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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성사]  태화관

    명칭 태화관
    설명
    주소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방문자 수 2114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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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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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독립선언 유적지(태화관 자리) 표지석(현 태화빌딩 앞)]

    ◇ 천도교와 3.1독립운동 ◇

    1. 민족대표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드디어 3월 1일이 밝았다. 최린은 아침에 대문 안에 독립선언서가 두장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서울시내에 배포되었음을 확인하고 의암성사의 집으로 가서 권동진· 오세창과 같이 의암성사를 모시고 12시경 태화관에 도착했다. 약속된 시간인 오후 2시까지 기독교측에서 길선주 · 유여대 · 김병조 · 정춘수가 불참한 가운데 민족대표 29명이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민족대표 각자에게 나누어준 후 의암성사는 이종일에게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고 해서 이종일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의암성사는 최린에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지시하고 일동에게 민족대표로서 당당히 행동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도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를 인편으로 보냈다.


    이윽고 일본경찰 수십명이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뒤늦게 알고 학생대표 강기덕 · 김원벽 · 한위건 등이 태화관으로 달려와 민족대표에게 장소변경을 항의하며 탑골공원으로 갈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이들을 설득시켜 돌려보냈다. 일본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민족대표 일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일경은 의암성사를 필두로 세 사람씩 자동차에 싣고 압송했다. 특히 나용환· 이종일· 이승훈은 한차에 태워져 실려가면서 독립선언서를 수백매를 군중들에게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목이 터져라 하고 만세를 불렀다.

    2.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

    한편 탑골공원에는 수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학생들의 주도 아래 오후 2시경 중앙단상에는 10년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나타났고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마자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소리가 터져나오면서 민중의 환호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학생들은 모자를 공중으로 날리며 환호했다. 이미 일본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으나 이들을 막지 못했다.


    곧이어 군중들은 공원을 나와 동서남북을 가릴 것 없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서울역, 미국영사관, 광화문, 대한문, 소공동, 충무로, 창덕궁, 안국동, 서대문 프랑스대사관, 동대문 등 서울 시내가 하루 종일 만세소리에 휩싸였다. 특히 이날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지방에서 고종의 부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고종의 돌연한 죽음을 애도하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도 만세 대열에 합세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만세시위에 합류하는 서울시민들이 늘어나 수십만 군중이 서울 시내를 누비며 만세를 불렀다. 당시 천도교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발행 배포한 [독립신문]2호에는 이날의 광경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塔洞公園에 會在하였던 數萬의 學生이 朝鮮獨立萬歲를 齊唱하면서 手舞足蹈하면서 風蕩潮湧의 勢로 長安을 貫中하니 枯木灰死가 아닌 우리 民族 金魚籠鳥가 아닌 우리 民族으로 誰가 感泣치 않으리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노도와 같이 퍼져나가 삼천리강산이 온통 태극기와 만세소리로 뒤덮였고, 그 물결은 국경을 넘어 해외에까지 확산되었다. 이것은 천도교의 전국조직망을 비롯해서 기독교· 불교 등과 사전 조직화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천도교는 당시 국내 최대의 종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이 중앙집권제였기 때문에 독립만세운동을 지방으로 확산 발전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거사에 대비해서 대 교구마다 한 대씩 비치해 두었던 등사기를 이용해서 중앙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기 소속교구에 신속히 배포하는 등 여러 지방에서 교구가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각 도별로 천도교가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지역을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경기도 서울, 옹진, 수원, 강화, 진위, 오산, 화성, 송산, 인천, 용인, 수지, 월미도, 발안, 이천,
    평택, 광주, 양주, 가평, 양평, 시흥, 부천, 여주, 진위
    충청남도 대전, 부여, 임천, 공주, 논산, 아산, 서산, 태안, 예산, 운산, 청양, 홍성
    충청북도 충주, 진천, 괴산, 제천, 음성, 청주, 영동, 상원
    강원도 철월, 춘천, 횡성, 홍천, 양구, 이천, 김화, 화천, 통천, 원주, 회양, 정선, 평강, 양양,
    현북, 삼척, 평창
    경상남도 진주, 창녕, 영산, 함안, 군북, 창원, 고현, 합천, 고성, 언양, 함양, 부산, 마산, 삼진
    경상북도 안동, 경주, 김천
    전라남도 장흥, 완도, 전주, 진도
    전라북도 임실, 익산, 전주, 순창, 둔남, 남원, 함열, 정읍
    평안남도 평양, 온산, 강서, 용강, 진남포, 중화, 상원, 안주, 강동, 성천, 양덕, 자산, 덕천, 숙천,
    순천, 맹산, 덕천, 영원, 평원, 삼등, 개천
    평안북도 의주, 선천, 강계, 용천, 신의주, 운산, 삭주, 초산, 영변, 철산, 벽동, 위원, 후창, 태천,
    구성, 자성, 창성, 정주, 수구, 장토, 어뢰
    황해도 수안, 곡산, 석달, 마산, 해주, 장연, 안악, 은율, 황주, 겸이포, 신계, 재령, 송화, 평산,
    금천, 사리원, 연백, 신천

    함경남도

    원산, 함흥, 영흥, 정평, 북청, 이원, 단천, 풍산, 삼수, 갑산, 홍원
    함경북도 성진, 길주, 경성, 수성, 무산, 부령
    중 국 화령, 청산리, 장백, 집안, 치와보, 훈춘, 수신사, 대양차, 통구


    3. 임시정부의 추진과 의암성사의 대통령 추대

    3.1운동이 일제의 총칼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당장 독립은 이룰수 없었으나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군국제에서 탈피하여 민주공화제에 의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승화됨으로써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3.1운동의 만세 함성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천도교인을 포함해서 애국지사들이 국내와 국외 여섯 곳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처음에 추진한 날짜 순으로 보면 3월 17일 러시아 지역의 대한국민의회정부(大韓國民議會政府), 4월 1일 기호(畿湖)지역의 대한민간정부(大韓民間政府), 4월 9일 서울지역의 조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4월 13일 상해지역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4월 17일 평안도 지역의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 4월 23일 서울지역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등 6개 임시정부이다. 이 가운데 의암성사를 국가수반으로 추대했던 임시정부는 러시아에 근거지를 둔 대한국민의회정부와 국내에서 천도교인이 추진했던 대한민간정부 및 조선민국정부이다.


    기호지역에 수립하여 했던 대한민간정부는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오세창,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부장관 이동녕(李東寧), 외무부장관 김윤식(金允植), 학무부장관 안창호, 재무부장관 권동진, 군무부장관 노백린(盧伯麟), 법제부장관 이시영(李始榮), 교통부장관 박용만(朴容萬), 노동부장관 문창범(文昌範), 의정부장관 김규식(金奎植), 총무부장관 최린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천도교인은 4명이다.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국임시정부는 국가수반인 정도령(正都領)에 손병희, 부도령 겸 내각총무경에 이승만, 외무경 민찬호(閔瓚鎬), 내무경 김윤식, 군무경 노백린, 재무경 이상(李相), 학무경 안창호, 법무경 윤익선(尹益善), 식산무경 오세창, 교통무경 조용은(趙鏞殷)으로 내정하였다. 조선민국임시정부는 임시정부포고문 및 정부창립장정(政府創立章程) 33개조를 마련하고 만국국제연맹회의에 외교위원을 파견할 것을 의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에 의해 본거지가 탄로되고 문서가 압수되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한국민의회정부는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산업총장 남형우(南亨祐), 탁지총장 윤현진(尹顯振), 참모총장 유동열(柳東說), 강화대사 김규식 등을 내정하였다. 여기에 천도교인은 손병희· 남형우· 유동열 3명이다. 그 밖에 교인으로는 일본 명치대(明治大) 법과를 졸업한 홍도(洪濤, 洪鎭義) 등이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국내외 6개처의 임시정부 가운데 근거지를 확보하고 실질적으로 조직을 갖추어 움직인 곳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등 3개처이며, 나머지 3개처의 임시정부는 사실상 선언적인 안(案)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그 후 실질적인 조직을 갖춘 3개처의 임시정부가 상호 협상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9월 11일 새 헌법이 공포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 탄생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 후 10년간의 무정부 상태를 벗어나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합정부의 헌법전문에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을 명문화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3.1정신에 있음을 명시했다. 한편 3.1운동 이후의 임시정부 추진과정에서 옥중에 있는 의암성사를 3개 임시정부에서 국가수반으로 추대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민족지도자로서의 의암성사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4. 천도교단의 막대한 타격 - 3.1독립운동의 후유증

    앞서 보았듯이 3.1독립운동은 천도교의 주도 아래 거족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결과 천도교는 엄청난 피해와 희생이 뒤따랐다. 특히 정주교구 · 단천교구 · 수안교구 · 맹산교구 · 수원교구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천도교가 만세시위를 주도한 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학살당하거나 투옥, 고문, 징역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교구나 전교실이 방화로 소실되거나 폐쇄되는 등 재산상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그중 장렬하게 숨진 정주교구장 최제일의 이야기는 가히 민족혼의 귀감으로 길이 남을 만하다. 정주교구 교인들은 최제일 교구장의 선도 아래 3월 31일 정오경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북 치고 나팔을 불며 남문거리를 지나 정주우체국 앞까지 진출했다. 이때 일본 기마헌병이 시위대를 가로막고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최제일 교구장의 오른팔을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그 순간 오른팔이 잘리면서 태극기가 떨어지자 다시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군도로 내리쳐 잘라버렸다. 이번에는 떨어진 태극기를 입으로 물고 일어나 전진하자 헌병은 마침내 최 교구장의 목을 내리쳐 무참히 죽이고 말았다. 교구장이 선혈을 내뿜으며 쓰러지는 것을 바로 그 뒤에서 목격한 교인 김사걸(金士傑)이 잽싸게 피로 얼룩진 태극기를 거머쥐고 만세를 부르며 전진했다 이를 본 헌병 보조원이 쇠갈쿠리로 그의 배를 쳐서 쓰러뜨린 다음 질질 끌고가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때부터 헌병들의 발포가 시작되어 정주에서 92명의 살상자가 발생하는 대참사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헌병들은 다음날 2층 양옥으로 된 정주교구 교당마저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버렸다.


    이와 비슷한 피해와 희생을 당한 교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1천 3백여명의 교역자가 체포 수감되었으며 가옥을 소실 당한 교인도 많았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탈교하는 교인도 상당수였으며, 독립만세를 부르면 곧 독립이 되는 줄 알고 참가했던 주민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중앙총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암성사를 비롯한 천도교측 민족대표 15인 외에도 춘암상사 · 금융관장 노헌용(盧憲容) · 경성대교구장 장기렴(張基濂) · 보성사인쇄소 감독 김홍규 등 다수의 중견간부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 해 5, 6월에는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었다는 죄목으로 중앙총부의 간부와 지방교구의 임원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중앙총부에는 용산의 일본군 1개 대대가 진주하여 10여일 동안이나 강점함으로써 업무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뿐만아니라 중앙총부가 경성제일은행에 예금한 20만원, 춘암상사가 보관했던 70만원, 교인 김상규의 집에 보관했던 30만원 등 모두 120만원을 모두 압수당하였다. 월성미 수납액도 4분의 1로 격감했다. 이로 인해 중앙총부는 재정적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되어 직원들의 급료마저 지불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총부는 민족대표 33인 가족에 대한 생계보조는 물론 서대문감옥에 직원을 파견하여 수감된 민족대표 전원에게 사식을 제공하는 등 옥바라지를 하였다.


    3.1운동으로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학원(현 고려대학교 전신)과 동덕여학교의 운영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보성학원의 경우 교장 윤익선과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이 투옥되고, 학교 운영비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의 명문사학인 보성학교를 살리기 위해 인수자를 찾던 중 포덕 64년 6월 29일 불교 총무원과 인도계약을 체결하고 다음해 1월에 교회에서 그동안 경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의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또한 이와 별도로 보성전문학교(당시는 보성법률상업학교)에 대해서는 범사회적으로 각계 인사의 출연(出捐)으로 포덕 63년 4월에 재단법인 사립보성전문학교를 인가받고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13년간에 걸쳐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학원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문학교 재단 설립 시 교단이 책임분담하기로 했던 10만원과 그 이자를 변제하지 못하게 되자 10년 후 포덕 73년에 김성수(金性洙)가 다시 보성학원을 인수하면서 상춘원(부지 10,165평)과 송현동 총부 부지(616평) 및 건물 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동덕여학교 역시 3.1운동 후 경영난으로 포덕 64년 12월에 초기 설립자인 조동식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한편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인쇄했던 보성사 인쇄소마저 독립만세의 함성이 채 가시지 않은 포덕 60년 6월 28일 일본경찰의 소행으로 추측되는 방화에 의하여 소실되고 말았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 지하철1호선→종각역 3번 출구→안내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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