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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적지(牛禁峙戰蹟地) >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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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유적지]  우금치 전적지(牛禁峙戰蹟地)

    명칭 우금치 전적지(牛禁峙戰蹟地)
    설명 동학농민군의 최대 격전지였던 장소이다.
    주소 충남 공주시 금학동
    방문자 수 3910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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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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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387호 충남 공주시 금학동 327-2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의 최대 격전지였던 장소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의 접주인 전봉준이 군수의 학정을 응징하기 위하여 1천여명의 농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민란이 계기가 되었다. 각처에서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일대를 휩쓸면서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고, 집강소라는 일종의 민정기관을 설치하여 폐정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년 9월 동학군의 2차 봉기 때 동학군은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를 공격하여 중부지역의 거점으로 삼고자 공주진공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향후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싸움이었다. 논산에 머물면서 작전을 지휘하던 전봉준은 북접통령인 손병희와 함께 공주를 공격목표로 삼고 10월 하순부터 공주지방에 진출하기 시작, 10월 23일~11월 10일까지 이인, 효포, 태치, 대교, 우금치 등지에서 관군과 일군을 맞아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11월 8일부터 수일동안 우금치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이다 공주진출에 실패하고 전봉준은 순창에서 재기를 기약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공주결투의 규모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약 3만명의 동학군과 관군 2,500, 일군 200명 정도가 싸움을 벌였는데 수적으로는 동학농민이 우세하였으나 일∙관군의 연합군은 훈련을 받은 정예군인데다가 근대무기로 무장하였으므로 동학군의 패배로 끝났다. 40여차례의 접전끝에 끝이 났는데 남은 동학군은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해월신사(海月神師)와 동학혁명(東學革命)

     

     

    포덕 35(1894) 15일에 신사께서 청산군 문암리(文岩里)에서 설법(說法)하였는데, 113일에 호남(湖南)에서온 도인(道人)으로부터 고부접주 전봉준이 도중을 거느리고 벌써 고부군을 격파한 후 장차 대거(大擧) 북상하리라는 급보를 받았다. 전봉준은 고부 사람으로 자()는 명숙(明淑)이며 어려서부터 담력(膽力)과 기백(氣魄)이 있고 학식(學識)과 무예(武藝)를 겸하였으며 체소(體小)하지만 강기(剛氣)가 있어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전봉준은 30세 때에 동학에 들어온 후 수도에 지극하여 접주(接主)의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시국(時局)을 개혁하고자 사방을 주유(周遊)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데 힘썼다. 당시의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은 탐학무도(貪虐無道)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거기에다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과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의 가혹한 토색(討索)이 겹치게 되니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은 여간이 아니었다.

     

    만석보의 물 감독으로 있던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全昌赫)은 지방민(地方民)을 이끌고 그 부정(不正)들을 시정(是正)해 줄 것을 누차 요구하였으나 도리어 군수 조병갑은 전창혁을 난민(亂民)으로 몰아 곤장을 쳐서 죽였다. 이에 전봉준의 울분은 말할 것 없고 지방민의 노여움도 그 도()를 더하게 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민의(民意)에 좇아 다시 수차 진정하여 보았으나 아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병갑의 탐학과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가기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정신(東學精神)에 불타는 전봉준은 이에 뜻을 결단하여 자신과 송두호 등 20여명 정종혁(鄭宗赫), 송대화(宋大和), 김도삼(金道三), 송주옥(宋柱玉), 송주성(宋柱成), 황홍모(黃洪模), 최흥열(崔興烈), 이봉근(李鳳根), 황찬오(黃贊五), 김응칠(金應七), 황채오(黃彩五), 이문형(李文炯), 송국섭(宋國燮), 이성하(李成夏), 손여옥(孫如玉), 최경선(崔景善), 임노홍(林魯泓), 송인호(宋仁浩) 등이 서명(署名)한 사발통문을 신호로 동지규합에 힘쓰는 한편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군기고(軍器庫)와 화약고(火藥庫)를 점령하고 군수와 아부배(阿附輩) 등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숙청한 후 전주를 함락시키고 나아가서는 경사(京師)로 직충(直衝)할 계획을 짜서 추진시켰다. 준비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전봉준은 각 포()에 포고문(布告文)을 발하고 드디어 110일을 기하여 도중(道衆)을 본부(本部) 마항시(馬項市)에 모이게 하자 발문(發文)을 보고 모인 사람이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전봉준은 그 곳 감나무 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불법(貪虐不法)한 일과 백성의 재산을 약탈한 사실 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전봉준은 대신사(大神師)의 신원(伸寃)이 이번 거사(擧事)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인들은 대신사의 원()을 펴게 하고 지목에서 벗어나 고통을 면하고자 하던 마음이 간절하던 때였으므로 전봉준의 연설을 듣고는 피가 끓고 의분(義憤)이 동()하여 즉시 죽창(竹槍)과 농기(農器)를 들고 고부군을 습격하게 되었다. 이때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전주방면으로 도주(逃走)하여 버리고 혁명군(革命軍)은 무기고(武器庫)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한 후 서리(胥吏)들을 문초하여 수세창곡(水稅倉穀)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만석보(萬石洑)의 신보(新洑)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부에서는 전라감영의 급보를 받고 215일 고부군수 조병갑을 정죄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감봉하는 동시에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를 안핵사에 임명하여 뒷 수습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발령(發令)을 받고도 일삭(一朔)이나 늦게 고부읍으로 내려온 이용태는 역졸(驛卒) 8백 명으로 하여금 각 부락을 다니며 이번 거사(擧事)에 참가하였던 사람을 모조리 색출한다고 하면서 수십 명씩 묶어서 구타 구금함은 물론이요 혹독한 형벌과 재산 강탈, 부녀능욕(婦女凌辱), 방화 (放火) 등을 기탄없이 자행하였다. 그러면서 이용태 자신은 전주 한벽당(寒碧堂)에서 기생(妓生)과 주연(酒宴)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민중의 고통과 원한은 날로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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