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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일본 사람들도 이용구를 동학의 수령인줄만 알고 있다가 동학이 현도되어 천도교주가 손병희란 것을 알게 되자 이용구의 배후에는 손병희가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로부터 성사를 더욱 위대하게 생각하였다. 한편 대한제국에서는 전에 손병희 명의로 보낸 비정탄핵문을 받고 성사를 체포코자 하던 차에 천도교 대교주가 손병희란 것을 알게 되자 세계공법에 비추어 종교는 보호할지언정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단념하였다.
천도교 선포에 따른 일차적 준비를 끝낸 의암성사는 약 5년 동안의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다음해, 즉 포덕 47년 1월 5일 권동진 · 오세창을 대동하고 부산을 경유하여 1월 2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 부산항에서 서울까지 철도 연변과 이르는 곳마다 4만 여명의 교인이 나와 의암성사를 환영하였으며 이용구 · 송병준 · 김연국도 각기 부산, 대전, 대구에서 의암성사를 영접했다. 서울에 도착한 의암성사는 2월 1일 종령(宗令) 제1호 공포를 시작으로 중앙총부의 조직에 착수하여 2월 10일 종령 5호로 천도교대헌(總 36章 附則)을 공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천도교시대를 개막했다. 대헌에 따라 천도교의 조직체계는 대도주를 정점으로 원직(原職)과 주직(住職)의 이원체제로 구성되었다. 원직은 천선(天選) · 도선(道選) · 교선(敎選)의 세가지인데, 천선직으로는 성도사(小師) · 경도사(敬道師) · 신도사(信道師) · 법도사(法道師)의 사과(四科)를 두었다. 도선직은 종래의 육임(六任)을 그대로 따랐고, 교선직은 포덕 연비에 따라 교인 10만명 이상은 대교령(大敎領), 2만명 이상은 중교령(中敎領), 4천명 이상은 소교령(小敎領)으로 하였다. 다음으로 주직인 중앙총부 직제는 고문실(顧問室) ·현기사(玄機司) · 이문관(理文觀) · 전제관(典制觀) · 금융관(金融觀) · 서응관(庶應觀)으로 구성하고 대교구장은 대교령으로 임명했다. 모든 교인에게는 교빙(敎憑)을 발급하였으며 천일기념식과 시일의 성화회(聖化會)는 오전 10시에 시작하도록 하였다. 또한 같은 날 종령 7호로 성도사(小師) 김연국을 비롯하여 원직(原職)으로 교장(敎長) 박인호 외에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 육임을 선임 발표한데 이어 종령 8호로 주직(住職)인 중앙총부 임직원을 선임 발표하였다. 초대 중앙총부 주직으로는 현기사장(玄機司長)에 김연국, 진리과장(眞理課長)겸 우봉도(右奉道)에 양한묵, 좌봉도(左奉道)에 임순호, 고문과장(顧問課長)에 박인호, 이문관장(理文觀長)에 오세창, 금융관장(金融觀長)대리에 김현구, 서응관장(庶應觀長)대리에 조동원, 전제관장(典制觀長)에 권동진 등을 임명했다. 이어서 2월 16일에는 천도교중앙총부를 다동(茶洞) 홍문서(弘文署)골(현재의 무교동)에 설치하여 현판식을 거행하고 의암성사가 친히 대도주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중앙총부 정문에는 천도교를 상징하는 궁을기(弓乙旗)를 게양하였다. 이 궁을기는 의암성사가 일본에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후 권동진 · 오세창 · 양한묵 3인에게 대신사 득도 당시 한울님에게서 받은 궁을영부를 모형으로 하여 제작하도록 지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천도교는 동학시대의 전근대적 신앙공동체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종단으로서의 조직체계와 의례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중앙조직이 갖추어지자 3월 3일 종령 15호를 발하여 전국의 280여개 지방교구를 지역별로 주관하는 72개 대교구를 조직 발표함으로써 지방조직까지 완료했다. 대교구에는 제1 대교구에서 제72 대교구까지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교구명칭으로 정하고 제1 대교구장 대리에 신광우(申光雨)를 비롯하여 각기 해당 교령(敎領)으로 하여금 교구장 대리를 임명하였다. 이에 의암성사는 설득을 포기하고 9월 5일 종령 41호로 교회와 일진회를 분리하는 교정분리(敎政分離, 이를 당시 ‘敎會分析’이라 했다)원칙을 천명함과 동시에 9월 6일 [만세보(萬歲報)]에 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네 가지 기준사항을 공포했다. 의암성사는 이제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인 9월 21일 이용구 이하 일진회를 추종하는 두목급 배교친일분자 62명을 일괄 출교처분하여 일진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였다. 그렇게 되자 이용구 일파는 그들이 공언한대로 12월에 시천교(侍天敎)라는 친일종단을 따로 만들어 별립했다. 그리고 이용구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당수 교인들이 이들을 따라 시천교에 합세함으로써 천도교의 교세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용구 일파를 출교시킴으로써 천도교 교단은 재정적으로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암성사가 일본 망명시 교단의 동산(動産) · 부동산(不動産)을 막론하고 모든 재정을 엄주동에게 맡겨 관리했는데 이 사람 역시 배교하여 이용구 일파에 가담하면서 교단의 재정 일체를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교단은 재정적 공동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용구는 한때 “손병희도 석달 안에 굶어 죽을 것”이라는 악담을 서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암성사는 한번 크게 웃으며 “이제부터 우리 천도교는 잘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목베어 죽은 귀신(대신사), 목매달려 죽은 귀신(해월신사), 이 두 귀신의 감화와 영우(靈佑)로 이렇게 발전하였는데 이제 굶어 죽은 귀신까지 세 귀신이 힘을 합하면 더 잘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가 말해주듯 당시 교단의 재정상태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좌절할 의암성사가 아니었다. 먼저 교단의 조직정비에 나서 12월에 전국의 72개 대교구를 통폐합하여 그동안 대교구 명칭으로 사용하던 일련번호를 폐지하고 해당지역의 지명을 붙여 23개 대교구로 개편함과 동시에 교화행정을 뒷받침할 처무규정을 제정하여 기강을 확립했다. 당시 23개 대교구는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대교구장) 이와 아울러 이 해 2월 16일에 의암성사는 대신사와 해월신사의 신원청원(伸寃請願)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정부는 포덕 48년(1907) 7월 11일에 교조 수운대신사와 해월신사에 대한 죄안해제(罪案解除)를 의결하고 7월 17일 관보에 게재하였다. 이로써 천도교는 공식적으로 창도 48년만에 종교로 공인받게 되었다. 9월에는 중앙총부를 다시 중서 정선방 면주동(中署 貞善坊 綿紬洞) 2통(統) 6호(戶)로 이전하였다. 6월에는 강습규칙을 제정하여 서울을 비롯한 각 도, 각 군에 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중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는 한편 7월에는 전국 각 교구 성화실에 야간강습소를 설치하여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전체 교인을 참여케 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전력했다. 10월 28일에는 대신사를 비롯해서 창도 이후 순도한 수십만 교인들의 이름을 나란히 기록하여 남대문 밖 영수산(靈壽山)에서 합동위령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교단은 한때 이용구파 이탈로 인한 재정적 타격을 극복하고 오히려 재정자립기반을 확고히 정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천도교를 근대적 종단으로 쇄신 성장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와 아울러 교세가 날로 늘어나자 포덕 51년 9월 1일 종령 61호로 가정규칙(家庭規則)과 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정하였다. 전문 2장 9조로 된 이 규칙에 의하면 가족 중 한 사람만 입교한 경우는 교호(敎戶)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개인이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교단의 명예를 훼손하였을 경우는 참회율에 따라 시일 성화회에서 참회식을 거행하며, 재범시에는 교인자격을 없앤다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민중계도를 위해 일간지 [만세보(萬歲報)]의 간행을 서두른 끝에 5월 10일 발행허가를 얻고 6월 17일 창간 제1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당시는 을사조약이 이미 체결되어 경무청(警務廳)에 일본인 고문이 검열권을 갖고 있던 때라 ‘우준배(愚蠢輩)의 전설(傳說)과 항간(巷間)의 유언(流言)’을 게재하지 말라는 전제로 발행이 허가되었다. 이것은 당시 자주독립을 주창하는 애국단체라든가 우국지사의 소식이나 이야기를 차단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만세보]는 사장에 오세창, 주필에 이인직(李人稙), 발행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그 외 권동진 · 장효근 등이 팀웍을 이루고 있었고, 서울 남서회동(南署會洞) 85동 4호(현재 中區 會賢洞)에 새 인쇄시설을 갖춘 보문관 사옥이 있었다. [만세보]의 창간사에 의하면 만세보는 우리 민족의 교육과 지식계발을 위하여 영리나 명예를 초월해서 장래 우리 민족이 노예의 기반에서 벗어나 희생참독(犧牲慘毒)을 면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창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천도교의 보국안민의 이념과 민중교육의 의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신에 맞게 [만세보]는 처음부터 국문과 한문을 혼용하면서 서민대중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자에 루비(한자 옆에 국문으로 된 작은 글자로 토를 다는 것)를 달아 항일민족지로서의 구국계몽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만세보]는 우리 나라 신소설의 효시인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와 ‘귀(鬼)의 성(聲)’ 등을 연재하여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신문소설의 신기원을 이룩하는데 공헌하였다. 고종(高宗) 임금도 [만세보]를 애독하여 1천원을 하사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만세보]는 일정부분 천도교 기관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처럼 활발하게 언론활동을 전개했던 [만세보]가 창간 1년만인 포덕 48년 6월 29일자(293호)로 폐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용구 일당을 출교시킨 이후 교단재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교단은 기사회생의 노력 끝에 3년만에 난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에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자 신문 대신 기관지로서 월간잡지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를 창간 발행하게 되었다. 그때는 한일합방 직전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종교적 논설과 교도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 아래 그나마 신문지법에 의해 발행이 허가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앙총부는 포덕 51(1910)년 7월 16일 월보과(月報課)를 새로 설치하고 8월 15일에 [천도교회월보](이하 월보라 칭함)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당시 발행인은 김완규(金完圭), 편집인은 김원식(金源植), 주간 및 인쇄인은 이교홍(李敎鴻)이었다. 창간호의 발행일자는 ‘융희(隆熙) 4년 8월 15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창간 1주일만인 8월 22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함으로써 월보 제2호부터는 발행일이 일본연호로 바뀌어 ‘명치(明治) 43년 9월 15일’로 명시되었다. 8월 29일에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월보사는 주간 이교홍 명의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일본의 한국병탄을 반대 매도하고 합병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송하여 성원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왜경에 발각되어 이교홍 · 김완규 등 간부진 4, 5명이 투옥되고 발행인이 교체되는 곤욕을 치루었다. 체포된 간부들은 합방에 반대하고 외국 영사관에 청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사일 뿐 월보사나 교회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여 다행히 월보는 폐간을 면하여 계속 발행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만약의 경우 의암성사에게 미칠지도 모를 화를 미연에 방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 출발부터 수난을 겪어야 했던 월보였기에 그 후 3백여호를 발행하는 동안 일제에 의한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잡지사상 가장 장수했던 잡지로 기록되고 있다. 그 후 포덕 51년 12월에 천도교가 보성학교를 인수하면서 학교에 부설된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도 함께 인수하여 기존의 창신사(彰新社) 인쇄소를 여기에 통합 확장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고 여기서 월보를 비롯한 각종 교회서적을 발행하다가 3.1운동때 이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의암성사는 천도교 자체적으로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여기에는 준비기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 사학(私學)들의 열악한 재정상태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이들 학교에 대한 지원활동에 나섰다. 그래서 포덕 47년에 사립보성학교(私立普成學校)에 80원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서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 용산(龍山) 양영학교(養英學校), 양덕여학교(養德女學校), 전주(全州) 창동학교(昌東學校), 서서(西署)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 흥화학교(興化學校), 비파동(琵琶洞) 사립광명학교(私立光明學校), 사립석촌동소학교(私立石村洞小學校), 용산(龍山) 문창학교(文昌學校), 마포(麻浦) 보창학교(普昌學校), 대구(大邱) 교남중학교(嶠南中學校),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청주(淸州)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시내외의 각급 사립학교에 학과 정도와 교원 및 학생수를 감안하여 80원에서 15원까지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지원하거나 인수 혹은 설립 경영하였다. 이러한 사학 지원 내지는 인수 경영활동을 통해서 재정난으로 인한 학교폐쇄를 막고 후진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활동이 이용구 일당의 출교로 교단재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의암성사의 각고의 노력으로 3년여만에 교단이 정상화되고 재정상황이 호전되자 다시 교육활동을 재개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통감부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포덕 49년 8월 ‘사립학교령’이 선포되어 한국인의 교육환경이 더 악화되었다. 더구나 포덕 51(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침탈되면서 사학의 경영난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교단은 학교의 신규설립보다 기존학교의 인수경영으로 교육사업의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우리나라 명문사학인 보성학교(普成學校, 現 高麗大 前身)와 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現 同德女大 前身)를 학교측의 요청에 따라 인수 경영하게 되었다. 보성학교의 경우 천도교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가중되는 경영압박으로 폐교위기에 처하게 되자 학교측의 요구에 따라 포덕 51년 12월 20일 소학교 · 중학교 · 전문학교로 구성된 보성학교를 인수하게 되었고, 보성학교의 부채 3만원을 청산했다. 인수 후 전문학교 교장에는 윤익선(尹益善)을, 중학교 교장에는 최린(崔麟)을 임명하고 교사를 신축하여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전교생의 수학여행비를 교회에서 부담하는 등 일제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손색없는 명문학교로 육성시켜 나갔다. 동덕여학교(당시는 同德女子義塾)는 포덕 49년 조동식(趙東植)이 설립, 경영해왔으나 역시 경영난에 부딪히자 다음해 11월에 특별기부금 100원을 희사한 것을 비롯해서 매월 10원씩 보조하다가 1년 후에는 매월 70원씩 증액 보조한 것 외에도 관훈동(寬勳洞)에 있는 천도교 소유의 부지 209평과 32칸 기와집까지 기부하여 셋방살이를 면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도 가중되는 경영난을 면할 길이 없자 학교측의 요구로 포덕 55년 12월 27일 대도주 박인호 명의로 설립자를 선임하고 다음해 3월 30일 변경인가를 받음으로써 천도교에서 인수경영하게 되었고, 9월에는 168평의 2층 양옥으로 된 교사를 신축하였다. 일제는 포덕 52년 8월에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10월에는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였으며, 다시 포덕 56년에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만들어 민족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나갔다. 이로 인해 포덕 51년 1,227개교였던 사립학교가 8년 후 461개교로 격감하는 가운데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는 꾸준히 발전을 보여 왔다. 보성 · 동덕학교 외에도 포덕 51년 이후 천도교에서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던 사학으로 용산(龍山)에 양영학교(養英學校)와 양덕여학교(養德女學校), 마포(麻浦)에 보창학교(普昌學校)와 삼호보성소학교(三湖普成小學校), 청파동(靑坡洞)에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 교동에 오성학교(五星學校), 전주(全州)에 창동학교(昌東學校), 대구(大邱)에 교남학교(嶠南學校)와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청주(淸州)에 종학학교(宗學學校), 안동(安東)에 봉양의숙(鳳陽義塾), 선천(宣川)에 보명학교(普明學校) 등 수십 교에 이른다.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교단에서 관리하는 학교가 많아지자 총부는 포덕 52년 6월에 각 학교에 적용할 관리규정을 제정하여 종령 81호로 공시하였다. 그 후 이를 다시 개정하여 포덕 53년 1월 19일 종령 95호로 학교관리 규칙을 새로 공포하였다. 이러한 대외적인 육영사업과 아울러 대내적으로는 포덕 51년 3월에 사범강습소를 중앙에 설립한데 이어 각 지방에도 강습소를 확대 설립하여 교리와 일반학문을 함께 가르쳤다. 당시 이러한 강습소가 전국 시 · 군에 8백여개소가 설립되자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 운영하기 위해 강습소에 일련번호를 붙여 관리하였고, 포덕 52년 3월에는 강습소규정을 만들어 교인들에 대한 교육을 체계화해 나갔다. 이처럼 강습소가 전국적으로 활성화하자 보다 차원 높은 교육을 위해 포덕 53년 1월 19일 종령 94호를 발표, 중앙에 종학강습소를 특설하고 종학강습소규칙을 마련하여 20세 이상의 중등 정도의 교육수준을 가진 교인을 3개월, 6개월, 1년 과정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종학강습소는 설비가 완전치 못하여 이 해 12월 24일로 폐지되었다. 그 후 포덕 50년 10월 26일 종령 37호로 3대기념일 명칭을 오늘날과 같이 변경하였다. 이에 의하면 대신사 득도일인 4월 5일은 천일(天日), 해월신사 승통일인 8월 14일은 지일(地日), 의암성사 승통일인 12월 24일은 인일(人日)이라 하여 3대기념일로 정하였다. 이와 아울러 의암성사가 천도교를 선포한 12월 1일은 교일(敎日), 대신사 순도일 3월 10일은 제1대기도일(第一大祈禱日), 해월신사 순도일 6월 2일은 제2대기도일(第二大祈禱日)로 정하였다. 그리고 종전에 ‘지일’이라 했던 3월 10일과 6월 2일의 명칭을 폐지하였다. 또한 10월 29일에는 의암성사의 유시에 따라 종령 38호로 성경신법(誠敬信法)의 종문사과(宗門四科)를 정하여 이를 연원을 통해서 모든 교인들에게 시행토록 하였다. 여기서 사과란 송주(誦呪)를 뜻하는 성(誠), 청수를 뜻하는 경(敬), 성미를 뜻하는 신(信), 교리강습을 뜻하는 법(法)의 네 가지를 이름인데, 이를 성실히 이행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독려하기 위하여 사과에 준해서 다음해(포덕 51년) 1월 3일 서우순(徐虞淳) · 이병춘(李炳春)을 성도사(小師)로, 홍기억(洪基億) · 나인협(羅仁協)을 경도사로(敬道師)로, 홍기조(洪基兆)를 신도사(信道師)로, 오영창(吳榮昌)을 법도사(法道師)로 임명하였다. 포덕 51년 12월 3일 중앙총부를 중부 사동(中部 寺洞)에서 북부 대안동(北部 大安洞)으로 이전한 후 종전의 대헌을 대폭 개정하여 12월 8일 종령 66호로 신대헌(新大憲)을 제정 공포하고 체제를 새롭게 개편하였다. 즉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면서 제정 공포한 천도교 대헌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전문 5편 189조로 된 신대헌을 제정 시행하였다. 신대헌은 사관원제(司觀院制)를 골격으로 하여 중앙총부를 대종사(大宗司) · 현기관(玄機觀) · 공선관(共宣觀) · 금융관(金融觀) · 전제관(典制觀) · 감사원(監査院) · 총인원(叢仁院)으로 구성하였다. 총부는 신대헌에 따라 대종사장에 이종훈, 현기관장에 오세창, 공선관장에 나용환, 전제관장에 권동진, 금융관장에 윤구영, 감사원장에 오지영을 임명하고 각급 직종을 개편하였다. 또한 포덕 51년 8월에 송현동(松峴洞, 現 安國洞 조계사 자리)에 중앙총부를 지을 대지를 매입함과 동시에 기공하여 포덕 52년 1월에 2층 석조양옥으로 된 총부 건물을 준공하고 2월에 대안동에 있던 총부를 이전하여 1층은 대교당으로 사용하고 2층은 중앙총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선포 후 5년 동안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던 총부가 비로소 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의암성사는 포덕 52년 5월에 대신사 유허지 순례차 용담성지를 방문했다. 용담성지 순례에는 중앙총부의 오세창 현기관장, 나용환 공선관장, 권동진 전제관장, 오지영 감사원장, 양한묵 법도사 등 10여명의 간부진이 참가했다. 또한 이번 순례행사와 더불어 교회에서 경영하는 보성중학교 교직원과 학생 등 240여명이 용담성지와 경주로 수학여행을 함께 가게 되었는데 그 비용 일체를 교회가 부담했다. 의암성사 일행은 5월 18일 1천여명의 학생과 교인들이 출영하는 가운데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기차가 도착하는 곳마다 현지 교회 간부와 교인 · 학생들이 나와 환영했다. 19일 대구에 도착한 의암성사는 달성공원(達城公園)과 대구시내 각급 학교에 들러 희사금을 내고 20일 영천(永川)으로 가는 길에 팔공산(八公山) 동쪽 기슭을 지나 자인(慈仁) 서쪽에 있는 후연점(後淵店)에 이르렀다. 이곳은 바로 대신사가 참형 당한 후 시신을 용담으로 운구할 때 온기가 있어 사흘을 묵었던 장소로, 의암성사는 당시를 연상하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교인 수백명이 환영하는 가운데 영천에 도착한 의암성사는 마침 그날이 영천읍 장날이라 장구경을 하고 영천교구에 들었다. 21일 6, 7백명의 교인이 출영하는 가운데 경주에 도착한 의암성사는 22일 황오리(皇吾里) 전교실에서 설교를 하고 신라시대의 유적을 관광하였으며, 23일에는 보성중학교 학생과 더불어 불국사를 관광하였다. 이날 오후 의암성사 일행이 용담에 도착하자 김수영(金壽永)의 안내로 구미산 기슭에 용담정이 있던 자리와 가정리 대신사 유허지를 돌아본 후 대신사 태묘를 참례했다. 한편 중앙총부는 포덕 52년 6월 8일 홍병기를 대종사장에 임명하고, 대헌(大憲) 일부를 고쳐 6월 9일부로 장로제(長老制)를 실시함에 따라 대종사장이었던 이종린을 초대 장로로 임명하였다. 장로는 대종사장을 지낸 원로 중에서 선임하되 주로 교무에 관한 자문을 담당토록 하였다. 또한 포덕 53년 3월 21일 종령 79호로 종전의 원직규정을 개정하여 연비(聯臂) 5천호 이상에 도령(道領) 1인, 1천 5백호 이상에 도훈(道訓) 1인, 3백호 이상에 교훈(敎訓), 30호 이상에 봉훈(奉訓) 1인으로 정하였다. 또한 이 해 12월 27일 총부 임직원을 개편하였는데, 현기관장에 오세창, 공선관장에 나용환, 전제관장에 권동진, 금융관장에 오영창, 감사원장에 오지영을 임명했다. 현도 이후는 삼칠자주문을 위주로 독송케 하였다. 그러나 특별기도 기간에는 특정주문을 제정하여 송주토록 하였는데, 종령 63호로 포덕 48년 3월부터 3개월간 시행한 치성의식(致誠儀式)에는 ‘시천주각아장생 무궁무궁만사지(侍天主覺我長生 無窮無窮萬事知)’ 라는 치성주문을 독송케 하였다. 또한 포덕 51년 4월에는 종령 50호를 통해서 치성주문으로 참회문을 독송토록 하였다. 그 후 이와 별도로 종령 104호에 의거, 포덕 54년 12월 18일부터 다음해 3월 26일까지 시행한 105일 특별기도 기간에는 매주 목요일 오후 9시에 ‘신사영기아심정 무궁무궁조화지(神師靈氣我心定 無窮無窮造化知)’라는 주문을 55회 송주토록 하였다. 그 후 종령 112호에 의해서 포덕 55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 105일 특별기도시에는 ‘신사영기아심정 무궁조화금일지(神師靈氣我心定 無窮造化今日至)’라는 신사주문을 매일 오후 9시 105회씩 송주케 하였다. 포덕 56년 11월부터는 기념식은 물론 매 시일마다 천덕송을 부른 후 이 신사주문을 일곱 번씩 송주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총부는 포덕 47년 3월 4일 종령 16호를 발하여 시일에는 청수 한 그릇을 봉전하여 시일식을 봉행하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이 해 4월 5일 천일기념식에 청수 한그릇과 함께 향을 피우도록 함으로써 그 후 청수가 교회의식의 표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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