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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성사

    [의암성사]  갑진혁신운동

    명칭 갑진혁신운동
    설명 집마다 동학[家家東學]이요 사람마도 주문을 외는 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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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 차 --


    1. 관리(官吏)의 지목과 러.일 개전설(開戰說)
    2. 대두령제(大頭領制)의 설정(設定)
    3. 구국운동(救國運動)의 구도(構圖)
    4. 비정혁신(秕政革新)을 상서(上書)
    5. 진보회의 개회
    6. 위기에 봉착한 진보회 운동
    7. 이용구(李容九)의 배신



    1. 관리(官吏)의 지목과 러.일 개전설(開戰說)


    포덕44년(1903)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걸쳐 포덕이 더욱 늘어 참으로 집마다 동학[家家東學]이요 사람마도 주문을 외는 성세[人人誦呪의 盛勢]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관리의 지목은 날로 심하여 각도 각군을 비롯해서 방방곡곡에서 도인과 관리들 사이에 충돌이 그칠 날이 없어 민심은 흉흉하고 세론(世論)은 분분하여 실로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來風滿樓;산비가 오려고 할 때는 바람이 누각에 가득찬다)’의 감이 없지 않았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러일 개전설이 자자하여 긴박감은 더하게 되었다. 이해 2월에 성사께서 이용구를 본국에 보내어 대비태세를 갖추게 하고 다음과 같은 경통을 발하였다.

    경통(敬通)

     
    근고(勤苦)하는 여러분에게 고하노니 도의 실리(實理)를 생각건대 반드시 알 것이므로 별로 말할 것이 없으나 옛적으로 말하면 성현의 맥락이 서로 연속함은 마음에 맞는 것이라. 오만년 운수에 한울이 나를 목탁으로 삼은 고로 내가 천하를 박람하고자 만리타향 객지에 있어 소용되는 공비(公費)가 적지 않으나 몇만원 돈이 아직 충당이 되지 못하여 일이 원대한 계획에 흡족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밤낮 생각한 즉 일이 뜻과 같이 안되므로 편의장(便義長) 이만식(李萬植=이용구)에게 위탁하여 보내오니 자세히 상의하여 이 지휘에 의하여 잘 볼행하되 모든 두령은 각기 제익(諸益)으로 더불어 부지런히 힘써서 한마음 되기를 도모하되 빈부간에 직업을 힘써 사지를 부지런히 놀리며 서로 정성을 다하면 어찌 감응하는 덕이 없으며 어찌 헛수고가 될 이치가 있겠는가? 군자의 도에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성현의 가르침에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것이 가장 귀함을 의심없이 크게 깨닫게 하옵소서.


    공(公)을 받들어 물건을 공경함은 실로 무고한 허비가 아니라 공(公)이 공(公)으로 되지 못하고 사(私)가 사(私)로 못되는 것은 운에 있고 내게 있는 것은 아니로되 일일이 연구하여 보면 어찌 딴 길이 있겠는가? 여러 가지 그 실정을 미리 꼭 말할 수는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어두운 때를 당하여 아직 까마귀의 자웅(雌雄)을 알지 못하나 밝게 드러나는 날에 분석이 있을 것이니 살피소서.


    지금 천하의 대세가 삼전(三戰)에 있으니 첫째는 도전(道戰)이요, 둘째는 재전(財戰)이요, 셋째는 언전(言戰)이라.
    도전(道戰)이라는 것은 나라에는 각각 주(主)되는 교가 있어 만민을 화육하며 그 덕을 펴서 그 마음을 복종케 함이 위(爲主)이고, 재전(財戰)이라는 것은 사람이 발달하여 흥업(興業)을 권리로 하며 농상(農商)을 통리(通利)로 하여 나라가 부해지며 백성이 강해지는 계책이요, 언전(言戰)이라는 것은 일을 따라 담판하여 사리를 달하며 경계(境界)를 통하는 것이어늘 우리나라 조선의 형편을 보니 마치 우물 안에 앉아 한울을 보고 캄캄한 밤중에 처한 것 같이 개명은 고사하고 병이 골수에 들어 거의 방휼지세(蚌鷸之勢:서로 적대하고 양보하지 않음)에 이른지라. 창생이 다 도탄중에 들었으니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날고? 생각건대 여러분은 믿음으로 정성을 삼아 위로는 국가의 대보(大寶)를 돕고, 아래로는 중생의 질병을 건지어 우리 도의 대의를 빛내게 할 것을 천만 바라오니 널리 양해하옵소서.


    2. 대두령제(大頭領制)의 설정(設定)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성사(聖師)께서 다음과 같은 경통(敬通)을 내는 동시에 특히 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두령제(大頭領制)를 설정(設定)하고 별항과 같이 출첩(出帖)을 발행하였다.

    경통(敬通)

     
    한울은 자(子)에서 열리고, 땅은 축(丑)에서 열리고, 사람은 인(寅)에서 나서 비로소 삼재(三才)를 이루었으니 한울은 삼재의 벼리가 되고, 땅은 삼재의 바탕이 되고, 사람은 삼재의 기운이 된지라. 사람을 생령이라 하나니 생령이라는 것은 창창한 한 기운이 형체에 접속하여 천지가 자리를 잡으며 만물이 길어나며 이목(耳目)이 듣고 보는 데에 총명이 응하나니 이것을 정령(精靈)의 신명이라 이르나니라. 그러므로 사람과 내가 서로 접하매 마음과 뜻을 서로 통하며 의사가 하나로 돌아가 모든 일이 같이 되는지라 이러므로 사람과 내가 서로 생각하매 생각하면 있을 것이요 잊어버리면 없을 것이니라. 이로 미루어 보면 어찌 비치어 응하는 이치가 없겠는가?  그 비치어 응하는 이치로 논하면 정력이 서로 통하는 이치이니 이러하면 비치어 응하는 곳에 어찌 멀고 가까움을 논하랴? 비록 그러나 도무지 다른 이치가 아니라 믿음이 두텁고 의(義)가 단단한 탓이니 신의가 있는 곳에도 만약 그 정력이 비치어 응하는 것을 논할 것 같으면 또한 겉으로 나타나는 길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설명하리라. 아! 본인이 이미 모든 군자로 더불어 서로 결의한지가 오랬으므로 신의가 중치 않는 것이 아니로되 먼 곳 비치어 응하는 곳에 그리운 회포가 날로 더하고 달로 깊어 가는지라. 이 대운이 개명하는 때를 당하여 특별히 서로 믿는 의리가 있은 연후에야 감화의 정력을 일으켜 도의 무궁과 이치의 대업을 황연히 깨닫게 되리라.


    대저 그 정사를 보아 그 자리를 얻고 그 자리가 있으매 그 이름을 얻나니 만사람의 장(長)에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이름이니라. 우리 도의 주고 받는 일은 진실로 용담연원의 양양(洋洋)한데서 난 것이니 어찌 티끌만치라도 쉴 수가 있으랴? 우리 각 두목은 다년 근고한 나머지에 다만 접주로만 부르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세가 불가불 처례를 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고로 십만원장(十萬員長)으로부터 만원지장(萬員之長)에 이르기까지 단연코 명칭의 구별이 없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비로소 넉자의 이름을 주니 이 어찌 지공정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밝고 밝은 일의 순로를 강명코자 할진대 각각 정력(精力)의 본연을 알아 점점 친하는 지경에 나아감이 어떠할고? 인화의 길은 정력(精力)의 이르는 곳에 있나니 믿고 믿으소서. 이와같이 중대한 때에 만약 경외(驚畏)할 곳을 알면 공사간에 모앙(幕仰)함이 어떠할고? 감화흥작(感和興作)하는 일은 포양하는데 있는지라. 만사람의 장(長)이 오만장(五萬長)의 자리에 올라가고, 오만장이 십만장의 자리에 올라감은 그 덕을 정성되게하고 그 자리를 포상하는 것이라. 이와같이 하면 사람의 돌아갈 바는 덕에 있다는 것을 의심없이 보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공평정직한 큰 정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각각 그 대두령 명칭의 첩지와 도서부절(圖署符節)의 법칙을 좌(左)와 같이 하며 그리고 이번 도서(圖署)는 마음대로 만들어 사용할 수 없는고로 각각 그 본(本)을 만들어 이에 보내오니 규절을 잘 지켜 몇만년 전해 내려갈 아름다운 칭호를 이루게 할 것을 천만 바라노라.


    좌개
    수청대령(水淸大領) 십만지장(十萬之長) 구방도서(九方圖署)
    해명대령(海明大領) 오만지장(五萬之長) 팔방도서(八方圖署)
    의창대령(義昌大領) 만원지장(萬員之長) 오방도서(五方圖署)


    부칙(해의)
    물 수(水)자의 명칭은 특히 그 운의 한번 맑은 것을 밝히니 실로 이것은 대선생님 정력의 간섭이오, 또 바다 해(海)자의 명칭은 그 운의 밝은 것을 분별하니 해월선생님 정력의 간섭이요, 그리고 의로울 의(義)자의 명칭은 본인이 비록 불민하나 이미 다년간 훈도(薰陶)의 밑에서 전발(傳鉢)하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참절함을 잊고 감히 서로 믿는 인연을 깨우치니 바라건대 제형은 자존망노함을 협의치 말고 대사가 순서대로 나아가도록 연구함이 어떠할고.


    대령출첩
    수청대령(水淸大領) 이만식(이용구)
    해명대령(海明大領) (보류)
    의창대령(義昌大領) 이겸수, 박영구, 나인협, 문학수


    3. 구국운동(救國運動)의 구도(構圖)

    그런데 이때의 조직은 105명 이상에 해접주(該接主), 500명 이상에 수접주(首接主), 1,000명 이상에 대접주(大接主)를 두게 하였으니 대접주(大接主)는 나용환, 이종훈, 홍기조, 오응선, 노석기 등 200여명이었다. 이때에 성사(聖師)께서 스스로  『국가의 일이 또한 도중(道中)의 일이니 내 이제 노국(露國)과 일본(日本)이 개전(開戰)하면 이 전역(戰役)을 타서 국가만전(國家萬全)의 책(策)을 도모하고, 우리 도의 현명(顯明)의 기회를 지으리라.』 생각하고 동지와 함께 의논하여 말씀하시기를  『노ㆍ일의 전쟁은 곧 만주와 한국 때문이라, 일본(日本)이 승(勝)하면 한국이 일본에 돌아가고, 노국(露國)이 승(勝)하면 한국이 노국에 돌아갈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니, 만일 한국정부가 이 때에 있어 팔짱끼고 방관만 한다면 한국의 멸망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을 것이라, 만약에 나로 하여금 한국 정부의 요직에 있다고 가정하면 계책이 반드시 없지 아니하니 그는 무엇이냐 하면 노국(露國)과 일본(日本)이 개전한다면 그 어느 나라가 반드시 이길까를 잘 알아야 할 것이요, 그것을 안 다음에는 반드시 승전할만한 편에 가담하여 공동출병(共同出兵)을 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얻어야 할 것이요, 그 지원을 얻은 뒤에는 강화담판(講和談判)에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국가만전(國家萬全)의 조약(條約)을 얻어야 할 것이니. 이는 천고(千古)에 만나지 못한 기회니라. 그런데 나의 생각으로 말하면 일본이 이기고 노국이 패할 것을 미리 점칠 수 있으니, 그것은 첫째 지리상(地理上) 관계에서 노국이 불리할 것은 다시 말 할것 없으며, 둘째 노국의 싸우는 목적은 만리 밖에서 한 부동항(不凍港)을 얻는데 야심을 가짐에 불과하니 전쟁에 대한 정신적 동기가 박약하고, 일본으로 말하면 생명을 내기하는 싸움이니 그 정신적 동기가 강할지라 이 점이 가장 승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셋째 군약(軍略)과 병기(兵器)문제이니 지금의 일본은 어느덧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과 달라서 독일(獨逸)의 정예(精銳)의 술(術)을 배운바 많으니 그 역시 가볍게 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한국의 형편으로 말하면 반드시 노국(露國)과 선전(宣戰)하여 전승국이 지위를 얻는 것이 제일상책(第一上策)이 될지라. 그러나 지금의 한국정부대관(韓國政府大官)으로 말하면 다같이 친로당(親露黨)이요 주상(主上)이 또한 노국공관(露國公館)의 파천(播遷)하였으니 뉘가 능히 꿈에라도 이러한 생각과 용기를 낼 자(者) 있으리오. 그러므로 내 이제 도인(道人)의 힘으로써 노당(露黨)을 파(破)하고 대전(大戰)을 타서 국가만전의 계(計)를 세우고자 하나 일본의 군사당국과 의논이 맞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어떠한 사람이 가장 이 일에 적당할까?』 하니 권동진, 조의연 두 사람이 다 말하기를 『일본 참모총장 다무라(田村)의 사람됨이 지략이 있고 그 뜻이 또한 정독(精篤)하니 가히 더불어 일을 의논함직하다.』 고 하므로 성사께서 곧 권동진과 함께 가만히 다무라(田村)를 보고 노ㆍ일전쟁의 이해(利害)를 설파한 뒤에 말씀하기를  『일본 병대로 하여금 상업을 가장한 후에 비밀히 통상항이 아닌 곳에 들어가게 하고 우리 도유(道儒)들이 이에 응하여 한국의 서울을 바로 찌르면 친로당을 가히 제멸(除滅)할 것이요, 친로당이 파괴되면 노국세력은 반드시 고립될 것이니 이때 도유(道儒) 수십만과 아울러 노국 사람을 치면 노국이 반드시 패할지니 동양평화의 술(術)이 이에서 더 나을 자(者) 없다.』 하였다.


    다무라(田村)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그 계획을 좇기로 맹세하므로 성사께서 이에 손병흠을 본국에 보내면서 말씀하기를  『일변 도인에게 입의(立義)의 대책을 설유(說諭)하며 일변 그 준비에 착수하라. 내 일본군이 비밀히 떠날 때를 타서 다시 급히 알리리니 대기를 잃지 말라』 하였다. 병흠이 서울에 돌아와서 여러 두목과 비밀히 의논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도중 8월 3일에 부산에서 뜻밖에 급병으로 죽고 8월 5일에는 다무라(田村)도 급사하였다. 성사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대사(大事)가 갔도다』 하고 3일간 음식을 전폐하였다. 그때에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등은 재차 성사의 명교(命敎)에 의하여 일본으로 향하다가 선중에서 일인 당국자의 의혹을 받아 하륙(下陸)하지 못하고 다시 귀국하게 되었다. 이 해에 성사께서 『삼전론(三戰論)』과 『명리전(明理傳)』 그리고 『무하설(無何說)』을 지었다.

    4. 비정혁신(秕政革新)을 상서(上書)

    포덕 45년(1904)에 노국과 일본이 개전하매 성사께서 군자금 1만원을 일본 육군성에 연조(捐助)하였다. 이때 한국내정(韓國內政)이 날로 글러감을 보시고 성사께서 이인숙으로 하여금 당시 의정부대신 윤용선(尹容善)과 법무대신 이윤용(李允用)에게 글을 보내어 시국에 대처할 일과 비정(秕政)을 혁신할 것을 통론(痛論)하였다.


    의정대신 윤용선은 이 글을 보고 요언(妖言)이라 하여 이인숙을 체포하고자 하매 이인숙은 몸을 피해 죽음을 면했다. 이때에 성사께서는 경도에 계시다가 동경으로 이우(移寓)한 다음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문학수, 이겸수, 나용환, 한용구, 박영구, 김안실, 이두연, 나인협, 김유영, 한화석, 강익주, 임중호, 오응선, 방찬두, 김명준, 홍기억, 홍기조, 유지훈, 노석기, 김영학, 임예환, 김학수, 김낙철, 김낙봉, 원용일, 곽기용, 권병덕, 이종옥, 정종혁, 정종호, 이정봉 등 교회의 두목 40여인을 급히 동경에 불러 이미 구상한 바임을 전제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보국안민의 계책이 상, 중, 하 세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대거혁명(大擧革命)하여 폐혼입명(廢昏立明)하는 것이 그 상책이요, 둘째는 그 악한 정부를 소탕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함이 그 중책이요, 셋째는 노일전쟁에 간여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함이 하책이니라.』 고 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이  『만일 전쟁에 간여하여 일본의 군사를 방해하면 일본이 반드시 우리를 해하리니 그 결과가 어찌 되오리까?』 고 말하자 성사께서 대답하되  『이 계책은 본래 일본을 방해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전에도 말하였거니와 노국과 일본의 전쟁은 오직 만주와 한국을 위한 전쟁인즉 노국이 이기거나 일본이 이기거나 한국이 이에 좇아 망할 것은 명약관화(明若 觀火)한 일이니 이때에 있어서 우리 도인 수십만이 발기하여 전쟁에 간여하고 보면 일본이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에 당하여 반드시 정밀(靖謐)을 내외에 요구할 것이라. 내 이때에 있어 일본 당국과 한국정부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뒤에 일본을 위하여 노국을 치고 일변 국권을 잡은 뒤에 모든 정치를 혁신하면 우리 한국의 재생의 길이 이에 있을 뿐이다.』 고 하였다.

    5. 진보회의 개회

    성사의 명을 받고 본국에 돌아온 여러 두목이 서울에 모여 장차 대거(大擧)할 일을 의논할 때에 회명을 『대동회(大同會)』라 하고 비밀리에 도인을 조직하였으나 결성하지 못하였다. 이 해 4월에 박인호, 홍병기 두 사람이 다시 일본에 다녀가자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본국에 돌아가 도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단발(斷髮)케 하라. 단발의 목적은 첫째 세계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요, 또한 단결을 굳게하여 회원의 마음과 뜻을 일치케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런 때에 용기를 내어 잘 드는 칼로 얽힌 실을 끊듯이 하라. 대신사께서는 목을 내대시었는데 머리털쯤이야 아낄 것이 무엇이랴. 우리가 단발을 한 후에라야 기대하는 일이 성공하리라.』 고 하였다.


    이 해 7월에 박인호, 홍병기, 이종훈 엄주동, 김기배, 엄용환, 김명준, 전국환, 박형채, 국길현, 최영구, 정경수 등이 모화관(慕華館)(서대문구 독립문 부근) 산방에 모여 다시 일을 의논하고 『대동회』라는 명칭을 고쳐 다시 『중립회(中立會)』라 한 후 각지에 발문하였다.


    이 때에 호남지방에서는 이병춘, 장남선, 구창근, 이양우, 박재덕, 김봉득, 김봉년, 정용근 등이 강경포에서 '중립회'를 창립하려고 하자 여산정사 박항래가 포탄으로 위협하므로 도인이 서로 수일 동안 버티어 지내다가 해산하였다. 그리고 관서지방에서는 나용환, 나인협, 문학수, 노석기 등이 또한 도인 수만명을 거느리고 강동, 삼등, 순천, 양덕 등지에서 '중립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중앙의 지시에 따라 정회하였다.


    이 무렵 관리의 지목이 더욱 심해져서 윤형천, 김완규, 주인학, 이인준, 강치환 등은 함흥에서 피살되고, 희천도인(熙川道人) 나태을, 김윤흥은 안주헌병대에서 피살되었으며, 정기남, 한석민, 박상도 등 수십명은 강동에서 잡혀 갇히고, 심기철, 최학순 등은 황주에서 갇혔으며, 기타 각 부군(府郡)에 관리의 잔학이 그 극에 이르렀다.


    이 달에 성사께서 권동진, 오세창, 조의연 등과 서로 의논하여 회명을 『진보회』라 하고 회의 취지, 강령, 규칙을 지어 본국에 보낸 후 이용구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서울에 모인 여러 두령이 다시 『중립회』『진보회』라 개명하고 다음과 같은 4대강령을 포고(布告)했다.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鞏固)히 할 사(事)
    둘째 정부를 개선할 사(事)
    셋째 군정(軍政) 재정(財政)을 정리할 사(事)
    넷째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사(事)


    이렇게 되자 전국의 백만도중은 10월8일(음력 8월29일)을 기하여 경향각지에서 일제히 개회를 궐기하고 단발흑의(斷髮黑衣)로써 죽기를 결단하여 정부개혁 국정쇄신을 절규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때에 회원 중에 단발한 사람이 20여만명에 달하였고 각도 각군에 진보회의 기치(旗幟)가 임입(林立)하여 실로 일대장관을 이루었다.


    이처럼 각군에서 진보회가 조직 개회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이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그것은 진보회의 이면관계(裏面關係)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외국인들은 한국이 이 정도로 사회단체가 발달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민권과 민주를 부르짖는 진보회의 개회 광경을 보고 매우 놀라와 하였다.


    「두가단(頭可斷)일지언정 발부가단(髮不可斷)」이라고 하는 뿌리깊은 유교사상이 만연된 사회에서 하루 아침에 20여만명이 머리를 깍고 전국 360여개소에 진보회의 지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인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진보회의 전신이 동학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부는 매우 당황하여 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진보회의 두령과 활동 인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나용환, 임예환, 홍기조, 임정순, 홍기억, 노석기, 안처흠, 이응보, 김처성, 한석민, 김관수, 김정일, 황학도, 노병직, 김수옥, 정혜남, 최주억, 신광보, 유문학, 김안실, 장응곤, 김광호, 서달제, 한관진, 나인국, 김기수, 김용전, 김홍준, 김경복, 장윤학, 장관식, 김광준, 오봉오, 차철수, 나석항, 박린각, 박왕식, 김광한, 이승현, 김병수, 김사진, 양준근, 김선호, 임복언, 고달주, 장한성, 김의성, 권 성, 손태용, 이정복, 임동준, 김두화, 임명수, 김국언, 김의봉, 나종선, 백인덕, 김기홍, 김준정, 이어길, 김중칠, 백관범, 한병순, 박용팔, 김병술, 백찬호, 김춘식, 이돈하, 이양술, 원용건, 유계선, 궁상원, 나영선, 강달주, 김호진, 이필규, 방기창, 김영언, 이정하, 나용구, 이대수, 이영학, 장진성, 김견용, 김영하, 홍달섭, 김형국, 박명선, 김복원, 방창곤, 송영 율, 이근섭, 정승덕, 윤상건, 김일주, 이초옥, 유한기, 고승동, 유양필, 방원곤, 박명두, 이재현, 강극삼, 김병단, 이도순, 이정모, 나원경, 이윤식, 김진영, 박성규, 윤흥길, 윤대식, 이종진, 나현빈, 방기후, 이사항(이상 평남 열군(列郡)에서 개회)

    문학수, 이겸수, 한용구, 유승용, 이정점, 이정봉, 김낙렴, 김재명, 백운기, 김창하, 손영해, 한현태, 이용천,최석연, 홍봉소, 김진팔, 오명운, 김사영, 이종수, 최안국, 김복윤, 오기홍, 이의달, 이원국, 김복인, 한군삼, 이정화, 한승록, 김명준, 장승관, 최낙경, 최영곤, 최사민, 이태일, 장언호, 김종록, 백인옥, 문익현, 이인백, 이승문, 김진호, 이길붕, 김명삼, 양원섭, 이홍범, 공예수, 강흥룡, 이승락, 이덕해, 이흥룔, 박순정, 홍석항, 허준경, 김원섭, 김도준, 장석항, 원운태, 박응준, 최봉상, 김병준, 주덕인, 최홍선, 김덕필, 김준흥, 김명후, 김복선, 문석현, 문석 의, 한유도, 김중건, 윤운청, 김득운, 안국진, 김창락, 안정곤, 문이현, 이태우, 전중신, 김정삼, 백응규, 원명준, 전중록, 유효화, 김명희, 임영수, 정득춘, 김용운, 한흥준, 신경재, 김경함, 김원종, 원치영, 이용익, 이여일, 허용해, 김영근, 강익점, 문석조, 주천건, 주명득, 장대길, 최군범, 이상린, 박찬명, 이종호, 전기선, 김사빈, 변응찬, 김관오, 이정록, 주창건, 장수헌, 박인헌, 홍하청, 최석찬, 최석진, 박태환, 김정호, 황하식, 백문선, 양백록, 박기창, 박도명, 최용하, 김용건, 이유정, 최성룡, 임도순, 김자일, 김낙주, 최관호, 한봉율, 여용수, 김효달, 주정심, 임찬천, 이인항, 최이하, 김기용, 이준걸, 김사황, 김득성, 김용호, 양필수, 임정준, 장운룡, 김영화(이상 평북 열군(列郡)에서 개회)

    박규철, 이반철,정재홍, 이승우, 민영순, 정한교, 박린흡, 길승원, 박재양, 차상학, 윤달호, 이동호, 이필화, 오창섭, 심상현, 채병숙, 채장숙, 신상희, 박인식, 정재선, 이명인, 김대현, 이현우, 강도영, 임순화, 신태식, 김병주, 김병렬, 서상하, 김정석, 최병훈, 김인추, 이능환, 김병율, 이태윤, 한태주(이상 강원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이종석, 임순호, 김병용, 신정집, 전철진, 홍순덕, 박장우, 김순신, 이강수, 이재연, 이용태, 이충식, 신재준, 김영배, 황 복, 홍병학, 이원식, 정낙영, 황운흥, 김한식, 홍재길, 윤기창, 윤기장, 안태준, 안계식, 이봉구, 손량택, 허 환, 나계원, 구덕희, 이규식, 한세교, 안응두, 권재천, 이원근(이상 경기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한규복, 김주열, 최병헌, 이진해, 이진구, 박풍균, 엄재영, 박동현, 김병두, 장세화, 안재덕,안재위, 최긍순, 김교충, 최영식, 최재순, 이규석, 김상배, 박용태, 차동노, 신태순, 최정재, 정태영, 이규호,이세헌, 박만영, 고인수, 고운흥, 김덕배, 신무현, 김춘배, 장석희, 장석윤,조상현, 김일수, 임기준, 서우순, 한창덕, 손재근, 박문화, 정인성, 김영근, 김영구, 이공우, 전석일, 장승환, 이명칠, 서태순, 지동희, 최봉길, 김성집, 장리환, 오일수, 최동석, 오치현, 박정도, 조성순, 김종(宗)희, 김종(鍾)희, 변박래, 주용운, 강대규, 최덕선, 최종목, 박좌경, 유한건, 장명곡, 신광로, 신광우, 서진보, 민원식, 김성집, 서재순, 김상일 (이상 충청남북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이병춘, 이영하, 구창근, 박재덕, 김봉덕, 박낙양, 염현두, 민영일, 민영진, 장남희, 이기동, 조석효, 박준승, 최승우, 허 선, 김영원, 문길현, 한영태, 정용근, 김해생, 이유상, 이상우, 남주송, 윤두병, 강종실, 최상령, 이경섭, 김중화, 김한기, 김연구, 임래규, 안승환, 김현구, 이용준, 박동준, 강의아, 이영기, 김종태, 강안실, 최순봉, 박귀봉, 공문학, 차경석, 안병수, 강대준, 정현채, 마성팔, 김상채, 김봉태, 고광록, 송대화, 윤세현, 김병태, 강봉수, 김의봉, 이갑흠, 정순모, 홍 순, 송두욱, 정영순, 강대설, 송연섭, 김영수, 김맹룡, 최기식, 윤준하, 임병양, 최영승, 강용서, 한부조, 권두수, 김우태, 양방흠, 주연호, 김미현, 강운백, 황정욱, 박인화, 김도순, 정일상, 김지풍, 윤상홍, 김창수, 김태수, 경동호, 최시백, 최두환,김두업, 정영두, 이 기, 박기홍, 김기영, 이영석, 이관기, 안길성, 김수원, 고병화, 이화국, 지관국, 천기근, 김종황, 임두홍, 김두선, 이안준, 황숙주, 한용준, 신인경, 양 빈, 정만권, 김익태, 김화일, 김봉년(이상 전라남북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김정일, 조기연, 김양현, 이병규, 한화석, 이문현, 임중호, 이희준, 김사영, 정태교, 임익연, 김문화, 조행균, 고사범, 오응선, 전국환, 최자환, 이윤세, 박창구, 안도순, 이배화, 한치운, 유창익, 한용국, 정주익, 고학렴, 김홍문, 조진팔, 조기선, 이태형, 이석연, 안봉하, 김응하, 이수영, 이창욱, 이창걸, 홍석정, 이하렴, 이종화, 김응간, 이봉린, 이석우, 이방필, 최명백, 김택영, 이은열, 최영구, 이창열, 홍의우, 장 훈, 김형선, 김영만, 최정녀, 안무원, 백경도, 이관국, 장한기, 김승주, 최인백, 조인항, 고봉학, 이관무, 김주삼, 김윤하, 박관하, 이정석, 이경섭, 김창근, 안승렬, 박동주, 박봉관, 이봉린,이춘원(이상 황해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김학수, 한남규, 유지훈, 조인성, 한인봉, 한병표, 이기완, 김봉기, 주인찬, 유문경, 최문상, 정운봉, 박영구, 이대원, 이문표, 주영곤, 홍성운, 차태은, 최기주, 김병순, 김종섭, 고용종, 박창훈, 이유년, 고진선, 김태종, 최상필, 주인화, 정계완, 문철모, 백문진, 이두환, 신영석, 고필화, 김천일, 차후순, 한인황, 맹인순, 주학현, 한태훈, 이수일, 홍인표, 한운혁, 한연유, 한건기, 유동영, 김석필, 서창근, 주영선, 박기혁, 김홍수, 김용환, 이용우, 박성업, 한인혁, 한용호, 김선택, 김봉익, 박대림, 원수남, 유용호, 김형원, 우정하, 조창규, 김한용, 이찬훈, 이재은, 한재유, 조철제, 김달현, 김창석, 문태훈, 최종준, 박승룡, 김두학, 최태현, 박기수, 조운걸, 김치섭, 이화룔, 권석우, 이봉국, 김병식, 노병호, 이병건, 김순우, 김학천, 정진곤, 천승락, 천수진, 천태종, 이태인, 양승남, 신태천, 김두억, 김두천, 안창헌, 염원형, 김태일, 황경화, 최봉천, 전자천, 김창원, 황희종, 권국설, 김상열, 오경천, 김병룡, 전양신, 백낙섭, 주도환, 문칠운, 최문성, 원백교, 박혁준, 최종순, 정계근, 김진흥, 김윤학, 정계성, 공시우, 주운상, 박부백, 김양근, 지봉헌, 황재국, 최주언, 최춘삼, 정승모, 안병률, 이문섭, 고창균, 유훈상, 방용갑, 원수홍, 염인환, 김윤택, 강석주, 이기수, 조종봉, 정현모, 서문하, 조종심, 김경희, 주계남, 권오겸, 임근태, 양상렴, 김영진, 장기원, 김만후, 방달초 (이상 함경남북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전희순, 김상정, 손은석, 박충일, 강필만, 지치연, 정용태, 박동남, 김수택, 김영선, 서응회, 김학두, 김석의, 조유혁, 이종화, 황태익, 박경준, 이태성, 박규일, 전대규, 박재원, 김문종, 이상규, 이지우, 최상관, 윤치수, 윤만수, 이괄로, 백수기, 강병길, 전경량, 이재성, 진환수, 노기현, 정태규, 김진규, 정봉조, 박영포, 허봉서, 허학서, 송영만, 최진규, 김응두, 김관태, 정찬용, 김석찬, 정재안, 김성간, 지학선, 이광준, 정용안, 전학천, 오성운, 이옥규, 최갑룡, 최상룡, 전봉환(이상 경상남북도 열군(列郡)에서 개회)

    6. 위기에 봉착한 진보회 운동

    진보회가 각 군에서 개회한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관(官)과 민(民)이 한참 동안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하여 당황하였고 외국공사와 외국인들도 그 곡절(曲折)을 모르고 놀랄 뿐이었다. 왜냐하면 대개 한국민(韓國民)의 의식수준이 아직 이와 같이 당당히 민회(民會)를 열고 민권(民權)과 민주를 주창할만한 정도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조(一朝)에 20여만명이 단발(斷髮)을 하고 360여주에 회소(會所)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실로 이적(異蹟)이라면 일대(一大) 이적(異蹟)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진보회의 정체가 곧 동학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더욱 놀래어 한편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고, 일본군과 교섭하여 재차 갑오혁명운동(甲午革命運動) 때와 같이 토벌할 움직임을 보이자 진보회는 실로 위기일발의 난국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서울에는 일찍 독립협회의 잔당이던 윤시병, 윤길병, 윤갑병, 염중모 등이 처음에 유신회(維新會)를 발기하였다가 일진회로 명칭을 고치고 일본군의 보호하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보회가 크게 일어남을 보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야심을 품고 당시 진보회장인 이용구에게 서로 합류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용구 역시 정부가 진보회를 동학으로 지목하여 일본군을 시켜 탄압할 것을 염려하여 이 해 10월13일에 진보회가 일진회와 합류하기로 하고 진보회원으로 하여금 일진회에 가입하게 한 후에 윤시병은 본회장이 되고 이용구는 총회장이 되었다. 이 때의 각 도 지부장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지부회장에 안태준, 강원도지부회장에 국길현, 충청북도지부회장에 이진용, 충청남도지부회장에 조상현, 전라북도지부회장에 정경수, 전라남도지부회장에 전국환, 평안남도지부회장에 김명배, 함경남도지부회장에 한남규, 경상남도지부회장에 김사영, 경상북도지부회장에 신광우, 평안북도지부회장에 김철제, 황해도지부회장에 최영구.
    또한 360여군에 지회장을 두어 전국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민폐를 제거하고 백성의 재산을 탈취한 관리를 조사하여 징계하는 동시에 빼앗긴 재산을 일일이 돌려주게 하고 총대를 정하여 비정(秕政)을 탄핵하는 등 민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 때에 함경북도는 아직도 노국군(露國軍)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최기남, 이경화, 이태인, 황한형, 권병호, 강익보, 남정하, 김병언 등이 건의대(建義隊)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조인성으로 하여금 함경북도교섭위원을 삼아 노(露)·일(日) 양국 군대에게 교섭하여 도인에게 신빙장(信憑章)을 주어 양군의 의심을 풀게 하고 신분을 보증케 하였다.

    7. 이용구(李容九)의 배신

    이 무렵 민회(民會)와 관속(官屬)의 반목이 더욱 심하여 도인의 살상이 또한 적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심한 것은 평북 태천 고치강에서 관군의 핍박을 받아 도인 수백인이 몰사한 사건과 가산(嘉山)에서 도인 김수길, 김용덕 등 여러 사람이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 또 희천에서 김윤재 외 47인이 치옥(致獄)된 사건을 위시하여 활주, 진주, 삭령, 춘천, 이천, 금화, 경주, 전주, 공주, 홍주, 온양, 청주, 황간, 정평, 함흥, 박천, 양덕, 정주, 구성, 영흥, 고원 등 각지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있어 관리와 병정의 난폭한 발포로 사상자가 적지 않았으나 필경은 다 민회의 승리로 돌아가 민회의 세력은 날로 커져갔다.


    이 때에 이용구와 송병준이 회무를 전횡(專橫)하여 서(西)에서는 도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군사철도부설에 복역케 하고, 북으로는 군수품 수송에 노역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의 하는 일에 의혹을 가졌던 지방두목들이 이용구 이하 몇 간부에 대하여 중요한 질문과 내용을 조사한 결과 모든 일이 성사의 명교(命敎)와 어그러졌음을 알고 10월에 박인호, 이종훈이 일본에 계신 성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 하였다.


    그동안 이용구, 송병준 등 간부 측으로부터 그럴듯한 방법으로 거짓보고를 받아 오면서 매양 불안과 의혹이 가시지 않았던 성사께서는 지방 두목들의 직접 보고를 받고 대사가 어긋날 뿐 아니라 부하의 배신에 크게 놀래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기 때문에 성사께서는 자중선처(自重善處)하여 후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포덕 46년(1905)에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동양의 대세는 일본에 의하여 좌우하게 되자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이 해 11월 17일에 ‘일진회’의 이름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를 받는 일에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성사께서 이용구를 불러 반포(頒布)된 성명서의 뜻을 물으니 이용구는 대답하기를  『대한(大韓)으로 하여금 일본의 보호를 받아서 장차 완전 독립을 하고자 하는 시의(時宜)에서 나온 것』 이라고 하므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보호를 받고자 하면 독립을 버려야 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면 보호를 버려야 하나니 어찌 보호라는 이름 아래 독립을 하고자 하느냐?』  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은 채 내심으로 교도(敎徒)의 수습(收拾)과 재조직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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