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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영덕 영해와 이필제

    명칭 영덕 영해와 이필제
    설명
    주소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방문자 수 2214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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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1. 이필제(李弼濟)의 거의(擧義)

    포덕 11년(1870) 10월에 이필제가 영월도인 이인언(寧越道人 李仁彦)을 신사에게 보내어 고하기를 『소생은 일찍 계해년(癸亥年)에 용담장석(龍潭丈席)에서 도를 받고 돌아와 포덕에 종사하다가 지목을 피하여 지리산에 은거하였는데 왕년(往年)에 대신사께서 대구에서 조난(遭難)되었다는 말을 듣고 분원(忿寃)을 이기지 못하여 기필코 원(寃)을 펴고자 하였으나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사오니 원컨대 선생은 좋은 방침과 좋은 지도를 내리어 주소서』하였다. 신사께서 생각하여 본즉 용담문도(龍潭門徒) 중에 그러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 기억되지 않으므로 다만 좋은 말로 효유하여 보냈다.


    이필제는 본래 충청도 목천사람으로 세사(世事)에 불평을 품어왔었다. 그의 아버지가 천주학 신봉자의 혐의로 상주에서 체포되어 옥사한 이후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안동 이(李)포수에게서 포술을 배워가지고 문경 화적굴에 투신한 바 있고 권모(權某) 또는 주모(朱某)로 수시 변성명하면서 각지에 출몰하여 탐관오리를 상대로 분풀이를 하던 사람이었다. 대신사께서는 득도 이전 주유천하하던 당시에 문경 새재에서 이필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대신사의 말씀과 인격에 감복하여 대신사를 따르기로 맹세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필제는 용담 최선생이 동학을 창명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비밀히 용담에 나아가 입도하고 문경,상주,영해,울진 등지에서 수백호의 포덕을 하였는데 지목이 심하여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신사께서 영동에 은거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뜻을 펴기 위하여 이인언(李仁彦)을 보냈던 것이다.


    11월에 이인언이 다시 신사를 찾아뵙고 이필제의 말이라 하여 대신사의 신원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므로 신사께서  『아직 그 시기가 아니라』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포덕 12년 (1871) 1월에 영해도인 박사헌(朴士憲)이 신사를 방문하고 「이필제가 사실 대신사께 직접 입도한 제자」라는 것을 증언하였다. 2월에 이필제가 다시 도인 권일원(權一元)을 보내어 신사께 다섯차례나 면회하기를 청하므로 신사께서 또한 거절하기 어려워 친히 영월에 가서 만나보니 이필제의 사람됨이 신장(身長)이 7척이요 눈에 붉은 광채가 있고 말소리가 종소리와 같아 일견(一見)에 과격한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필제는 신사께서 친히 내왕하자 대단히 기뻐하여 재배(再拜)한 후 신사께 고하기를 『생(生)이 일찍 선생과 친분은 없으나 의(誼)로 말하면 동문(同門)인지라 정(情)이 형제와 다름이 없나이다. 이제 생이 선생을 특별히 뵈옵고자 하는 바는 선생이나 생이 한가지로 동문의 친(親)이 있으니 선사(先師)를 위하여 설원(雪寃)할 마음은 피차 일반일 것이라 원컨대 선생은 뜻을 허락하여 이 도모(圖謨)에 지시가 있기를 바라나이다.』 하였다.


    신사께서 천천히 대답하기를  『그대가 선사를 위하여 설원코자 함은 의(義)에 있어 당연한 일이요 또는 동문제자된 자 한가지로 감복하는 바라. 그러나 큰 일은 때가 있고 기회가 지어져야 하나니 나는 아직 그 시기가 아닌줄로 아노라. 그 까닭은 선사 조난 후에 일반 도인의 도심이 아직 뿌리를 박지 못하였고 세상인심이 또한 우리 도에 대하여 이해를 가지지 못한 이때에 있어 가볍게 의(義)를 들면 이는 때아닌 계절에 종자를 심는 것과 같아 반드시 실패를 볼 것이요 만일 오늘날에 있어 실패를 한다면 대도의 기초를 세우지 못할 것이니 그대 십분 명심하여 오직 성경신(誠敬信)과 수심정기(守心正氣)에 힘쓰면서 후일을 기다림이 어떠하뇨.』하였다.


    이필제는 신사의 이 말씀을 그럴듯이 들었으나 성이 급하고 마음이 불같은 사람이라 다시 뜻을 굽히지 못하고 문경(聞慶)을 향하여 떠나갔다. 3월 10일은 대신사께서 조난당한 날이라 이필제가 영해.영덕.상주.문경 등 여러 고을 도인에게 글을 보내되 『이제 대선생의 원을 펼 때가 돌아왔으니 대선생을 위하는 자는 천명(天命)을 어기지 말고 3월 10일을 기하여 영해로 모이라』하니 이 날을 기하여 각지로 부터 모인 사람이 5백여명이나 되었다. 이에 이필제는 스스로 대장이 되어 야반에 영해부를 습격하여 군기(軍器)를 빼앗고 부사(府使)를 잡아 참형(斬刑)에 처한 후 다시 별포(別砲)를 모집하여 군세(軍勢)를 크게 떨치고 승승장구하여 상주로 진격코자 할 때 이 급보를 받은 경상감사 김공현(金公鉉)과 안동부사 박제관,영덕현감 정세우 등이 각각 관군(官軍)을 거느리고 이필제를 반격하였다.


    이필제는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되어 영양 일월산(日月山)에 퇴진하였으나 관군이 추격하므로 이필제는 도주하고 부하장사(部下將士)들이 많이 잡혔다. 이때 잡힌 사람은 울진에 남기상(南基祥) 김동규(金東奎) 영해(寧海)에 박사헌(朴士憲) 권일원(權一元) 박양언(朴良彦) 박지동(朴知東) 권덕일(權德一) 영덕(盈德)에 임만조(林晩祚) 구일선(具一善) 강문(姜汶) 김기호(金基浩) 청하(淸河)에 이국필(李國弼) 흥해(興海)에 박마언(朴瑪彦) 경주(慶州)에 이사인(李士仁) 김만춘(金萬春) 정치선(鄭致先) 영양(英陽)에 장선진(張先進) 김룡운(金龍雲) 최준이(崔俊伊) 등 백여인(百餘人)이요 기타 피해당한 도인이 다수였다.


    이 사건으로 관의 추적이 더욱 심하게 되자 신사께서 화를 피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겨우 단양군 정석현(鄭錫鉉)의 집에 이르러 변성명(變姓名)하고 그 집 고용인이 되어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에 마침 강수(姜洙)가 영춘(永春)으로 부터 단양을 찾아와 밭머리에서 신사를 만나니 서로 붙잡고 위로하였다.


    신사와 강수는 이 곳을 떠나 영월소밀원(寧越蘇密院)에 있는 대신사의 가족을 찾아갔다. 세정(世貞)이 연루(連累)의 화(禍)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신사 일행을 집에 머물게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강요하므로 신사 일행은 할 수 없이 다시 그 곳을 떠나 5월에 영월군 정일진(鄭一進)의 집에서 유숙하고 있었는데 영양도인 황재민(黃在民)이 또한 화를 피하여 오다가 신사를 만나 동거하게 되었다. 신사는 이때 강수와 더불어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었다.


    한편 신사의 부인 손씨는 이 무렵 관헌에게 잡혀 단양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10여년간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이 해 8월에 이필제가 다시 정치현 등과 함께 두번째로 거의(擧義)하여 문경읍을 습격하려다가 관군에게 사로잡혀 12월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형(斬刑)을 당하니 이필제 그때의 나이 47세였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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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가용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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