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유적지]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명칭 | 갑오동학혁명기념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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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의 이름을 보면, 기념탑을 세울 당시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기였고 이전에 불리던 ‘난(亂)’ 대신 최초로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
주소 |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 10 |
방문자 수 | 1216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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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94년 4월 6일 동학군은 황토현(黃土峴)으로 관군을 유인한 후 거짓 패하여 두승산록(斗升山麓)의 계곡지대인 시목리(枾木里)로 후퇴하면서 복병을 하였다. 그날 저녁 관군은 황토현에 도착하였다. 옛부터 황토현은 일명 사자봉(獅子峰)이라고도 하였는데, 동학군은 『사자(獅子)』는 『사자(死者)』와 통하므로 이곳이야말로 관군이 시체를 묻을 곳이라고 하여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관군의 본영인 황토현과 시목리 동학군진영은 그 거리가 약 2키로가 될 정도인데 이 날 밤 동학군은 보부상을 가장하여 관군 진영에 진입, 그 동태를 정탐하여 본진에 보고했다. 관군은 이날 밤 술과 고기 그리고 남녀의 가무(歌舞)소리가 뒤엉킨 가운데 태평하게 골아떨어져 있었다. 4월 7일 삼경이 조금이 지나 드디어 동학군은 2개대(隊)로 나누어 정면과 후면으로 기습하여 780여명의 관군 및 보부상을 섬멸하고 많은 무기와 식량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1963년 10월 3일 개천절에 건립되었다. 기념탑의 이름을 보면, 기념탑을 세울 당시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기였고 이전에 불리던 ‘난(亂)’ 대신 최초로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기념탑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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