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성사] 청원 생가터
명칭 | 청원 생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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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철종 12년 신유) 4월 8일에... |
주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
방문자 수 | 2371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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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성사의 성은 손이요, 이름은 병희요, 자는 응구요, 도호는 의암이니, 포덕 2년(1861 철종 12년 신유) 4월 8일에 청원군 대주리에서 탄생하였다. 부의 이름은 의조요 모는 최씨인데, 해가 품 속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성사를 낳았다. 성사께서는 어려서부터 기우가 영매하고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 포덕13년(1872) 성사께서 12세 때에 그 형이 지방풍헌으로 있으면서 성사로 하여금 공금 30냥을 가져다 관청에 바치라고 하였더니 길에서 행인이 병들어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그 사람을 업어 근처 주점에 들게 하고 주인에게 돈 30냥을 주어 치료케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형이 공금 축낸 것을 책하면서 초달하므로 그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포덕 17년(1876)에 결혼하여 부인 곽씨를 맞았다. 포덕18년(1877)의 일이다. 성사께서 괴산군 삼거리에 갔을때 수신사가 말 뒤에 역졸을 달고 오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성사께서 노하여 『사람을 학대함이 어찌 저러하냐』 고 힐책하면서 몽둥이로 마부를 때려 쫒고 역졸을 풀어 놓은 후에 유서통을 빼앗아 못 가운데 던져 버리고 유유히 돌아왔다. 포덕 21년(1880)의 일인데 성사께서 어느날 밤에 청주 약시장에 나갔다가 돈 3백냥을 주었다. 그래서 성사께서 돈 잃어버린 사람을 찾았더니 한 포목상이 깊은 근심을 하고 있는 얼굴 빛이었으므로 확인한후 돈을 내어주었다. 그러자 그 포목상이 기뻐서 돈을 반분하여 주겠다고 하였으나 돈을 받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 무렵 성사께서 음성 지방을 지나다가 한 곳에 이르자 동리사람들이 둘러앉아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연고를 물어 보았더니 동리 어느 집에 전염병으로 그 가족이 모두 죽었는데 5, 6일이 지나도록 아직 수습치 못하였다고 하므로 성사께서 개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사람의 주검을 거두지 아니하면 이 어찌 인도(人道)라 하리오』 하고 친히 4, 5인의 시체를 염습(殮襲)하였다. 성사께서는 일찍부터 어지러운 세상과 반상의 불평등. 그리고 자기 자신 서자의 몸으로 입신양명의 길이 막혀있음을 알고 책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천지가 그토록 넓지만 장부의 몸 둘 곳이 없었다. 이에 그 불평을 풀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출입하면서 낭인단(浪人團)을 만들어 스스로 그 두령이 되었다. 어느날 초정약수터에 갔는데 약수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양반이 약수를 마시면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것을 보고 성사께서 약수터에 들어가 물을 퍼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양반들을 향하여 흐린물을 퍼서 끼얹어 쫓아 버렸다. 양반들도 역시 성사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이로부터 청주 일대에 낭인으로 그 이름이 높게 되었다. 당시 동학은 비밀히 청주지방에까지 들어와 포교를 하고 있었다. 성사의 당질 손천민은 청주이방(吏房)으로 있으면서 비밀히 동학에 입도하여 성심으로 수도할 뿐아니라 포교를 많이하여 많은 도인을 얻었다. 하루는 도인에게 말하기를『나의 서숙인 병희가 비록 방랑하나 그 인품이 비범하니 내가 도를 전하여 보리라』하니 여러 사람이 도리어 지목을 받을까 두려워 하여 모두 말렸다. 그러나 손천민은 믿은 바 있어 곧 성사를 찾아보고 동학에 들기를 권고하였다. 이때 성사께서 『동학은 하면 무엇을 하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손천민이『삼재팔난을 면하고 모든 재앙을 면하는 도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이 말을 들은 성사께서는 『나는 오히려 삼재팔난이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손천민이 서우순과 김상일을 성사에게 보내어 동학은 보국안민하는 대도라는 것을 설명하자 비로소 입도 하였다. 이때가 포덕 23년(1882) 10월이었고 전교인은 인척되는 김성지였다. 성사께서 입도한 이후로는 난류배와 교제를 끊고 술과 도박도 일체 끊은채 열성으로 수도하면서 매일 3만독의 주문을 외웠다. 원래 방랑생활하던 성사로서 그 길을 일절 끊고 보니 당장에 생활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매일 두켤레의 짚신을 삼기로 정하고 한 켤레에 정가를 15문으로 하여 청주시장에 가서 팔았는데 결코 에누리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아는 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고 여겼고 모르는 사람은 학자라고 칭하였다. 포덕 25년(1884) 10월에 신사께서 친히 성사를 비롯한 여러 제자를 데리고 공주 가섭사에 가서 49일 기도를 봉행하게 되었다. 이때 신사께서는 여기에 필요한 물품의 운반이라든지 힘든 일을 모두 성사에게만 시켰다. 심지어 성사에게 명하여 밥솥을 걸게 하였는데 이것을 일곱 번이나 새로 고쳐 걸도록 하는 등 지나칠 정도로 힘든 일을 시켰으나 성사께서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일일이 명하는 대로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신사께서 처음으로 성사의 근기와 심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포덕 30년(1889)에 지목이 심하던 어느 날이었는데 청주포졸이 손천민이 피신하여 없을 때 그의 처를 체포해가려고 하므로 성사께서 포졸에게 이르기를 『천민의 처를 잡아가지 말고 그 숙부를 잡아가라. 나는 손천민의 숙부로다』 하고 자원해서 포졸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성사께서 청주군 주성점에 이르렀을 때 술 10여잔을 연거푸 마시고 말하기를 『내 취하여 걸음을 옮기지 못하겠으니 너희는 나를 업고 가라』 하므로 포졸이 성사를 업고 청주영에 이르렀다. 이 때 영장이 신사의 행방을 대라고 하자 성사께서 대답하기를 『내 자현(自現)하여 체포되었거니 어찌 선생의 주소를 말하리오』 하자 영장이 그 의에 감동하여 즉시 석방하였다. 포덕 31년(1890)에 성사께서 진천군 방동에서 21일을 1기로 하고 주문 백만독을 외우기로 맹세하였는데 이 해에 이와같이 독공하기를 무릇 3차나 하였다. 이 무렵 성사께서 생활이 곤궁하여 동네에 빈 집을 빌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밥솥이 또한 깨어져 밥을 못한지 3일만에 집 뒤에 지신을 위하는 토기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로써 밥솥을 대신하여 쓰게 되었다. 그러나 쌀이 떨어져 이종만이 보리죽을 갖다 드리자 성사께서 『사람이 어찌 이같이 구구히 지내리오. 만일 7일을 굶어도 죽지 않으면 반드시 한울이 감동하리라』 말하더니 이때에 마침 도인 이종석이 쌀 3말을 지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 포도대장 신정희의 장자 신일균이 동학을 지목하여 도인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소문을 듣고 성사께서 그 길로 그의 집에 찾아가 신일균을 크게 꾸짖어 이르기를 『그대는 유자요 양반이라고 자랑하는 자로서 유를 버리고 도척을 배우며 양반을 믿고 불의를 감행하니 그대 나라를 위하고자 하는가. 나라를 망치고자 하는가. 내 비록 미천하나 백성을 위하여 불의와 싸우리라』 하고 눈을 부릅뜨니 그 형광이 사람을 엄습하는 듯하여 일균이 그 위풍에 놀래어 도인을 불러 빼앗았던 재산을 돌려 주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다가 날이 저물어 주점에 들어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집 여주인이 성사께서 낭인시절에 이미 친히 아는 사이였으므로 주효(酒肴)와 담배를 내놓으며 친절히 권하였다. 이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평생에 경영하는 큰 일이 있으므로 술과 담배를 끊고 또한 방색(防色)하였노라』 하고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어느날 도인 한영석의 어머니가 성사에게『도를 믿으면 재앙을 면한다 하더니 이제 아이가 죽었으되 아무 영효가 없고 또한 무복(巫卜)의 저주까지 금하라 하여 화가 이르되 막을 도리가 없었노라』하면서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아이는 고사하고 장자 영석이 또 죽었으니 급히 돌아가라』 고 하자 한영석의 어머니가 놀래어 집에 돌아가 본 즉 과연 그러하므로 다시 성사에게 찾아와 『모든 죄 다 나에게 있으니 용서하옵고 사람을 살리소서』 하므로 성사께서 『집에 돌아가라 영석이 이미 회생(回生)하였으리라』 라고 말하여 돌아가보았더니 성사의 말씀이 적중하였음을 보고 이후부터 독신자가 되었다. 포덕 35년(1894) 2월에 성사께서 『주마곤갑난 방양은을신(走馬困甲亂 放羊隱乙新)』 이란 강시를 얻었다. 이해에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성사께서 신사의 명에 의하여 9월에 북접통령이 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혁명군을 지휘하다가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사를 모시고 강원도지방으로 몸을 피하였다. 포덕 36년 (1895) 에는 성사께서 신사의 생활을 돕기 위하여 원산, 강계와 청국변경 등지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 해 12월에는 신사를 모시고 원주 치악산 수레촌(水禮村) 삼간초막에서 독공하던 중 다음과 같은 강시를 받았다. 포덕 38년(1897)에 성사께서 강원도 지방을 순회하다가 여주 전거론 임순호의 집에 이르러 4월 5일 대신사의 득도향례를 지낼 때 임순호, 염창순 등에게 말씀하기를 『내 이제 향아설위 할 의향이 있으니 이는 나의 사의가 아니라 천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종문제인(宗門諸人)이 만약 이를 알고 보면 반드시 사문의 명을 어긴 일이라 시비할지니 군등은 아직 여러말을 하지말라』 하고 곧 향아설위의 제를 실시하였는데, 다음날 이 말을 들은 신사께서는 사제간 동심동리 됨을 기뻐하였다. 이와 같이 의암성사의 지극한 정성과 도력은 드디어 해월신사의 인정을 받아 전술한 대로 포덕38년(1897) 12월 24일에 도통을 이어받아 제3세 교조가 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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