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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9년(1868) 3월에 신사께서 예천(醴泉)으로부터 영양 일월산(英陽 日月山) 밑 죽현리(竹峴里) 용화동(龍化洞), 댓치에 이거(移居)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고 짚신을 삼으면서 수도(修道)에 전력하였다. 이때에 도인(道人) 김용여(金龍汝)의 특성 5백냥(百兩)으로 신사의 가족과 대신사의 유가족들의 생활을 도운 일이 있었다. 포덕 10년 (1869) 2월에 양양(襄陽) 사람 최혜근, 김경서 두 사람이 찾아와 신사를 찾아 뵙고 『생등(生等)이 입도(入道)한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도닦는 법을 알지 못하여 선생을 찾아왔나이다』 하므로 신사께서 그 연원(淵源)을 물으니 『공생(孔生)이라는 사람이 입도를 권하기 때문에 그 말에 의하여 도에 참여한 후 주문을 외울 뿐이요 절차는 알지 못하나이다』 하므로 신사께서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도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두 사람이 신사께 향하여 양양포덕(襄陽布德)을 역설하고 기어이 모시고 가기를 청하므로 신사께서 또한 오래 전부터 그 방면에 뜻이 있었으므로 박춘서를 데리고 양양에 이르러 그 곳에서 3월 10일 대신사의 향례를 지낸 다음 30여호를 포덕한 후 그 이듬해(庚午)까지 양양 산중에 은거(隱居)하면서 치성(致誠)과 송주(誦呪)로 일과를 삼았다. 이 해 10월에 공생(孔生)이라는 사람이 상주 동관암(尙州 東關岩)에서 대신사의 가족을 달래어 영월 소밀원(寧越 蘇密院)으로 이거케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사께서 홀로 근심하되 『세정(世貞)이 내 말을 듣지 않고 험난한 이 때에 사람의 말을 함부로 좇으니 반드시 장래가 좋지 못하리라』 하고 염려하였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라 오직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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