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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대신사]  대구장대

    명칭 대구장대
    설명 몸은 비록 죽지만 영의 힘으로써 대도를 지지 하겠다.
    주소 대구 중구 남산동
    방문자 수 5315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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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몸은 비록 죽지만 영의 힘으로써 대도를 지지 하겠다.--

    동학의 위세가 날로 커져가는 데 두려움을 느낀 조정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로 하여금 대신사를 잡아들이게 한다. 포덕 4년(1863) 12월 10일 새벽 용담정으로 들이닥친 정운구 일행에게 체포된 대신사께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철종이 승하하였으므로 대구 감영으로 되돌아와 심문을 받게 된다. 대신사는 "도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하리라" 하시며 정운구의 심문에 천도의 대의를 밝히시다가 포덕 5년(1864) 3월 10일 대구장대(大邱將臺) 앞에서 참형을 받게 되었다. 지금 대구장대 자리는 시가지로 변해 찾아볼 수 없다. 대구 시내의 달성공원 안에는 순도 100주년을 맞는 포덕 105년(1964) 전국 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대신사의 동상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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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구옥(大邱獄)에 환인(還因)

    포덕 5년(甲子, 1864) 1월 5일 정운구 일행은 대구영에 도착하였다. 당시 대구감사(大邱監司)는 서헌순(徐憲淳)이었는데 서헌순은 어명죄인(御命罪人)을 맡아서 심문(審問)하기가 여간 고심(苦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신사의 부친인 근암공의 명성이나 덕행으로 미루어 보든지 대신사의 훌륭한 인격으로 보아 차마 극형에 처할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 경상도 일대에서 대신사를 조화(造化)부리는 신인(神人)으로 생각하여 만일 그를 해(害)코자 하다가는 대구감영이 전멸을 당하리라는 풍설(風說)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천(果川)까지 갔다가 대구로 환인(還因)케 한 것은 서울의 조야(朝野)가 먼저 화(禍)를 면하고자 한데서 나온 일이요 또 금상(今上)의 붕어(崩御)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라 하여 민심이 흉흉하므로 이에 대한 공포심에서 서헌순은 더욱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명죄인이라 자의(自意)대로 처결할 수는 없었다. 공판날 대구감사 수석하(首席下)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조영화(趙永和) 등이 배석한 가운데 명사관(明査官)을 시켜 심문을 개시하였다.


    서헌순이 심문하기를 『네 이단의 도로써 무리를 모아 민심을 혼란케 하니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나뇨?』 하는지라 대신사께서 득도할 때의 일을 설명한 후 정색(正色)하고 말씀하기를


    『내 천도(天道)로써 사람을 가르쳐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기울어지는 나라를 돕고자 하노라. 이 도(道)가 세상에 나온 것은 천명(天命)으로 나온 것이요 나의 사의(私意)가 아니며 나의 교화(敎化)는 천명에서 나온 것이요 인위(人爲)로써 조작(造作)한 것이 아니며 또한 일신(一身)으로 도(道)에 순(殉)하여 덕(德)을 후세만대(後世萬代)에 전(傳)코자 함도 역시 천명(天命)이오.』 하였다.


    서헌순이 다시 묻기를 『네 도로써 세상을 가르친다 하면서 목검(木劍)을 만들어 스스로 사용하고 또 제자에게 가르쳤으니 그것은 무슨 의미로 한 것이냐?』 대신사께서 대답하되


    『도를 닦는 것은 천심(天心)을 지키고 정기(正氣)를 양(養)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 사람의 정기를 양하기 위하여 목검을 만들어 검무(劍舞)를 추게 한 것이요 다른 뜻이 없노라.』


    이 말을 들은 서헌순은 크게 꾸짖으며 『검은 무인(武人)의 행사(行事)요 또 흉기(凶器) 이거늘 이 태평성세(太平聖世)에 일개 백성으로 검무와 검술을 사람에게 가르쳤으니 네 말로 천도를 세상에 편다는 것은 세상을 속임이요 그 실(實)로 도당(徒黨)을 모아 반역을 도모하는 뜻이 명백한 것을 조정에서부터 이미 알았으니 속히 자백하여 양심을 속이지 말라.』 심문의 핵심은 검무와 검가에 있었고 조정에서 서헌순에게 심문하라는 요점도 역시「검(劍)」일자에 있었다. 이에 대신사께서 말씀하기를


    『검무에 대한 말은 내 이미 답변한 외(外)에 다른 말이 없노라. 오직 공(公)은 자위(自爲)하소서.』 하고 침묵불언(沈默不言)하였다.


    서헌순이 노(怒)하여 혹독한 고문을 내렸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고문할 적마다 살이 찢어지고 다리뼈가 꺾이어도 옥에 돌아오면 골육(骨肉)이 평시(平時)와 같이 소생하여 평인(平人)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전연(全然)히 영력(靈力)의 소치였다. 이러하기를 21차(次)에 이르렀는데 때로는 서헌순이 「네 도를 버리겠다는 말 한 마디만 하여도 죽음을 면하고 살아날 길이 있으니 그리하라」고 회유도 하여 보았지만 대신사가 끝까지 듣지 않으므로 서헌순은 더욱 노하여 독형(毒形)을 가(加)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순간 문득 벽력같은 소리가 옥우(屋宇)를 진동하니 감사(監司) 이하 대소관리(大小官吏)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곧 하옥케 하고 즉일(卽日)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포덕 5년 (甲子) 2월에 관에서는 해월신사까지 체포키 위하여 경주영장과 교졸 50여명을 파견하여 검곡을 급습하였다.
    이때 신사께서 방 가운데 단정히 앉아 주문(呪文)을 묵념(默念)하고 엄숙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으니 교졸(校卒)이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이에 신사께서 서서히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아가 화를 면하였다.

    2. 몸은 비록 죽지만 영(靈)의 힘으로써 대도(大道)를 지지(支持) 하겠다.

    해월신사께서 선생이 대구에 환인(還因)되엇다는 소식을 듣고 영덕도인 유상호에게서 돈 백냥을 구하여 현풍도인 곽덕원의 고용인으로 변장하고 옥사를 찾아 재물로써 달래어 의형제를 맺은 후에 대신사를 비밀히 면회하기 위하여 옥사의 의복으로 변장하고 3월 3일 저녁 9시경에 밥상을 들고 옥중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사제간 최후의 회견이었다. 대신사께서 신사를 보고 아무 말이 없다가 담뱃대 한 개를 주며 급히 돌아가라는 뜻을 표하므로 신사께서 옥에서 나와 담뱃대를 깨고 보니 그 속에 심지가 있고 심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등명수상무혐극 주사고형역유여(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오순수천명 여고비원주(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신사(神師)께서 이 글을 보고 곧 강원도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대신사께서는 포덕 5년(1864), 고종(高宗) 원년(元年), 갑자(甲子) 2월 29일 조정으로 부터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로 다스리라는 명령에 의(依)하여 3월 10일 대구 장대(將臺)(남문 밖 아미산하 觀德堂) 앞에서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다.


    이때 형졸(刑卒)이 여러번 칼을 내리쳤으나 목에 검흔(劍痕)조차 나지 않았으므로 감사(監司) 이하 모두가 크게 놀래어 어찌 할줄 몰라 당황하였다. 이때 대신사께서 형졸에게 『청수(淸水) 일기(一器)를 내 앞에 놓으라』고 하니 감사가 곧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대신사께서 청수 앞에서 마지막 묵도(默禱)를 한 후 형졸에게 「안심하고 베라」하고 조용히 도에 순하였다. 이때 청명하던 일기가 갑자기 변하여 광풍(狂風)이 일고 폭우(暴雨)가 내리어 천지(天地)마저도 신인(神人)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하였으니, 당시 대신사의 나이 41세였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 지하철 1호선 반월당역하차→동아쇼핑 건너편 대한적십자병원 뒷쪽이 관덕정
    자가용
    이용
    :: 대구역에서 중앙로를 따라 1.2km쯤 남행하면 반월당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바로 오른쪽으로 동아쇼핑센타가 있고 건너편에 대한적십자병원이 있다. 대한적십자병원 뒤쪽에 관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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