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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와 3.1독립운동 ◇
1.의암성사의 환원
상춘원에서는 박종환(朴宗桓) · 원덕상(元悳常) 두 사람의 주치의가 의암성사의 치료를 담당했다. 박종환은 의암성사의 도움으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의사였다. 의암성사는 출감 후에도 오른손만 움직일 수 있을 뿐 일거수일투족을 간병인이 모두 거들어야 하였다. 1년여의 극진한 치료와 간병으로 포덕 63년 봄에는 병세가 점차 호전되고 의식도 상당히 좋아졌다. 그런데 5월 10일 주치의가 외출한 사이에 한의사가 수은제(水銀劑)로 된 훈약(薰藥)을 잘못 시용(試用)함으로써 수은중독현상을 일으켜 호전되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갔다.
중독증세로 39도까지 올라갔던 체온은 해독제를 투여하자 약간 내려갔다. 그러나 의암성사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오히려 교회사에 대한 번민이 앞섰다. 그래서 의암성사는 5월 12일 병상을 찾은 권동진 · 오세창 · 최린 세 사람에게 『도(道)에 대하여서는 춘암이 있으니 염려할 바 없거니와 군(君) 등 3인은 춘암교주를 보좌하여 나간다면 교내교외사(敎內敎外事)를 물론하고 염려할 바 없으리라』 고 하면서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교회일을 잘 처리해 나가도록 당부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 15일 오전에야 약간 안정을 찾게 되자 의암성사는 춘암상사를 불러 교회사를 신신 당부하면서 『공화(共和), 나는 모르나 아직은 내가 정해준대로 해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심장마비 증세가 발생한데 이어 16일에도 혼수상태에 빠져 응급조치로 정신이 조금 들자 12시 조금 지나서 다시 춘암상사를 불러 교회일을 거듭 부탁하였다. 17일에는 폐렴이 돌발하여 주사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나 18일에는 열이 나면서 맥박이 약해지더니 혼수상태에 빠져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주치의 박종환은 의암성사의 최후를 예감하고 의복을 갈아 입히라고 하였다. 그때 의암성사의 둘째 딸 손광화(孫廣嬅)가 울면서 오른손 무명지를 잘라 의암성사의 입에 따뜻한 피를 흘러 넣어드리자 한울이 감응했음인지 의식이 조금 되살아나 물과 탕약을 조금 마셨다. 그런 상태에서 오후 늦은 시간에 천도교 소년회 회원 일동이 상춘원에 찾아와 의암성사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자정을 넘기고 19일 새벽 2시가 지나면서는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뜨지 못한 채 호흡이 가빠지자 임종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가족과 교인들이 의암성사의 주위에 둘러섰다. 그 자리에는 춘암상사와 주치의, 중앙총부 임직원과 청년회 및 개벽사 직원 일동이 의암성사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의암성사는 가족과 교인들의 오열 속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새벽 3시 환원하였으니, 향년이 62세였다. 의암성사의 운명을 슬퍼하듯 이날 밤 따라 하늘에서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밝자 서울시내에는 의암성사의 환원을 알리는 신문 호외가 뿌려지고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하여 이를 보도하였다. 특히 [동아일보]는 환원 다음날 장문의 사설을 통하여 의암성사의 서거를 애도했다. 빈소가 차려진 상춘원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으며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는 그날 하루 휴교하여 조의를 표했다. 중앙총부는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교주 춘암상사를 주상(主喪)으로, 권동진을 위원장으로 정하고 영결식은 교회장(敎會葬)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총독부에서 의암성사가 3.1운동의 주모자이며 형집행정지(병보석)로 석방된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영결식을 성대하게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영결식날 많은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와 같은 소요사태 발생을 염려한 나머지 가급적 영결식을 간소하게 치르도록 유도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허가를 얻어 6월 5일 영결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아침 6시 의암성사의 영구는 상춘원을 출발하여 영결식장인 경운동 중앙대교당으로 향했다. 3.1운동으로 중단되었던 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립공사가 포덕 62년 2월에 이미 완공되어 2월 28일에는 송현동의 중앙총부를 경운동 신축 총부건물로 이전하여 입주식까지 마쳤기 때문에 그동안 의암성사가 새 교당을 무척 보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중환으로 움직일 수 없어 소원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환원 후에나마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의미에서 중앙대교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중앙대교당으로 향하는 장례행렬은 창신동 상춘원에서 종로를 지나 경운동까지 이어졌고, 구경꾼까지 겹쳐 연도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영구가 대교당에 안치되고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7시 50분에 영결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날 지방에서 올라온 교인과 사회 인사 및 외국인 등 3만여명이 참례하여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영결식을 거행한 후 9시에 장지인 우이동으로 출발했다. 장례행렬은 270여개의 만장(挽章)과 70여대의 꽃차(花車), 20여대의 자동차와 200여대의 인력거를 비롯해서 보성전문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보성소학교, 동덕여학교의 학생과 교직원 1500여명과 교인, 조객 등 그 선두가 창경원에서 대교당에 이르기까지 장관을 이루었다. 장례행렬은 삼선평(三仙坪)(지금의 삼선교)에 이르러 한 시간 동안 머물며 일반 조객과 학생들에 의한 고별식을 거행하고, 오후 4시 우이동 봉황각 옆 장지에 도착, 5시에 하관식을 거행하였다. 하관식이 끝나자 맑던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의암성사가 환원하던 밤에 부슬비가 내렸듯이 하늘도 거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비를 뿌려 애도하는 것 같았다. 중앙총부는 영결식을 마친 후 [천도교회월보] 7월호를 ‘의암성사추도호’로 발행했으나 총독부에 압수 당하여 할 수 없이 문제된 부분을 삭제하고 7월 22일에야 7월 임시호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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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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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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