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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정선 무은담

    명칭 정선 무은담
    설명
    주소 강원 정선군 남면 문곡리
    방문자 수 2471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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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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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侍)」자(字)의 정의(定義)




    포덕17년(1876) 4월 5일에 신사께서 단양 자택에서 제 16회 대신사 득도향례(得道享禮)를 지내고 인제도인 김연호(金演鎬)의 집에 이르러 다시 치성식(致誠式)을 지낼 때에 김연국(金演局), 김종여(金宗汝), 김경식(金京植), 김관호(金寬浩), 이은보(李恩甫), 이윤희(李允喜), 장춘보(張春甫) 등 20여명이 참석하였다.


    포덕19년(1878) 4월에 신사께서 김연국을 대동하고 경주군 최형오(崔亨悟), 신사의 재종제(再從弟)의 집에 이르러 제18회 대신사 득도향례를 지내고 매일 밤 대신사의 묘소를 향하여 요배(遙拜)하였다.
    그 해 7월 25일 신사께서 접소(接所)를 정선 유시헌(劉時憲)의 집에 정하고 제자들에게 개접(開接)의 글을 발(發)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도에서 개접이라 이름하는 것은 결코 유가(儒家)에서 문사(文士)들이 모여 시부(詩賦)를 희롱하는 예(例)가 아니요 대신사 재세시(在世時)에 있어 기수(氣數)의 질대성쇠(迭代盛衰)하는 이치를 미루어 이미 개접(開接) 파접(罷接)의 규례(規例)를 말씀한 바 있었던 것이니 그러므로 내 이제 접(接)을 열고 도(道)를 강(講)하는 것은 전혀 선생의 뜻을 이음이라.』 하였다. 대개 개접(開接)이라 함은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각지 도인이 집회하고 그 기간 내에 진리를 연구한 뒤에 기간이 끝나면 접을 파(罷)하는 것으로 개접의 제도는 이에서 비롯하였다. 이 때에 신사께서 도를 강(講)하여 말씀하시기를


    『제군(諸君)은 「시(侍)」자(字)의 뜻을 아는가? 사람이 포태(胞胎)될 때에 곧 「시(侍)」자(字)의 뜻이 성립되는가, 낙지이후(落地以後)에 처음으로 시천주(侍天主)가 되는가? 입도(入道)한 날에 「시」자의 뜻이 생기는가?』
    『제사지낼 때에 위(位)를 설(設)하되 벽(壁)을 향함이 가(可)한가, 나를 향함이 가(可)한가?』
    『사람의 행동을 마음으로써 함이 가(可)한가, 기운으로써 함이 가(可)한가? 또 마음이 기운을 부리는가, 기운이 마음을 부리는가?』
    하고 『제군(諸君)은 그 뜻을 연구하라』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제자들로 하여금 연구문제를 주어 그 의혹을 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대신사의 주문 삼칠자는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을 말한 것이요, 수심정기(守心正氣) 네 글자는 천지운절(天地隕絶)의 기운을 보(補)한 것이며, 무위이화(無爲而化)는 만물성도(萬物成道)의 이치를 가르침이니, 그러므로 도(道)는 높고 멀고 행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요 삼칠자로 만물화생의 근본을 알고, 무위이화로 만물성도의 이치를 깨닫고, 수심정기로 천지태화(天地泰和)의 원기(元氣)에 접하면 도에 거의 이르렀다 할지니라.』『우리 도(道)의 대운(大運)은 천황씨(天皇氏)의 근본원리를 회복한 것이니 그러므로 무극지운(無極之運)이라 하는 것이니라. 천황씨라 함은 선천개벽(先天開闢)의 시조(始祖)를 의미하여 말한 것이요, 대신사 스스로 천황씨라 하심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조로 자처(自處)한 것이니 도 닦는 자 선천의 흐린 기운을 버리고 후천신생(後天新生)의 맑은 기운을 잘 기르면 은은(隱隱)한 총명(聰明)이 자연한 가운데서 화(化)해날지니라.』

     
    『우리 도는 넓으면서도 간략히 말하면 정(精)과 일(一)이니 정일(精一)은 성경신(誠敬信)이 아니면 능(能)치 못하리라. 세상은 다 허위(虛僞)와 추잡(醜雜)에 빠지고 사람은 다 간교(奸巧)와 음해(陰害)에 젖었는지라 정일(精一)의 도(道)로 천황씨의 본심(本心)을 회복하지 않으면 누가 보국안민을 말하리오.』 모든 제자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서로 난의(難疑)를 문답(問答)한 후에 파접(罷接)하였다.

    2. 심시정(沈時貞) 등과 함께 한 대신사의 향례(享禮)

    포덕20년(1879) 3월에 신사께서 강시원(姜時元)과 함께 청송(靑松)에 이르니 도인 심시정이 신사를 찾아와 뵙고 말하기를 『대신사의 기일(忌日)이 박두하였으므로 약간의 제수(祭需)를 갖추어 왔읍니다』하였다. 신사께서 『이 근경(近境)에 제사 지낼만한 마땅한 곳이 없고 또 연일 큰 비가 오니 염려로다』하고 곧 길을 떠나 90리를 가니 날이 저물어 부득이 그 사위집에 들었다. 이튿날인 즉 곧 대신사의 기진(忌辰)이라 심시정이 준비해 온 제물(祭物)로 향례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나 영서(嶺西)로 향하였다.


    영월군(寧越郡) 거석리(巨石里) 노정근(盧貞根)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게 되었는데 이 날 밤에 신사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적에 정신이 황홀하고 혼 (魂 )이 몽롱하여 그 향할 바를 알지 못하더니 문득 대신사의 모습이 보였다. 본즉 대신사께서 검은 관(冠)을 쓰고 삼층대(三層臺) 위에 계셨는데 몸에는 푸른 옷을 입고 좌우(左右)에 동자(童子) 4,5인이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는 한 백발노인(白髮老人)이 꿇어 앉았고 또 한 중이 곁에 모시고 서 있었다. 신사께서 대(臺) 밑에서 대신사를 배알(拜謁)하니 대신사께서 신사를 불러 대(臺) 위에 오르라 하였다. 그리고는 신사의 남루한 의복을 보더니 옆 사람을 돌아보며 『그대들의 옷은 이렇듯이 화려한 데 경상은 저렇듯이 곤궁하니 천리(天理)의 어김이 심하다고 하자 좌석에 앉은 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대신사께서 다시 일어나 대 위에 배회할 때 신사께서 대신사의 허리띠를 보니 세끝으로 서로 이었으므로 그 이유를 여쭈어 보자 대신사께서 「알 바 아니라」하였다.


    이윽고 대신사께서 북문(北門)에 이르더니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이라는 일곱자를 문 위에 크게 쓴 후에 세번을 외우고 북문(北門)을 세번 치자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이에 신사께서 북문(北門)을 쳐보니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그 까닭을 여쭈어 보았더니 대신사께서 『후일(後日)에 반드시 소리 있으리라』말씀하였다.


    신사께서 놀래어 깬 후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시원(時元)을 시켜 그 내용을 대략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에 신사께서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갑둔리(甲遁里)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이르자 근처 도인이 기도식을 행하기를 청하므로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고 이 해 4월에 대설법(大說法)을 행하였다.


    11월 12일에 조시철(趙時哲)의 집에서 치성식(致誠式)을 거행한 후 강시원, 유시헌 등에게 말씀하기를 『일찍 대신사께서 항상 포덕에 주의하사 우리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천도(天道)의 운(運)이 북방(北方)에 있고 우리 도의 발전할 수명(數命)이 옹치격(雍齒格)으로 되어 있으므로 너희는 일을 할 때에 이 격(格)을 잃지 말라 하셨으니 우리는 항상 스승의 교훈을 잊지 말 것이라』하였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정선군청홈페이지→문화관광포털→종합관광안내→교통정보→시내버스→남면방면버스→남면-문곡리→무은담
    자가용 이용


    :: 영동고속도로→하진부 교차로→59번국도→38번국도(남면)→문곡리→무은담

    :: 경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제천IC→38번국도(영월)→38번국도(남면)→문곡리→무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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