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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3.1운동유적지]  보성사터

    명칭 보성사터
    설명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주소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방문자 수 1442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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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천도교와 3.1독립운동 ◇



    1.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인쇄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新文館) 인쇄소에서 조판한 후 천도교의 보성사 인쇄소로 넘겨졌다. 보성사 인쇄소는 2월 20일부터 사장 이종일(李鍾一), 총무 장효근(張孝根), 감독 김홍규(金弘奎), 직공 신영구와 최남선 등 다섯 사람이 극비리에 밤에만 인쇄하여 25일까지 2만 5천매를 인쇄하고, 거리가 먼 천도교의 지방 교구에는 우선적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의암상사와 협의하여 27일 밤에 1만매를 더 인쇄했다(이종일은 경찰신문에서 27일에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만 인쇄했다고 거짓 진술했다. : ‘이종일 비망록’ 참조).


    그런데 27일 밤에 비밀리에 인쇄할 때 종로경찰서의 악명높은 한인(韓人) 고등계형사 신승희(申勝熙)가 근처를 지나다가 밤중에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들이닥쳤다. 사태를 알아차린 그에게 이종일 사장은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한테 갑시다』하고 애원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는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하였다. 이종일은 단숨에 의암성사에게 달려가 위급을 고하자 의암성사는 선뜻 5천원 뭉치를 주면서 가져다주라고 하였다. 거금을 받아쥔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사라졌다.


    다행히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인쇄를 마친 후 이병헌(李炳憲) · 신숙(申肅) · 인종익(印鍾益)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운반케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리어카에 싣고 재동(齋洞)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 검문을 당했으나 마침 정전(停電)으로 가로등이 꺼져 있어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종일은 당시 신축 중인 경운동 대교당 마당 구석에 있는 창고 같은 집에 임시 기거하고 있었는데 독립선언서를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한편 고등계형사인 신승희는 비밀이 탄로되어 5월에 헌병대에 체포되자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도 일말의 민족적인 양심이 있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비밀을 누설치 않음으로써 다행히 3.1독립운동은 성사될 수 있었다.

    2. 독립선언서의 서명 및 발송

    독립선언서의 서명을 위해 27일 밤 최린의 집에 각 종단 대표가 모였다. 천도교의 최린을 비롯해서 기독교측에서 이승훈 · 이필주 · 함태영, 불교측에서 한용운, 개인자격으로 최남선이 참석하여 제일 먼저 천도교측을 대표하여 의암성사 손병희, 두 번째는 장로교를 대표하여 길선주, 세 번째는 감리교를 대표하여 이필주, 네 번째는 불교를 대표하여 백용성을 쓰고 그 다음은 가나다 순으로 기명하기로 합의하고 종단별로 모아온 인장으로 기명 날인하였다.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하루 앞둔 28일 새벽부터 배포되었다. 선언서 배포를 책임진 오세창은 신표로 청색 헝겊(혹은 종이)을 주어 사람을 보내면 이종일은 이를 확인한 후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전국 각지에 발송하였다. 천도교측에서는 인종익 · 안상덕 · 김상렬 · 이경섭이, 기독교측에서는 김창준 · 이갑성 · 오화영 · 함태영 등이 각기 담당지역을 맡아 전국 각처로 배포하였고, 서울시내는 주로 학생들이 배포하였다. 이와 별도로 천도교측의 임규(林圭)는 27일 일본에 보내는 통고서를 가지고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 일본 동경에 도착한 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의 김지환(金智煥)이 가지고 3월 1일 서울을 출발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상해에 있는 현순(玄楯)에게 보내어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의암성사와 그 참모진의 기획 아래 천도교가 전국 교구의 조직망을 가동하고 운동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사실상 천도교측이 총력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3. 의암성사의 유시(諭示)

    이와는 별도로 중앙총부는 2월 하순 일부 지방의 교직자들에게 상경토록 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토록 통지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25일경 오영창을 비롯해서 곡산· 철산· 진남포· 정주교구장 등이 상경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지방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3월 1일의 거사를 위해 만반의 준비가 극비리에 진행되는 가운데 2월 28일 의암성사는 마지막으로 춘암상사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문을 내려 교단의 중책을 맡아 모든 일을 교회간부와 함께 힘써 발전시켜 나가도록 당부하였다.

    諭示文


    不得이 吾敎의 敎務를 座下에게 專委함은 已爲十年이라 更說할 必要가 없거니와 今日 世界種族 平等의 大機運下에서 我東洋種族의 共同幸福과 平和를 爲하여 終始一言을 ?히 不能하므로 玆에 政治方面에 一時 進參케 되었기 如是一言을 伸托하노니 惟 座下는 幹部諸人과 供히 敎務에 對하여 益益勉勵하여 小勿妄動하고 我 五萬年 大宗敎의 重責을 善護進行할지어다.


    이것은 의암성사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춘암상사로 하여금 3.1독립운동 후 의암성사를 대신해서 천도교의 중책을 맡아 더욱 발전시켜나가기를 당부하였던 것이다. 사실 춘암상사 박인호 대도주를 3.1운동의 민족대표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도 그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단 안팎의 일을 정리한 의암성사는 다음날의 거사를 앞둔 28일 밤 가회동 자택에 민족대표 일동을 초치하여 마지막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천도교 대표로 최린을 비롯한 12명, 기독교 대표로 이승훈을 비롯한 10명, 불교 대표로 한용운 1명 등 23명이 참석했다. 의암성사는 간단히 인사를 통하여  『금번 우리의 의거는 위로는 조선(祖先)의 신성유업(神聖遺業)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 만대의 복리를 작흥(作興)하는 민족적 위업입니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諸賢)의 충의(忠義)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3월 1일의 거사에 대해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첫째로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에서 오후 2시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군중심리에 의해서 폭력사태나 불상사가 일어나 일경에게 흉폭한 강압수단의 빌미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문을 보내는 것은 이갑성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셋째로 민족대표 전원이 모여 독립선언을 한 후 일제 경찰에 체포당하더라도 피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행동을 통일하기로 하였다.

    4. 지하 독립신문의 발행

    천도교는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영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지하 독립신문의 발행까지도 추진하였으니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과거 [제국신문(帝國新聞)]을 발행했던 언론인으로 신문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곧 전개될 3.1독립운동의 취지와 운동의 전개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암상사와 상의하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행하기로 하고 보성학교 교장인 윤익선(尹益善)을 발행인으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서명한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 [천도교회월보] 발행인 이종린(李鍾麟)으로 하여금 창간호의 원고를 집필토록 하여 보성사에서 김홍규 감독에게 독립신문 1만 5천부를 3월 1일 오전에 인쇄하여 배부케 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독립신문] 제1호가 간행되자 일경은 이날 오후 6시에 윤익선을 체포했다.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이날 밤 경성서적조합 서기 장종건(張倧鍵)과 논의하여 독립신문을 프린트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하고 3월 2일 간행비 20원을 장종건에게 전했다. 그래서 이종린은 관훈동 서적조합에서 독립신문 제2호, 제3호, 제4호까지 발행하였으나 역시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독립신문의 내용을 보면, 제1호는 주로 민족대표들의 거사에 임하는 순국결사의 결의를 담고 있다. 제2호는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관련기사와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였다. 특히 가정부(假政府), 즉 임시정부의 조직계획을 예고하는 기사가 주목을 끈다. 제3호는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상황을 계속 보도하고 있으며, 제4호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던 문서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후 독립신문은 천도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장종건의 주도 아래 장소를 옮겨다니면서 계속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 발행 후 경향 각지에는 이에 고무되어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 [조선민보(朝鮮民報)], [국민신보(國民新報)], [혁신공보(革新公報)] 등이 연달아 간행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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