무기와 양초(糧草)가 얼마인지 알 수 없어" 보부상 2명을 뽑아 탐지해 오라고 보냈다. 20리 정도 떨어진 이수령(梨樹嶺)까지 갔다가 동학군 파수막에서 붙들려 죽고 말았다. 연산현감도 며칠 전에 별감을 보냈으나 동학군에게 붙들려 살해 된 일이 있었다. 문석봉은 염정동으로 통하는 세곳의 길을 지키다가 나오는 사람을 붙들어 오게 하였다. 피난민 한 사람을 잡아오니 염정골 진사 권도현(權道賢)이었다. 동학군의 상황과 함께 도소는 김세마의 집에 정했다고 하였다. 43명의 병력으로 동학군을 공격할 대책이 서지 않아 시간을 보내던 그는 오후부터 대설이 내리자 출동하였다. 동학군도 폭설이 내리니 방심하리라 예측한 것이다.『의산유고』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가 실려 있다. 증촌(增村)에서 염정동까지는 30리로 … 5시 경에 길을 떠나 … 술시(戌時, 오후 8시)경에 20리 지점인 이수령에 당도하였다. 산 위 동학군 파수막에서 7명을 잡아 가두었다. … 숯을 피워 손발을 녹이고 염정동 김세마집으로 달려갔다. 장은 (키보다) 2척이 높았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대설로 적도들은 방심하고 잠들어 우리가 출동한 것을 상상치 못했다. 사람의 등을 밟고 담장을 넘어 … 대문 빗장을 풀어 병사들을 살금살금 방문 앞까지 접근시켰다. … 창거울로 들여다 보니 두 칸 큰방으로 비도의 대장막임을 알 수 있었다. 적들은 뒤섞여 누워 있고 북쪽 벽 모서리에 수십정의 총을 모아 세웠다. … 철편과 환도를 쥐고 달려들어 적을 밟고 총을 세워둔 곳에 이르렀다. 이때 … 밖에서 "저항하면 살갗을 이겨 버릴 것이다. … 거괴는 죽이되 협종자는 용서한다"고 소리치니 … 때는 자시(子正, 밤 11시∼1시)였다. … 비도들이 총이 있는 곳을 향해 (방으로) 들어오는 대로 찍으니 16명이었다. 나머지는 투항하여 결박하였고 400여 명은 옷을 벗겨 빈방에 가두었다. … 때는 축시말 인시 초(밤 3시)였다. 다시 토굴로 가서 40여명을 사로 잡아 … 5명의 괴수는 참하고 나머지 무리는 귀화시키니 1월 28일이었다. 마치 동학군을 4백여 명이나 잡은 것처럼 기록하였으나 이들은 주민들이었다. 50명 정도가 동학군이었고 그 중에서도 방안에서 찍어 죽였다는 16명과 괴수로 처단한 5명 등 21명이 진짜 동학군이었다. 최사문과 최공우는 체포되지 않았다.『동학사』에는 대둔산에서 내려와 기병하자 관병들이 출동하여 최공우의 집을 에워싸고 그를 결박하였다. 최공우는 처자를 불러 수 천금을 관병에게 주고 주찬(酒饌)도 차려오게 하여 후대하였다. 술을 마신 병정들은 호활한 마음으로 그를 풀어주었다. 최공우는 비호같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아 이놈도 치고 저놈도 치고 탈출하였다 한다.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염정동 자기 집에서 잡혔다는 것이며, 날짜는 1895년 1월 27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염정동 노인들은 동학군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최공우와 같은 유명한 인물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운주면 산중리(山中里) 장평에 사는 유인권(柳寅權, 1908년생) 옹은 최공우가 대둔산 산상에서 뛰어 내려 살아났다는 이야기와 그 후 북쪽 지방으로 가서 살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진산 어디에 살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일제 때 면장을 지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결 론
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진산 동학군이 주축이 되어 조재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 및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고산, 금산의 여러 접주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초기 기포는 무장 당산과 태인 지금실 기포보다 8일 내지 6일이나 빨랐다. 보수세력과 밀고 당기는 대립관계도 어느 지역 못지 않게 치열하였다. 이 지역의 대립 구도는 금산군의 보수 및 보부상 세력과 진산군의 동학세력간의 대결로 나타났다. 양군 사이에 지역감정이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립할만한 원인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다만 혁명과 보수간의 대립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동학사상과 유교사상의 대립으로 여겨지는데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이중세계의 구조를 부정하는데 기초하여 신분제를 배척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동학이 지향하는 이상이다. 이에 반해 당시 유교는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질서를 지향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동학과 유교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이단이었으며 반사회 집단이었다. 이상하게도 진산군 사람들은 동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관장을 비롯한 관원들도 동학에 가담하여 적지 않게 지원하였다. 이에 반해 금산 지역은 보수세력이 완강하였고 보부상 세력이 강하여 반동학 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혁명과정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혁명운동은 동학혁명 전체의 흐름을 잘 반영시키고 있다. 최초의 기포에서부터 집강소 활동기와 10월 소리니재 전투에서, 그리고 최후의 항쟁에서 일체감과 연대성과 저항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군과 경병에 의해 동학군이 고전할 때 이 곳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북접 주력과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대둔산과 염정골을 근거로 끝까지 항쟁하였다. 조재벽은 12월 중순께 신사와 손병희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영동전투를 거쳐 12월 18일의 보은 북실전투, 12월 24일의 음성 되자니전투에서 일본군과 끝까지 항쟁하였다. 한편 최사문, 최공우 부자를 위시하여 많은 동학 지도자들은 대둔산과 염정골에서 최후까지 끈질기게 항쟁하였다. 낡은 봉건왕조의 신분제를 극복하고 인간 평등사회 거설을 위해 보국안민을 지향하면서 목숨을 걸고 일본 침략세력을 물리치는 싸움에 나섰던 진산, 금산, 옥천, 영동, 황간, 용담, 고산, 연산 지역 동학군들의 숭고한 발자취는 이 시대의 역사를 전환시키는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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