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동학혁명 > 성지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성지
  • 성지

    해월신사

    [해월신사]  동학혁명

    명칭 동학혁명
    설명
    주소
    방문자 수 2917 분

    목록으로

    본문

    -- 목  차 --
    1. 전봉준의 고부 의거(全琫準의 古阜 義擧)
    2. 동학군의 3월기포(東學軍의 3月起包)
    3. 황토현 대첩 (黃土峴 大捷)
    4. 해월신사의 통유 (海月神師의 通諭)
    5. 황용촌전투 (黃龍村戰鬪)
    6. 동학군의 군율 (東學軍의 軍律)
    7. 전주성 함락 (全州城 陷落)
    8. 청.일 양군(淸.日 兩軍)의 개입(介入)과 전주화약(全州和約)
    9.각군(各郡)에 집강소(執綱所) 설치(設置)
    10.일본의 침략과 갑오경장(日本의 侵略과 甲午更張)
    11. 동학군의 9월기포(9月起包)
    12.남북접의 통일전선(南北接의 統一戰線)
    13.혁명군의 북상(革命軍의 北上)
    14.동학군의 논산집결
    15.각지(各地) 동학군의 수난(受難)
    16. 동학군의 공주혈전(公州血戰)
    17.황해(黃海) . 강원(江原)의 동학군봉기(東學軍蜂起)
    18.혁명군(革命軍)의 최후(最後)
    19.마지막 포고문(布告文)
    20.동도대장(東徒代將) 전봉준(全琫準)의 순국(殉國)



    1. 전봉준의 고부 의거(全琫準의 古阜 義擧)

    포덕 35년 (고종 31년, 서기 1894년) 갑오 1월 5일에 신사께서 청산군문암리(靑山郡文岩里)에서 설법(說法)하였는데, 1월13일에 호남(湖南)에서온 도인(道人)으로부터『고부접주 전봉준이 도중을 거느리고 벌써 고부군을 격파한 후 장차 대거(大擧) 북상하리라』는 급보를 받았다.


    전봉준은 고부사람으로 자(字)는 명숙(明淑)이며 어려서부터 담력(膽力)과 기백(氣魄)이 있고 학식(學識)과 무예(武藝)를 겸하였으며 체소(體小)하지만 강기(剛氣)가 있어『녹두장군 綠豆將軍』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전봉준은 30세 때에 동학에 들어온 후 수도에 지극하여 접주(接主)의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시국(時局)을 개혁하고자 사방을 주유(周遊)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데 힘썼다.(대원군과도 기맥(氣脈)을 서로 통하였다는 설(說)이 있으나 공초(供草)에서는 이를 부인(否認)하였다.)


    당시의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은 탐학무도(貪虐無道)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거기에다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과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의 가혹한 토색(討索)이 겹치게 되니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은 여간이 아니었다.

    주(註):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무도한 실례(實例) 몇 가지를 들면 이러하다.
    ① 이평면(梨坪面)에 있는 만석보(萬石洑)가 고장(故障)이 없는데도 그 밑에 신보(新洑)를 만들어 농민의 고혈(膏血)을 착취(搾取)하려고 지방민(地方民)을 강제로 동원하여 임금(賃金)은 한푼도 주지 않고 사역(使役)시켰고, 남의 산의 수백 년 묵은 수목(樹木)을 강제 로 찍어 사용하였으며, 신보(新洑)의 수세(水稅)라고 하여 상답(上畓)은 1두락(斗落)에 2 두(斗)씩, 하답(下畓)은 1두락에 1두씩 도합 벼 7백여석을 강제로 거두었다.
    ② 황무지를 세(稅)없이 마음대로 개간하라고 하여 문권(文券)을 발급(發給)하고도 추수기(秋收記)에는 세를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③ 불효불목(不孝不睦)과 음행잡기(淫行雜技) 등 허구(虛構)의 죄명을 씌워 강탈한 돈이 2만여냥(萬餘兩)에 달하였으며,
    ④ 전(前)에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자기 부친의 비각(碑閣)을 세운다고 천여 냥(千餘兩)을 강제로 거두었으며,
    ⑤ 대동미(大同米)를 민간에서 거둘 때는 정백미(精白米)로 하고 상납(上納)할 때는 나쁜 쌀로 바꿔치기 하여 그 차액(差額)을 착복하였으며,
    ⑥ 그의 서모(庶母) 사망시(死亡時)에는 부의금(賻儀金)으로 배호당(每戶當) 한 냥 내지 한 냥 닷 돈씩 거둔 일이 있었다.

    만석보의 물 감독으로 있던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全昌赫)은 지방민(地方民)을 이끌고 그 부정(不正)들을 시정(是正)해 줄 것을 누차 요구하였으나 도리어 군수 조병갑은 전창혁을 난민(亂民)으로 몰아 곤장을 쳐서 죽였다. 이에 전봉준의 울분은 말할 것 없고 지방민의 노여움도 그 도(度)를 더하게 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민의(民意)에 좇아 다시 수차 진정하여 보았으나 아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병갑의 탐학과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가기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정신(東學精神)에 불타는 전봉준은 이에 뜻을 결단하여 자신과 송두호 등 20여명 정종혁(鄭宗赫), 송대화(宋大和), 김도삼(金道三), 송주옥(宋柱玉), 송주성(宋柱成), 황홍모(黃洪模), 최흥열(崔興烈), 이봉근(李鳳根), 황찬오(黃贊五), 김응칠(金應七), 황채오(黃彩五), 이문형(李文炯), 송국섭(宋國燮), 이성하(李成夏), 손여옥(孫如玉), 최경선(崔景善), 임노홍(林魯泓), 송인호(宋仁浩)이 서명(署名)한『사발통문』을 신호로 동지규합에 힘쓰는 한편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군기고(軍器庫)와 화약고(火藥庫)를 점령하고 군수와 아부배(阿附輩) 등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숙청한 후 전주를 함락시키고 나아가서는 경사(京師)로 직충(直衝)할 계획을 짜서 추진시켰다. 준비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전봉준은 각포(各包)에 포고문(布告文)을 발하고 드디어 1월10일을 기하여 도중(道衆)을 본부(本部) 마항시(馬項市)에 모이게 하자 발문(發文)을 보고 모인 사람이 5천여 인에 이르렀다. 이에 전봉준은 그 곳 감나무 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불법(貪虐不法)한 일과 백성의 재산을 약탈한 사실 등을 설명하였다.

    주(註): 그 감나무는 현재 정읍군 이평면사무소(井邑郡梨坪面事務所) 뒷마당에 있다.
    첨언: 지금은 태풍의 피해로 고사(枯死)한 것을 방부 처리하여 황토현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전봉준은 대신사(大神師)의 신원(伸寃)이 이번 거사(擧事)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인들은 대신사의 원(寃)을 펴게 하고 지목에서 벗어나 고통을 면하고자 하던 마음이 간절하던 때였으므로 전봉준의 연설을 듣고는 피가 끓고 의분(義憤)이 동(動)하여 즉시 죽창(竹槍)과 농기(農器)를 들고 고부군을 습격하게 되었다. 이때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전주방면으로 도주(逃走)하여 버리고 혁명군(革命軍)은 무기고(武器庫)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한 후 서리(胥吏)들을 문초하여 수세창곡(水稅倉穀)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만석보(萬石洑)의 신보(新洑)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참고(參考): 이에 앞서 전봉준이 신사를 찾아뵙고 고부농민과 도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혁명할 뜻을 고(告)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신사께서 말씀하시기를『아직 때가 이르니 후기를 기다림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전라감영의 급보를 받고 2월15일 고부군수 조병갑을 정죄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감봉하는 동시에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를 안핵사에 임명하여 뒷 수습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발령(發令)을 받고도 일삭(一朔)이나 늦게 고부읍으로 내려온 이용태는 역졸(驛卒) 8백명으로 하여금 각 부락을 다니며 이번 거사(擧事)에 참가하였던 사람을 모조리 색출한다고 하면서 수십명씩 묶어서 구타 구금함은 물론이요 혹독한 형벌과 재산강탈 부녀능욕(婦女凌辱) 방화 (放火) 등을 기탄없이 자행하였다. 그러면서 이용태 자신은 전주 한벽당(全州 寒碧堂)에서 기생(妓生)과 주연(酒宴)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민중의 고통과 원한은 날로 더하였다.


    관(官)의 탐학이 이토록 자심해지자 전봉준은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할것을 결심하고 정익서(鄭益瑞), 김도삼(金道三) 등과 상의한 후 인근에 있는 각 군현(郡縣) 동학접주(東學接主)에게 통문(通文)을 발(發)하여 도중(道衆)을 모이게 하였다. 이에 고창(高敞), 무장(茂長), 흥덕(興德), 정읍(井邑)을 중심으로 한 김개남포(金開南包)와 태인(泰仁), 김제(金堤), 금구(金溝) 등지를 중심으로 한 김덕명포(金德明包) 등 1만여명(萬餘名)에 달하는 동학군(東學軍)이 모이게 되었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하고 1월25일에 요새지(要塞地)인 백산(白山)으로 전군(全軍)을 이동 유진(留陣)하였다.

    참고(參考) : 4월 2일자 『갑오실기(甲午實記)』에 이르기를『동학(東學)이 호남(湖南)으로부터 점점 다시 일어나 무리가 더 불어서 먼저 고부(古阜)에 모여 군수 조병갑의 탐학한 일로 떠드니 군수는 전주로 피하고 동학의 무리는 관사를 헐고 관리의 집을 불질렀다. 순영 장계에 의하여 군수를 파면하고 정부에서 장흥부사 이용태(長興府使 李容泰)로 안핵사를 삼았으나 머문 지 한 달 뒤에 전주에 이르러 처리를 잘못 하였다』고 하였다. 동도문변(東徒問辨)『고부기요변』에는『당초에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이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이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던 차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도임한 이래로 계속하여 백성들의 기름을 짜내고 이어서 각가지로 박해가 심하니 집을 떠나 도망하는 자가 10명중 8~9명 되었다. 이리하여 민심이 대단히 흉흉하더니 갑오 정월(正月) 11일에 읍민 수백 명이 명례궁보(明禮宮堡) 세금 더한 건으로 연서를 하여 군수에게 소장을 드리고 헤어지지 아니하니 군수 조병갑이 감영에 말하여 병정 수백 명을 풀어가지고 와서는 불문곡직하고 그 사람들을 도륙하니 감사 김문현(金文鉉)이 장계도 없이 행패를 부린 조병갑을 크게 꾸짖고 즉시 장계를 내어 군수를 파면시키려 하였더니 조병갑의 배후 당로자가 다시 그를 신임시킬 생각으로 하루 밤낮 수십 차 전보로『위로부터 처분한다』고 말하니 감사 김문현이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김문현은 곧 병방(兵房)에 비장(裨將)과 군교를 파견하여 떠드는 백성들을 효유하여 퇴산시켰는데 조병갑이 다시 잉임(仍任)한 뒤에도 옛날의 나쁜 버릇은 고치지 않고 탐학이 더욱 심하더니 2월 19일에 그 고을 백성들이 다시 일어나 떠드니 무뢰배들이 사방에서 모여들므로 감영에서 또 다시 관군을 파견하여(차시 박명원 도임(此時 朴明源 到任) 효유하고 여러 번 부탁하여 떠드는 백성들을 물러가게 하여 겨우 농쟁기를 잡을만한지 열흘이 되지 못하여 안핵사 이용태가 역졸 8백여 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달려들어 새로 도임한 군수 박명원을 나무라고 위협하며 민요장두(民擾壯頭)를 수색하라고 시키며 역졸을 온 고을에 풀어 놓아 제멋대로 마을에 돌아다니며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사내들을 만나는대로 때리고 조기꿰미를 엮듯이 포승을 지워 잡아들이니 온 고을 백성들은 울분이 골수에 사무쳤다. 이때에 전봉준·김개남(全琫準·金開南) 등이 한번 소리치고 나서서 무리를 모으니 경각에 만여 명이 되어 3월 21일에 흰 깃발에『동도대장(東徒大將)』이라 크게 써서 세우고 고을에 있는 병기를 빼앗아 드디어 큰 성류가 된 것이다. 소위 안핵사 이용태는 전주 한벽당(全州 寒碧堂)으로 물러가 크게 잔치를 벌이고 기생을 불러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으니 과연 임금님의 명을 받은 안핵사의 책임이 어디 있었던가. 슬프다 호남(湖南)의 난은 처음에는 조필영으로부터 시작되어 중간에 조병갑을 거치어 내 중에는 이용태가 끝을 막은 것은 만고에 바뀌지 아니할 정론이라.(희호남지난 시어조필영 중어조병갑 종어이용태 차만고불역지논야(噫湖南之亂 始於趙弼永 中於趙秉甲 終於李容泰 此萬古不易之論也)하였다. (동학난기록 상 157면)(東學亂記錄 上 157面)

    한편 안핵사 이용태의 가렴주구가 더욱 가열(加熱)되는 가운데 전봉준은 접주(接主) 손화중(孫華中)·김개남(金開南)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인근 군현접주(郡縣接主)들에게 총궐기할 것을 통고 하였다. 이리하여 3월1일 동학군은 줄포(茁浦)의 관고(官庫)를 부수고 2개월분(個月分)의 군량(軍糧)을 확보한 후 고부를 재점령(再占領)하여 안핵사 이용태를 추방하는 등 인근 사방에서 봉기한 동학군들이 계속 백산(白山)으로 집결해 왔다.


    2. 동학군의 3월기포(東學軍의 3月起包)

    3월 21일 드디어 전봉준(全琫準)은 중의(衆議)에 의하여 대장(大將)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손화중. 김개남(孫華中, 金開南)은 총관령(總管領)으로 김덕명, 오시영(金德明, 吳時泳)이 총참모(總參謀)로 최경선(崔景善)이 령솔장(領率將)으로 송희옥(宋喜玉), 정백현(鄭白賢)이 비서(秘書)의 직임(職任)을 받았다. 전봉준은 백립(白笠)과 백의(白衣)(부상(父喪) 때문에) 백마(白馬)를 타고 『동도대장(東徒大將)』이라는 기치를 앞세워 동학군(東學軍)의 대오를 재정비 편성한 후 표식(標識)으로 궁을견장(弓乙肩章)과 『동심의맹(同心義盟)』의 횡대(橫帶)를 메게 하고『제폭구민(除暴救民)』『보국안민(輔國安民)』『오만년수운(五萬年受運)』등 깃발을 날리며 행군할 때에는 심고(心告)를 드리고 주문(呪文)을 외이게 하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였던 궁을부도(弓乙符圖)를 도인(道人)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슴에 품게 하였는데, 전봉준은 말하기를 『이 부도(符圖)를 언제나 가슴에 품고 행군하면 비록 만군중이라도 죽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백산 요새(白山 要塞)에 웅거(雄據)한 전봉준은 기포(起包)의 대의(大義)를 밝히고 군기(軍紀)를 확립(確立)하는 한편 3월 25일에 다음과 같은 사대강령(四大綱領)을 표방함으로써 본격적(本格的)인 혁명(革命)에의 기치(旗幟)를 들게 된 것이다.
    -,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부수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
    -,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 왜놈을 몰아내고 성도를 맑게 한다(逐滅倭夷 澄淸聖道).
    -, 군사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진멸한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또한 그 이틀 후인 3월 27일에는 다음과 같은 격문(檄文)을 천하에 공포함으로써 기포(起包)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혁명(革命)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격 문(檄 文)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게 됨은 그 본의(本意)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貪虐)하는 관리들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구축(驅逐)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富豪)들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수령(方伯守令)들 밑에서 굴욕을 당하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甲午) 3월 27일 호남창의대장소 재 백산(湖南倡義大將所 在 白山)

    이 격문이 발표되자 『마을마다 포(包)가 설치되고 기(旗)를 들고 서로 호응』(촌촌설포 거기상응=대동기년)(村村設包 擧旗相應=大東紀年) 하여 실로 백산에 모인 동학군은 그 기세가 충천하였으니, 당시 혁명대열에 참여한 각포(各包)의 중요 두령(頭領)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읍(井邑)에 정종혁, 차치구, 송대화, 송주옥, 정덕원, 정윤집, 전동팔, 홍광표(鄭宗赫, 車致九, 宋大和, 宋株玉 , 鄭德源, 鄭允集, 田東八, 洪光杓) 등, 태인(泰仁)에 김개남, 최영찬, 김낙삼, 김문행, 김지풍, 유한술(金開南, 崔永燦, 金洛三, 金文行, 金知豊, 劉漢述) 등, 만경(萬頃)에 진우범, 김공선(陣禹範, 金公善) 등, 금구(金溝)에 김덕명,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 김윤오(金德明, 金士曄, 金鳳得, 劉漢弼, 金允五)등, 고창(高敞)에 오하영, 오지영, 임천서(吳河泳, 吳知泳, 林天瑞) 등, 김제(金堤)에 김봉년, 이치권(金奉年, 李致權)등, 무안(務安)에 배규인, 배규찬, 송관호(裵圭仁, 裵圭贊, 宋寬浩) 등, 무장(茂長)에 송문수, 강경중, 정백현(宋文洙, 姜敬重, 鄭伯賢)등 임실(任實)에 최승우, 최유하, 임덕필, 조석휴(崔承雨, 崔由河, 林德弼, 趙錫烋)등, 남원(南原)에 김홍기, 김낙기, 이기동, 이기면, 최진학, 전태옥, 강종실, 김종학, 김종황(金洪基, 金洛基, 李起東, 李起冕, 崔鎭學, 全泰玉, 姜宗實, 金鍾學, 金鍾璜) 등 순창(淳昌)에 양해일(梁海日), 진안(鎭安)에 전사명, 전화삼, 김택선(全士明, 全化三, 金澤善)등 , 무주(茂朱)에 윤민(尹玟) 등


    3. 황토현 대첩 (黃土峴 大捷)

    대오를 편성한 동학군(東學軍)은 4월 3일부터 전투태세에 돌입, 금구·부안 양현 (金溝.扶安 兩縣)으로 진격하여 부안현감 이철화 (扶安縣監 李喆和) 및 그 관속을 결박한 다음 군기 (軍器)를 접수하고 4월 4일 법성포(法聖浦) 등지에 다음과 같은 2통의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혁명(革命)의 취지를 재천명하였다.

    동학군통문 <1> (東學軍通文)

    성명(聖明:왕)이 위에 있고 생민 (生民)이 도탄이니 누가 민폐 (民弊)의 근본인고. 이는 포흠(浦欠)질하는 관리로 말미암은 것이니 포흠(逋欠)질하는 관리의 근본은 탐관(貪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탐관의 소기(所紀)는 집권의 탐람(貪람:재물이나 음식을 탐냄)에 있다. 오호라! 난(亂)이 극한 즉 다스리고 흐린즉 바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지금 우리들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이 마당에 어찌 이민(吏民)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 근본을 캐면 관리(官吏) 역시 백성이니 각 공문부(公文簿)의 이포(吏逋:관리들의 포흠질)는 민막(民막:백성이 악정(惡政)에 고생하는 일)의 조건이므로 몰수하여 와서 보고하라. 마땅히 구별의 방법이 있으니 가져오는 것을 염려하지 말되 또한 시각(時刻)을 어기지 말기를 특별히 명심하라!

    동학군통문 <2>(東學軍通文)

    우리들의 오늘 의거는 위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아래로 많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죽기로써 맹세한 것이니 무서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앞으로 바르게 되기를 기다리라. 전운사(轉運使)의 관리와 백성에게 폐단된 것과 균전관(均田官)의 폐를 제거한다면서 폐를 낸 것과, 각 시장에서 푼전으로 세를 거두는 것과, 각 포구에서 선주들이 강제로 빼앗는 것과, 타국(他國) 잡상들이 고가(高價)로 무역하는 것과, 염전의 세금 이러한 각종 물건도매에 이를 취하는 것과, 백지에 솔밭과 묵은 밭에 세금복징하는 것과, 환자(還子)곡식을 뉘어 두고 본전을 뽑아가는 것과, 가지가지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릇 우리 사농공상 직업에 속한 백성들은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위로 국가를 돕고 아래로 죽음에 막다른 백성을 편안케 하면 어찌 다행이 아니랴.
    제 중 의 소 (濟 衆 義 所)


    동학군(東學軍)이 금구.부안(金溝 扶安) 등을 함락시키자 전라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 영장(營將) 이경호(李景鎬)(금위대장 이장렴(禁衛大將 李章廉)의 아들) · 김달관 · 이광양 · 이재섭 · 송봉수(金達觀.李光陽.李在燮.宋鳳洙) 등으로 하여금 영병과 보부상(營兵과 褓負商) 혼성부대 수천 명을 이끌고 출정케 하였다.


    이때 금구(金溝)군수 김명수(金明洙)가 공리심을 앞세워 자진 출전코자 하였다. 그러나 김문현(金文鉉)은 그의 실력을 믿지 못하여 이를 거절하고 좌영관 이경호(左領官 李景鎬)를 대장으로 선발하여 출정(出征)케 하였던 것이다. 이경호는 다소 병사(兵事)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군사작전을 의논할 때 그는 장담하기를 『요새지에 파수를 세우고 백산(白山)으로 내왕하는 나룻터를 지켜 동학군의 량도(糧道)를 끊으면 10일이 지나지 아니하여 적의 무리를 사로 잡을 수 있다』고 호언하였다.


    4월 3일(음(陰)에 이경호는 전주(全州)를 떠나 백산 10리 밖 평지에 진을 쳤다.
    동학군 1대는 부안 부흥역에 집결하고 다른 1대는 태인(泰仁) 안곡면 북촌에 집결하였다. 이때에 감사 김문현은 금구(金溝)군수 김명수(金明洙)를 향관(餉官)으로 따라가게 하고, 군사마 최영년(軍司馬 崔永年)에게 명하여 진지를 살피게 하였다.


    최영년이 진지를 살핀 후에 이경호에게 묻기를 『적은 고지에 웅거하고 아군은 평지에 진을 쳤으니 적이 만약 병에 물거르듯이 일시에 내려오면 장차 어찌 하옵니까?』하자『옛날에 마속(馬謖)은 고지를 점령하였다가도 패하였고 왕평(王平)은 평지에 진을 치고도 싸움에 이긴 사례(史例)가 있으니 군사의 기밀에 있어서는 지금 누설할 수 없다...』하므로 최영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와 감사에게 보고하자 감사 김문현도 또한 근심하였다.


    감사 김문현은 마음을 놓지 못하여 중군 김달관(中軍 金達觀) · 초관 이재섭(哨官 李在燮)으로 하여금 보조병으로 평민장정 560여명을 좌익으로 삼아 진지 10리 옆에 숨게 하고, 초관 유영호(哨官 柳營浩)로 하여금 장돌뱅이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우익이 되어 백산 뒤 30리 밖에 숨게 하였다. 그런데 김달관과 이재섭(金達觀과 李在燮)은 서로 자기가 공을 세운다 하여 호령을 듣지 않고 앞을 다투어 깃발을 휘두르며 백산으로 향하였으나 종내 동학군을 당하지 못하여 크게 흩어졌고 유영호군(柳營浩軍)은 그 날 밤으로 한사람도 없이 도망을 치고 말았다.


    관군의 허약한 기세를 본 동학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추격하였다. 이에 이경호는 남은 병졸을 휘몰아 결사적인 백병전(白兵戰)을 감행코자 하였으나 향관 김명수(餉官 金明洙)가 군량을 대지 아니하여 무남병(武南兵) 7백과 토병 5백여 명은 몇 날을 먹지 못하였고 더구나 연일 비가 내려 관군의 사기는 저하될 대로 저하되었다.


    4월 4일 새벽에 이경호(李景鎬)는 장검을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백산을 향해 최후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여유 있게 내려 쏘는 동학군의 살과 탄환을 당하지 못하여 앞선 자는 주검을 벼개로 하여 꺼꾸러지고, 뒤선 자는 슬금슬금 도망을 하여 끝까지 이경호를 따른 자는 서기 유상문과 김암회(柳尙文과 金岩回)두사람 뿐이었다. 이때에 이경호는 죽음을 각오하고 동학군을 꾸짖으며 유상문과 같이 돌진하다가 전사하고 김암회 한사람만 죽음을 면하고 도망을 쳤다. 백산에서의 대승(大勝)으로 개전(開戰) 초기에 기세를 올린 동학군은 4월6일에 도교산(道橋山)으로 이동하여 진(陳)을 쳤다.


    한편 백산에서의 관군(官軍)의 패퇴(敗退)소식은 전주역내(全州域內)의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상가(商街)는 문을 닫고 미가(米價)를 크게 폭등시켰다. 또한 동학군이 전주로 북상(北上)할지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더욱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전라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은) 매우 분개하여 영관 이곤양(營官 李昆陽) · 군수 이근창(郡守 李根昌) · 상관 이재한(尙官 李在漢) · 유성후(柳成厚) · 송봉수(宋鳳洙) · 막하 정석희(幕下 鄭碩熙) 등에게 영군 무남군(營軍 武南軍) 3백명과 돌림장사군(장돌뱅이) 수천 명으로 동학군을 물리치라 명령(命令)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이만 했으면 동학군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장수는 지략이 없고 군졸은 기율을 지키지 아니하면서 한갓 동학군을 우습게만 보았다.


    동학군은 황토현(黃土峴)으로 이들을 유인한 후 거짓 패하여 두승산록(斗升山麓)의 계곡지대인 시목리(枾木里)로 후퇴하면서 복병을 하였다. 4월 6일 저녁 관군은 황토현에 (黃土峴) 도착하였다. 옛부터 황토현은 일명 사자봉(一名 獅子峰)이라고도 하였는데, 동학군은 『사자(獅子)』는 『사자(死者)』와 통하므로 이곳이야말로 관군이 시체를 묻을 곳이라고 하여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관군의 본영(官軍의 本營)인 황토현과 시목리(枾木里) 동학군진영(東學軍陣營)은 그 거리가 약 2키로가 될 정도인데 이 날 밤 동학군은 보부상 (褓負商)을 가장하여 관군(官軍) 진영에 진입, 그 동태를 정탐하여 본진(本陣)에 보고했다. 관군은 이날 밤 술과 고기 그리고 남녀(男女)의 가무(歌舞)소리가 뒤엉킨 가운데 태평하게 골아떨어져 있었다. 7일 3경이 조금이 지나 드디어 동학군은 2개대(個隊)로 나누어 정면과 후면(正面과後面)으로 기습하여 780여명의 관군 및 보부상을 섬멸하고 많은 무기와 식량(武器와 食糧)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봉준실기(全琫準實記)』에 의하면 여기서 전사한 관군의 시체를 주민들로 하여금 매장케 하였는데 관군의 행구(行具)에는 민간(民間)으로부터 탈취한 금은보패(金銀寶貝)가 수천금(數千金)이요 시체 수(屍體 數)의 태반은 여자(女子)였다는 사실로 보아 영병(營兵)들의 약탈과 부패상이 얼마나 자심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동학군은 4월 8일 아침 흥덕(興德)에 이르러 군기(軍器)창고를 부수고 군기를 탈취한 후 정오(正午)경에 고창(高敞)으로 행군하여 그날 밤 9시경 옥문을 열고 죄수들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관사를 헐어버린 다음 토호 은대정(土豪 殷大靜)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때 사방에서 모여드는 동학군은 그 수가 날로 늘어 실로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날(9일) 12시(時)경에 동학군 대부대(大部隊)는 무장(茂長)으로 진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죄수들을 석방한 다음 좌수 이하 각 관리를 징치하였다.
    동학군은 일단 고산봉(孤山峰)에 진을 친 후 사기가 충천하여 포(砲)를 쏘아대는 등 위세를 떨치자 천하가 모두 머리를 숙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동학군이 이곳에 설진(設陣)한지 3일만에 전봉준(全琫準)은 저 유명한 창의문(倡義文)을 천하(天下)에 공포(公布)했다.

    창 의 문 (倡 義 文)

    사람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과(君臣) 부자(父子)는 인륜(人倫)의 가장 큰 것이니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곧으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한 연후에야 이에 국가를 이루어 능히 무강(無疆)한 복(福)에 이르나니, 지금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인효자애(仁孝慈愛)하시고 신명성준(神明聖俊)하시어 어질고 정직(正直)한 신하가 익찬(翼贊)하여 총명(聰明)을 도우면 요순(堯舜)의 풍화(風化)와 문경(文景)의 정치를 가(可)히 몇 날이 안가서 바랄 수 있으리라. 지금의 신하들은 보국(報國)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녹위(祿位)를 탐하여 총명을 가리우고 아첨할 뿐 충성으로 간하는 선비를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나쁜 무리라 하여 안에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에는 백성에게 사납게 하는 관리가 많아 인민(人民)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변하여 들어가면 생(生)을 즐길 직업이 없고 나가면 몸을 안보할 계책이 없어 학정(虐政)이 날로 심하매 원성(怨聲)이 계속하여 군신(君臣)의 의리(義理)와 부자의 천륜(父子의 天倫)과 상하(上下)의 분별이 무너져 남음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사유(四維)(예의염치)(禮義廉恥)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이에 망(亡)한다 하였으니 방금 형세는 옛날보다 심(甚)함이 있는지라 공경 이하(公卿 以下)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자기 몸만 살찌우게 하고 자기 집만 윤택하게 할 계책을 하여 사람 뽑는 곳을 재물 생기는 길로 보며, 응시(應試)하는 장소를 교역(交易)하는 시장(市場)으로 보아 허다한 돈을 국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자기(自己)주머니를 채워 나라에 누적된 빚이 있는데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짓을 두려워 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하여 팔로(八路)가 어육(魚肉)이오 만민(萬民)이 도탄(塗炭)이라 관리의 탐학이 진실로 이러하니 어찌하여 백성이 궁(窮)하고 또 인(因)하지 않으리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깎이우면 나라가 쇠잔(衰殘)하나니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方策)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베풀어 오직 홀로 보전(保全)할 방법만 도모하고 한갓 녹위(祿位)를 도적질하니 어찌 그것이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보잘 것 없는 백성이나 임금의 토지에서 밥을 먹고 임금의 덕에 옷을 입으면서 가히 앉아서 국가의 위태한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팔로(八路)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億兆)가 의논하여 이제 창의(倡義)의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써 사생(死生)을 같이할 맹세를 하였으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나 절대로 겁내어 망동(妄動)하지 말고 각각(各各) 그 직업에 편안하여 한가지로 태평세월이 되기를 빌며 다 같이 임금의 덕화(德化)에 잠기면 천만 행심(千萬 幸甚)이라.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全琫準 孫華中 金開南)


    4. 해월신사의 통유 (海月神師의 通諭)

    이에 앞서 4월 2일에 신사(神師)께서 각지 두목을 청산(靑山)에 모이게 한 후 『혁명은 도문(道門)에 바른 법이 아니니 전봉준(全琫準)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잘못을 성토함이 옳을 것이라』하였다.
    이때에 도인 중에 전 승지 이건용(李建容)이 신사께 고하여 가로되 『전봉준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일어난 것이니 혁명이 비록 도문의 본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다 같이 이에 호응치 아니하면 이것이 도리어 국가와 민족의 죄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두목들도 『덕을 천하에 펴서 널리 창생을 건지는 것이 선생의 도(道)이니 만약 폭력으로서 도인행세를 한다면 이것은 사문에 난적이요 국가에 난민이라 우리는 이것을 즐겨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사의 뜻에 동조했다. 이에 신사께서는 전봉준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보냈다.

    경 고 문 (警 告 文 )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할진대 마땅히 효도할 것이요 백성의 곤함을 건지고자 할진대 반드시 어질 것이라. 효도를 느끼는 곳에 인륜이 가히 밝아질 것이요, 어진 것이 미리 우는 곳에 백성의 권리를 가히 회복할 것이니라. 더욱이 경(經)에 이르되 『현기(玄機)는 불로(不露)라 물위심급(勿爲心急)하라』하였으니 급심(急心)을 두지 말고 후일을 기다리라.


    이 무렵 각처의 도인(道人)들이 보국안민을 표방하고 서로 다투어 일어나매 신사께서 지시대로 좇지 않음을 근심하여 다음과 같은 통유문을 발하였다.

    통 유 문 (通 瑜 文)

    불망이 외람되게 선사(先師)의 전발지은(傳鉢之恩)을 받아 능히 이 도(道)를 널리 펴지 못하고 시인(時人)의 지목은 혹독하게 받아 화망(禍網)에 자주 걸리고 황곡(荒谷)에 피신하기가 지금 30년이라 지능(知能)의 부족(不足)함이 아니요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시(天時)를 기다리고자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이에 이르렀더니 근자(近者)에 들으니 도인들이 본분(本分)에 편안치 않고 정업(正業)을 힘쓰지 않으며 각각 당파(各各 黨派)를 세워 서로 성원(聲援)하여 심지어는 옛날 애자(애자)(애자:곁눈질로 설쩍 혈겨봄)의 원(怨)을 갚지 않는 바가 없어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밤낮의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생령(生靈)에 도탄(塗炭)의 근심을 미치게 하니 말이 이에 이르매 어찌 한심(寒心)치 않으리오. 전후포유(前後布諭)한 것이 비일비재(非一非再)어늘 번연(燔然)히 개오(改悟)하며 잠거수도(潛居修道)치 않고 일향집미(一向執迷) 하여 동악(同惡)을 상제(相濟)하면 이것은 역천배사(逆天背師)하는 것이라 단연(斷然)코 마땅히 명고제명(鳴鼓除名) 할 터이니 이와 같이 다 알아서 잘 준수(遵守)하여 어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으니라.



    5. 황용촌전투 (黃龍村戰鬪)

    4월 10일에 김해(金海)에서는 부사 조준구(趙駿九)의 인등을 빼앗고 사지(四肢)를 들어 성문 밖으로 내몰았다. 부사는 도임한지 3개월이 못되어 공금 4만여냥(4萬餘兩)을 늑식하였었다. 이 날에 고부(古阜)에서 기포(起泡)한 동학군은 금구(金溝)에 이르러 군기를 탈취하고 관사를 허물어 버렸다. 12일 새벽 무장(茂長)에 모였던 동학군 1만여명이 영광(靈光)에 이르러 군수 민영수(閔泳壽)를 징치(懲治)한 후 전운영(轉運營)에 불을 지르고 군기창고를 부수어 군기를 탈취한 후 전봉준(全琫準)은 『보국안민 체천행도(輔國安民 體天行道)』라는 여덟자를 쓴 큰 기를 세웠다. 이때에 『시천주(侍天主)』의 주문소리가 인근지역(隣近地域)의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졌다. 』 4월 14일 관군측(官軍側)에서도 도내 보부상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발(發)하였다.

    포 고 령 (布 告 令)

    다 알고 거행할 일은 이번에 동학의 무리가 세력이 굉장하게 번지는 것은 즉 정당한 백성이 아닌 난류배 들이라 누구나 분발하여 의리로써 쳐 없애지 아니하랴 마는 그러나 그 조처하는 방법은 오직 군령의 여하에 있는 것이요 반드시 제 맘대로 누구나 망동할 수는 없는 것이라. 이제 들으니 봇짐장사들이 영칙도 없는 일로 동학군을 잡는다 하고 무리를 지어 마을에 나돌면서 백성들 중에 좀 넉넉하게 사는 사람과,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는 사람과 무고한 촌백성들을 마구 동학의 무리라 하여 위협하고 침해하고 토색하고 행패하는 일이 간간히 있다 하니 이렇듯이 원성이 낭자함을 들을 때에 실로 놀라고 탄식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 봇짐장사들은 방금 나라 일을 거행하는 이때에 어찌 이럴 수 있겠느냐. 이것은 잡된 무리들이 빙자하는 것이므로 이에 영칙을 내리니 철저히 적발하여 누구를 물론하고 곧 결박하여 군문에 잡아오면 군율에 의하여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이 같이 알리어 영칙을 한 뒤에도 만일 다시 종전과 같은 버릇이 있으면 다만 법을 범한 자에게만 중벌을 내릴 뿐 아니라 금하니 아니한 그 두목도 배가의 죄를 면치 못하리니 잘 생각하여 소홀히 여기고 옆으로 달리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무렵 각지에서 풍설이 돌았는데 『 동학군은 달아나고 싶으면 달아날 『주(走)』자를 써서 손에 쥐이고, 날고 싶으면 날『비(飛)』자를 써서 손에 쥐인다』,『맑은 날에도 구름『운(雲)』자를 써서 날리면 비가 온다』,『지팽이를 가지고 칼로 쓰면 칼이 되고, 창으로 쓰면 창이 되고, 타면 말이 된다』,『 강령주문(降靈呪文) 여덟 자만 외우면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몸을 둘러싸고, 본주문(本呪文) 열세자만 외우면 죽었던 사람도 살아난다』,『무슨 일에 심고만 드리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에 진주영장 박희방(晋州營將 朴熙方)이 포군(砲軍) 수백 명을 거느리고 시천면대찰리(矢川面大刹里)에 이르러 대접주 백낙도(白樂道)를 결박하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이 곳에 너희 동학군이 어디 어디 있느냐. 모두 바른대로 고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대접주(白大接主)가 정색하여 말하기를『우리는 나라를 안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사람이요, 너희는 백성의 기름과 피를 빠는 관원이니 내 어찌 너희에게 보국할 사람을 죽이라고 내 입으로 불러 대일 수 있겠느냐? 내 차라리 수십만 동학군을 대표하여 죽으리라. 너희는 생각대로 하라』하였다. 이에 영장(營將)이 크게 노하여 백낙도(白樂道)에게 악형을 가하자 다리뼈가 부서졌다. 이때 백낙도가 크게 꾸짖어 가로대『이 무도한 놈들아. 죄 없는 백성을 이렇듯 악형을 하니 강약(强弱)이 부동(不同)하여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편모(偏母)시하에 불효를 면치 못하게 됨은 천추에 유한이요, 너희는 만년의 원수로다. 내가 너희 손에서 오늘 이 시간에 죽을지라도 나의 혼신은 기어코 너희의 원수를 갚으리라』하였다.


    드디어 16일에 영장 박희방(朴熙方)은 진주 군자정(晋州 君子亭)에서 대접주 백낙도(白樂道)를 참형에 처했다. 이 때 광풍이 크게 일어나며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고 우뢰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면서 큰 비가 퍼부어 영장(營將) 이하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랐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밤마다 영장의 숙소에 백낙도가 나타나 영장을 호령하므로 영장은 황겁하여 긴 칼을 방구석에 세워두고 촛불을 밝히고 잠을 자려해도 눈만 감으면 백대접주(白大接主)가 나타나 큰 소리로 호령하므로 영(營)에 있지 못하고 민가에 나가서 유숙하였다. 그러나 또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부득이 관직을 사직한 후 어부로 가장하여 남강 하류로 도망하였다. 이때에 충청도 구성(忠淸道 龜城)에서는 유치복 윤상건(兪致福 尹相建) 등이 주동이 되어 관가를 치고 현감 황후연(黃厚淵)을 쫒아냈다. 같은 날 동학군 7천여 명이 함평(咸平)에 이르렀는데 군수 권풍식(權豊植)이 관군을 시켜 관문을 엄하게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즉시 문을 부수고 당상에 올라가『우리는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민폐를 덜고, 보국안민하기 위하여 각 고을을 두루 다니던 차에 이 고을에 까지 이르렀다』고 선포하자 군중들은 모두 크게 환영하였다. 동학군은 곧 그 고을 수사(首史)를 잡아내어 엄하게 곤장을 쳤다. 이때에 함평에 이른 동학군의 병력은 기마대가 1백여 명이요, 그 중에는 투구 갑옷을 갖춘 사람도 많았는데, 기를 날리고 칼과 창을 휘두르며 포를 쏘는 등 기세가 매우 놀라웠다.


    4월 18일 조정(朝廷)에서 전교가 내리기를 『남m-2.gif죄인 조병갑형소 청갱형(南 m-2.gif 罪人 趙秉甲刑訴 淸更刑)』이라 하였다. 4월 20일자로 이설 · 이남규 · 이최영(李楔 · 李南珪 · 李最永) 등의 상소에 의하여 조정에서 다시 전교가 내렸는데『계속하여 올린 글월의 심각한 것을 보니 중론이 비등한 것을 알만하다. 다만 백성에게 가혹하게 거두어들인 민원을 말하였지마는 더욱 직무를 저버린 죄를 마땅히 징계하노니 전 호남전운사 조필영(前 湖南轉運使 趙弼永)을 정배하는 법을 시행한다』고 하였다.


    한편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사실상 그동안 동학군과의 전투를 기피해오다가 총제영중군 황현주가 정부의 명(命)으로 4백명의 군대를 끌고 초토사와 합류한다는 말을 듣고 4월 18일 전주를 출발하여 4월 21일에야 영광(靈光)에 도착했다. 홍계훈(洪啓薰)은 우선 동학군을 초무(招撫)하기 위하여 이효응 · 배은환(裵垠煥) 등 두 종사관으로 하여금 18일에 내린 윤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