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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해월신사]  상주 전성촌

    명칭 상주 전성촌
    설명
    주소 경북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
    방문자 수 1918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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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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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군(永川郡) 화계동(花溪洞)에서 2개월을 지낸 신사께서는 가을이 되어 한기(寒氣)가 심하므로 포덕26년(1885) 9월에 가족을 거느리고 상주군(尙州郡) 화령면(化寧面) 전성촌(前城村)에 이거하였다. 여름옷을 입은채 이거한 신사의 가족들은 가재도구도 없었거니와 끓일 양식마저 없었다.


    지난 6월에 관졸(官卒)들이 보은장내를 급습(急襲)하였을 때 완전히 몰수(沒收)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서인주(徐仁周)와 황하일(黃河一)이 급히 찾아와서 성심으로 주선(周旋)하여 근근히 가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찬 바람이 불어오는 11월이 되자 하의(夏衣)밖에 없었던 신사와 가족들은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박치경(朴致京)과 이치흥(李致興)이 백목(白木) 7필(疋)을 갖다드려 간신히 추위를 면할 수 있었다.


    신사께서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보따리를 지고 다녔기 때문에 세인(世人)이 「최(崔)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사께서는 길을 떠날 때면 반드시 보따리를 재차 살펴보고 난 후 쌌으며, 또 봇짐 위에는 짚신 한 켤레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그 봇짐은 딴 사람에게 지우는 일이 없이 신사 자신이 지고 다녔고 심지어는 잘 때에도 한쪽 어깨는 봇짐끈을 묶은 채로 베고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고 한다.


    주(註):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해월신사께서 그토록 소중하게 지고 다닌 그 보따리 속에는 대신사의 친필 경전인 용담유사 8편과 동경대전 원문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1. 한울님은 쉬지 않는다.

    신사께서는 언제 어디를 가든지 주문을 외우는 것은 물론이요 평시(平時)에도 낮잠을 자거나 또는 하는 일없이 무료하게 그저 있는 법이 없고 반드시 짚신을 삼든가 또는 노끈을 꼬았는데 만약 노끈을 꼬다가 일감이 다하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서 꼬았다. 제자들이 『좀 편히 쉬시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면 대답하기를


    『한울님도 쉬지 않는데 사람이 한울님이 주는 녹(祿)을 먹으면서 부지런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니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관의 지목을 피하여 한달 혹은 석달이 멀다하고 이사를 하는데 새로 든 집에 가서는 반드시 나무를 심고 멍석을 내었다. 집안사람과 제자들이 『내일이라도 어느 곳으로 피난할지 알 수 없는데 그것은 해서 무엇하겠읍니까』하고 물으면 신사께서 대답하기를


    『이 집에 오는 사람이 과실(果實)을 먹고 이 물건을 쓴들 무슨 안될 일이 있겠느냐. 만약 세상사람이 다 나와 같으면 이사다닐 때에 가구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니라.』 하였다.


    그리고 또한 신사께서 옷에 대하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눈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평상시에는 주로 무명옷을 입었으며 혹 어떤 사람이 명주옷을 갖다 드리면 거죽과 속을 바꾸어 입었다. 도인중(道人中)에 인감(因監)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나만 어찌 편안하게 자겠느냐』하면서 밤마다 이불을 덮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다시 말하면 신사는 그 성벽됨이 근검하고 주밀하여 내것이 없으며 인자하고 관후하여 결함이 없었으므로 제자들이 누구나 한번 신사를 만나뵈인 후에는 스스로 그 성정(性情)에 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 천주(天主) 강림(降臨)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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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께서 상주(尙州) 전성촌(前城村)에 자리잡은 후부터 각지에서 찾아오는 교도들에게 여러가지로 도(道)를 강(講)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 일찌기 청주(淸州) 서택순(徐宅淳)의 집에 들렸다가 그 며느리의 베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徐君)에게 「군(君)의 자부(子婦)가 직포(織布)하느냐, 천주(天主) 직포(織布)하느냐」한대 서군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리오. 일세인(一世人)이 이러하도다.』


    『대개 천지는 귀신이며 귀신 역시 조화니라. 그러나 그것은 유일한 지기(至氣)로 생긴 것이며 만물(萬物)이 또한 지기의 소사(所使)이니 이렇게 보면 하필 사람뿐이 천주를 모셨으랴. 천지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음은 이는 곧 이천식천(以天食天)이니라. 그러나 제군은 한 생물이라도 무고(無故)히 해(害)하지 말라. 이는 천주를 상(傷)함이니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조화(造化)의 길에 순응하라.』


    『도가부인(道家婦人)이 어린 아이를 치는 것은 천주의 뜻을 상하는 것이니 심히 삼가야 할 것이며 도가(道家)에 손님이 오거든 손님이 오셨다 말하지 말고 천주 강림하셨다 하라.』


    『마음을 떠나 천주를 생각할 수 없고 사람을 떠나 한울을 생각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 공경함을 버리고 한울을 공경하는 것은 이는 꽃을 따버리고 과실(果實)이 생기기를 바람과 같으니라.』


    『사람이 다 창공(蒼空)을 보고 한울님이 계신다고 믿나니 어리석음이 이에서 큼이 없고 우상(偶像)을 보고 귀신이라고 섬기나니 미욱함이 이에서 더함이 없나니라. 사람의 시청언용(視聽言用), 사람의 굴신동정(屈伸動靜)이 저 스스로가 귀신이며 저 스스로가 조화로되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하나니 이는 보배를 간직하고 스스로 굶어 죽는 자(者)와 같으니라.』


    『부부(夫婦)가 화순(和順)함은 우리 도의 초보(初步)이니 도(道)의 통불통(通不通)이 도무지 내외(內外)의 화불화(和不和)에 있나니라. 내외 화하지 못하고 타인을 화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집에 불난 것은 끄지 않고 타인의 불을 끄는 자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부인을 화하지 못하면 비록 날마다 삼생(三牲)(牛.羊.豚의 제물(祭物))의 용(用)으로 천주를 위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감응(感應)할 바 없으리라 부인이 혹 남편의 명(命)을 좇지 아니하거든 정성을 다하여 절하라. 온순한 말로 일배이배(一拜二拜) 절을하면 비록 도척(盜跖)의 악(惡)이라도 감화(感化)가 되리라.』

     
    『우리 도는 대운(大運)이라 장차 그 화(化)하는 것이 천하에 미칠 것이니 우리 도중(道中)에서 요순공맹(堯舜孔孟)같은 성인(聖人)도 많이 날 것이니라.』


    『우리 스승이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창명(創明)하시니 이는 천지(天地) 귀신(鬼神) 조화(造化)의 근본을 들어 창명하신 것이라 내 꿈엔들 어찌 선생의 유훈(遺訓)을 잊으리오. 선생이 일찍 남기신 교훈이 있었는데 「사람은 한울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섬기기를 한울 같이 하라」하셨도다. 내 비록 부인(婦人) 소아(小兒)의 말이라도 배울 것은 배우노라. 이제 제군을 봄에 거만하고 자존(自尊)하는 자 많으니 「위가 미덥지 못하면 아래가 의심하며 위가 공경치 못하면 아래가 거만하니」라 함은 이 선사(先師)의 경계하신 바니라. 위에 있는 자 어찌 반드시 위에만 있으며 아래 있는 자 어찌 반드시 아래에만 있으리오. 두목(頭目)의 밑에 반드시 백승(百勝)의 대두목(大頭目)이 많이 있나니 제군은 삼가라.』


    3. 청정도장(淸淨道場)

    포덕27년(1886) 봄에 손천민, 박도일, 이관영, 권병직, 권병일, 박준관, 박덕현, 서치길, 박치경, 송여길, 박시효 등 여러 도인이 신사를 찾아와 뵈었다. 이 해 4월에 신사께서 제자들에게 일러 말씀하기를, 『금년에는 악질(惡疾)이 크게 유행하리니 도인(道人)들은 일층 기도에 힘쓰는 동시에 특히 청결을 주로 하라.』 하였는데 그 요목(要目)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라. 묵은 음식은 다시 끓여 먹어라. 침을 아무데나 뱉지 말라. 만일 길이어든 땅에 묻고 가라. 대변을 본 뒤에 노변(路邊)이거든 땅에 묻고 가라. 흐린 물을 아무데나 버리지 말라. 집안을 하루 두번씩 청결히 닦으라.』


    이 해 6월에 과연 괴질(怪疾)이 크게 유행하여 전염(傳染)을 면한 자 백(百)에 하나가 없었으나 오직 도가(道家)는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신사께서 사시는 마을 40여호에도 병에 걸린 자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충청, 경기, 전라, 경상 등 원근(遠近)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신사를 찾아 도(道)에 드는 자 그 수를 헤일 수 없었다.


    포덕28년(1887) 1월 1일에 신사께서 춘추(春秋)로 2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라는 공문을 발(發)하고 다음과 같은 강시(降詩)를 얻었다.

     
    『무극대도작심성(無極大道作心誠) 원통봉하우통통(圓通峯下又通通)』

     
    2월 24일 신사의 부인 김씨(金氏)가 환원(還元)하니 전성촌 뒷산인 원통봉(圓通峯) 아래에 장례(葬禮)를 지냈다. 3월 21일은 신사의 61세 탄신일(誕辰日)이므로 각지 교인들이 모여 헌수식(獻壽式)을 거행하였다. 4월에 신사께서 이 곳을 떠나 서인주(徐仁周), 손천민(孫天民)을 데리고 정선군(旌善郡) 유시헌(劉時憲)의 집에 이르러 대신사 득도 27회 향례를 거행한 후 장차 춘기(春期)의 49일 기도를 행하고자 하였다. 이 때 시헌이 신사에게 고(告)하기를 『갈래사(葛來寺)는 일찍 선생의 개단수도(開壇修道)하던 곳이라 그 곳에서 수련(修煉)함이 어떠하십니까?』하니 신사께서 쾌히 허락하고 또다시 정선군 동면(東面) 고한(古汗)에 있는 갈래사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마쳤다. 이때 다음과 같은 강시(降詩)가 있었다.


    『불의사월사월래(不意四月四月來) 금사옥사우옥사(金士玉士又玉士) 금일명일우명일(今日明日又明日) 하하지지우하지(何何知知又何知) 일거월래신일래(日去月來新日來) 천지정신령아효(天地精神令我曉)』


    신사께서 산에서 내려와 포덕에 힘쓰기 위하여 곧 보은장내(報恩帳內)에 이거하여 농사를 손수 지으며 강도(講道)하게 되었다. 이때에 사방에서 신사를 찾아 도를 묻는 자가 많이 모이므로 신사 이에 육임소(六任所)를 다시 설정(設定)하고 각 두목으로 하여금 매월 1회씩 순차로 청강(聽講)케 하고 또 일정한 규칙을 세우되 누구든지 만약 도소(都所)에 먼저 품(稟)함이 없으면 신사를 찾아뵙지 못하게 하니 이로 부터 육임(六任)의 임무(任務)가 더욱 중대하게 되었다.


    포덕29년(1888) 1월에 신사께서 전주(全州)를 순회하다가 삼례리(參禮里) 이몽노(李夢老)의 집에 들렸을 때 이미 지은 밥이 2인분 뿐이고 그 밖에는 지을 쌀이 없었으므로 주부(主婦)가 심히 걱정하였다. 이에 이몽노가 『이미 지은 밥을 먼저 신사께 드리고 다시 변통함이 가(可)하다』고 하여 신사께 밥을 드렸더니 내종에 본즉 오히려 남은 밥이 넉넉하여 10여인(餘人)이 먹고도 남았으므로 도인들이 이를 정성의 영적(靈蹟)이라 하였다.


    이 해 3월에 신사께서 손병희의 매씨(妹氏)인 밀양손씨(密陽孫氏)를 부인(婦人)으로 맞았다. 이 달 10월에 신사께서 대신사의 24회 조난향례를 마치고 문도(門徒)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다시 지목(指目)이 크게 일어날 것이니 제군들은 서로 내왕하는 것을 삼가고 집에서 수도하라』고 하였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 상주종합버스터미날→화령,화북행버스→봉촌리 하차
    자가용 이용


    ::중부내륙고속국도 상주IC→25번국도(상주방향)→화서면사무소 지나서 49번지방도
    좌회전→지산리→봉촌리→전성동
    *상주시청 홈페이지→관광상주→여행정보→교통편 안내사이트 참조
    --상주시청 홈페이지 바로가기--
    ☎ 상주시외버스터미날 : 054-534-9002 시내버스터미날 : 054-534-8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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