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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검곡(금등골)

    명칭 검곡(금등골)
    설명 검곡은 해월신사께서 제2세교조로서 천도를 지키고 수...
    주소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방문자 수 3467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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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검곡은 해월신사께서 제2세교조로서 천도를 지키고 수행하신 곳이다. --


    검곡은 해월신사께서 제2세교조로서 천도를 지키고 수행하신 곳이다. 대신사 순도 이후 해월신사를 잡으려는 관군들에 의해 폐허가 된 이후 지금까지 산야에 묻혀 있어 해월신사가 사시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천도의 도맥이 이어진 성지로 기억되어야 할 곳이다. 이곳 검곡(금등골) 뒤쪽으로는 괘령산이 헌걸차게 솟아 있으며, 검곡으로 부터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해월신사께서 집강(이장) 일을 보았다는 마북마을이 있으며, 마북리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해월신사께서 농사일과 제지소 직공으로 일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던 터일마을과 올금당마을이 포항의 진산인 비학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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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해월신사(海月神師)의 내력(來歷)

    신사께서 용모가 우수하고 성품이 현명하시어 글공부도 또한 몽학(蒙學)을 지나 한문학입문이 경지(境地)에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해월신사께서는 17세 때에 제지소(製紙所)에 들어가 생계(生計)를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웃에 재산이 넉넉한 오씨(吳氏)라는 젊은 과부가 있어 해월신사의 용모가 거룩함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였다. 이때 해월신사께서는 「남의 덕(德)에 의하여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19세 때에 밀양 손씨(密陽 孫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신사는 28세 때에 경주 신광면 마북동(慶州 新光面 馬北洞)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신사의 공명정직하고 청렴결백함을 보고 중망(衆望)으로 천거되어 「집강(執綱)」(오늘날의 면장이나 이장을 일컬음)이라는 소임을 맡게 되었다. 신사께서 재임(在任)한지 6년만에 주민의 억울함을 덜어주고 아름다운 점은 표창하여 공덕이 많았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공로를 칭송하였다.


    33세 때 신사께서는 마북동 안쪽에 있는 검곡(劒谷)(금등곡)으로 이거(移居)하고 35세 신유년(辛酉年)에는 도를 대신사에게서 받았다. 신사께서 도문(道門)에 든 후 어김없이 매달 서너차례씩 대신사를 찾아 설교를 듣는다든가 도법(道法)을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문을 가리우고 명상과 극기(克己)로써 도를 닦았다.


    신사께서 하루는 홀로 생각하기를 「대신사께서는 독공하실 때에 한울님 말씀을 들었다 하시니 내 성력(誠力)을 다하여 한울님 마음을 움직이게 하리라」하고 엄동의 혹한을 무릅쓰고 매일 목욕재계를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몇달을 계속하자 물이 차지 않고 밤이 어둡지 않는 감이 있더니 문득 공중으로 부터 「양신소해(陽身所害)는 우한천지급좌(又寒泉之急坐)니라」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신사께서 매우 이상히 여겨 냉수욕을 끊었다.


    신사께서 이 말씀을 들은 후에 곧 대신사께 나아가 뵈옵고 어젯밤에 지낸 일을 말씀드렸더니 대신사께서 한참동안 묵념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어  『그대가 한울님 말씀을 들은 시간인 즉 내가 수덕문(修德文)을 읊던 시간이니 수덕문 가운데「양신소해는 우한천지급좌니라」하는 구절이 있으므로 나의 글 읊는 소리가 그대의 귀에 영감으로 들린 것이 분명하니라.』하였다.


    포덕 3년(임술, 1862) 1월에 신사께서 밤이 새도록 공부를 하는데 반 종지의 기름으로 21일밤을 지냈으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 때 영덕사람 이경중(李敬仲)이 기름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때에야 기름이 다 없어지는 것을 보고 이에 이적이 있음을 알았다.


    이 해 3월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으로부터 돌아와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은거하실 때에 신사께서 대신사의 안부를 알지 못하여 항상 궁금히 여기던 중에 문득 감동된 바 있어 박대여의 집을 찾아 대신사를 뵈었다고 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이와같이 신사께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 전념하여 많은 이적(異蹟)을 남겼다.


    이 때 신사께서 대신사로부터 「포덕에 종사하라」는 명교를 받고 집에 돌아와 곧 포덕에 힘쓰고자 하였으나 양식과 돈이 없어 걱정하던 중에 친구 김이서의 도움을 받아 영해, 영덕, 상주, 흥해, 예천, 청도 등지를 순회하여 많은 도인을 얻으니 「검악포덕(劒岳布德)」이라는 말이 퍼져 이름이 넓게 알려졌다. 이와 같이 강도(講道)와 설법(說法)으로 진리를 천명하며 순회할 때에 10월 5일밤 신사께서 묵념하더니 제자들에게 「어제밤에 마북동 친구인 이상춘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하므로 제자들이 의아하여 가서 알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10월 26일에 신사께서 다시 제자를 데리고 흥해로 가실 때의 일이다. 서촌 종숙(西村 從叔)의 집에 들렀더니 종수가 급병에 걸려 매우 위급한 지경에 있었으므로 신사께서 묵념한 후 손으로 병인(病人)을 어루만지니 병이 곧 나았다. 이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신사께서 대답하시되 「내 또한 알지 못하노라. 이것은 천리의 소감이니 자경자중(自敬自重)함이 가(可)하니라」하였다.


    신사께서 포덕을 많이 하여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이 해 10월에 경주 관속(官屬) 30여명이 신사를 체포하려고 하므로 신사께서 생삼 한 묶음으로 그들을 잡아 결박한 후에 좋은 말로 효유하여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검곡에 큰 장사(壯士)가 났다하여 관리배(官吏輩)의 침해가 끊어졌다.


    11월에 신사께서 대신사께 품(稟)하여 각지에 포덕접소(布德接所)를 정하고 또 대신사의 명교(命敎)를 받아 각처 도인의 수도상황을 사찰한 후로 부터 찾아오는 도인이 끊이지 아니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가진 해월신사께서 포덕 4년 7월 23일 대신사로 부터 북접주인(北接主人)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동년 8월 14일에 대신사로 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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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 포항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출발하는 550번 신광면행 버스→마북에서 하차
    :: 포항 고속버스 터미날→죽도시장 오거리 또는 죽도파출소 앞→550번 신광면 행 버스→마북에서 하차


    자가용 이용


    :: 경부고속국도 부산방면→경주IC(TG)→7번국도→28번국도→7번국도→흥해사거리
    →신광면 방향 좌회전→만석리 만석교를 지나 만석삼거리(신광온천)에서 좌회전→마북리 입간판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회전→마북

    :: 경부고속국도 서울방면→대구 도동JC→대구,포항고속국도→서포항(기계)IC→31번국도 좌회전→68번지방도 좌회전→만석리 만석교를 지나 만석삼거리(신광온천)에서 좌회전→마북리 입간판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회전→마북

    :: 용담정 찾아가는길 안내도를 참조하여 경주시민운동장 앞 금장교를 지나 30여미터 가면 68번지방도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우회전→안강→신광→만석리 만석교를 지나 만석삼거리(신광온천)에서 좌회전→마북리 입간판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회전→마북
    마북동에서


    :: 마북동 버스 종점에서 마을 사이길을 따라 올라가면 개울이 나온다. 개울둑을 따라 계속올라가면 화장실이 있는 공터(여기까지 승용차는 갈수 있다.)가 나온다 좌측편 저수지 둑쪽으로 올라서면 임도가 나온다. 저수지 상류에서 교량과 길이 하나가 된다.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사방댐이 나오고 사방댐 좌측에 생가터가 있다. 마북동에서 검곡 생가터까지 도보로 40여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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