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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신사의 가족을 돌보다. 포덕 6년 (1865) 1월에 신사께서 처자를 데리고 울진군 죽변리(蔚珍郡 竹邊里)에 이거(移居)하여 대신사의 부인 박씨사모와 두 아들 세정.세청 등 가족들도 모시고 동거하였다. 대신사께서 참변을 당한 후 그 가족들은 잠시 세조(世祚)의 집에 있다가 단양군 민사엽(閔士燁)의 집에 의탁하였는데 지목이 심하여 정선군 문두곡(旌善郡 文斗谷)으로 옮겨 역시 민사엽의 도움을 받아 왔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구제할 사람이 없어 유리(流離)하다가 상주군 동관암(尙州郡 東關岩)에서 신사의 거처를 알고 찾아가 같이 지내게 된 것이다. 신사께서는 대신사의 가족이 찾아왔을 때 버선발로 뛰쳐나와 영접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각처에 지목이 더욱 심하여 도인의 종적이 끊어지고 혹 길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도 노상인과 다름 없이 대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도운(道運)이 끊어진 감이 있었다. 신사께서 죽변에 이거한 후로는 전혀 밖에 나가지 않고 치성과 공부에 힘쓰며 비밀히 사람을 각처에 보내어 도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고 다시 49일 기도를 1년에 네 차례씩 행하게 하는 한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강수로 하여금 복사케 하여 도인들에게 전하니 각지 도황(道況)이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포덕 6년 10월 28일 대신사의 탄신향례를 검곡에서 거행한 후 신사께서 도인에게 말씀하기를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라. 사람이 인위(人爲)로써 귀천을 가리는 것은 곧 천의(天意)에 어기는 것이니 제군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선사의 뜻을 계승하기로 맹세하라.』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위선 도인된 사람은 적서(嫡庶)의 구별을 두지 말라고 하였다. 포덕 7년(1866) 3월 10일에 신사께서 상주에서 대신사의 조난기도식을 거행할 때 교인 황문규, 한진우, 황여장, 전문여 등이 참석하였다. 신사께서 예식을 마치고 다시 영양에 돌아가 은거하였는데 도인들도 신사의 주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해 8월에 서양군함이 강화에 들어와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전국 인심이 매우 소란하였다. 이 때 각지 도인들이 대세(大勢)를 묻고자 신사를 찾았으나 종시 아는 사람이 없어 도인들이 신사를 사모하는 정이 더욱 깊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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