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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영월 직동

    명칭 영월 직동
    설명
    주소 강원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방문자 수 2415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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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도는 먼저 대인접물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사람을 대하는 곳에서 세상을 기화할 수 있고 물건을 응하는 곳에서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느니라. 만약 사람이 있어 이 두가지의 길을 버리고 도를 구한다 하면 이는 허무에 가깝고 실지를 떠난 것이니 천만년 법경을 외운들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포덕12년(1671) 10월 해월신사는 이곳 직동에서 1년 동안 지냈다. 그리고 포덕13년(1672) 1월 5일에 각지 도인을 모아 고천식을 갖고 대인접물에 대하여 설법하였다.


    1. 재연(再燃)된 지목(指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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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부터 관(官)에서 동학(東學)의 여당(餘黨)을 섬멸코자 위선 신사(神師)의 거처를 염탐하여 경상 충청 강원 경기 등 각도(各道)에 수사망을 펴고 한편으로 도인(道人)과 수상한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필경에는 관군(官軍)이 정진일(鄭進一)의 집에 수상한 사람이 숨어있다는 소문을 듣고 밤중에 포위하므로 신사께서 급히 황재민(黃在民)과 강수(姜洙)를 데리고 난을 피하여 소백산(小白山)으로 향하였다.


    신사 일행이 노숙(露宿)하면서 소백산으로 들어간지 수일 후에 큰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신사 일행은 그 동굴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큰 범이 나타나더니 동굴 입구에서 밤낮을 떠나지 않으므로 강수와 황재민 두 사람은 놀래어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사게서 『범은 산군(山君)이라 무슨 해(害) 있으리오. 황차(況且) 우리들은 위험하고 어려운 지경에 들었는지라 이러한 때에는 영감(靈感)이 오히려 금수(禽獸)에게 있느니라』 말하고 손으로 범의 등을 어루만지니 범이 또한 머리를 숙여 응(應)하는 듯 하였다. 뒤에 들으니 관군이 뒤를 따라 소백산을 수색하여 굴앞 근방에 까지 왔다가 큰 범을 만나 혼이 나서 그대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신사께서 소백산 동굴에 있은지 10일이 넘었는데 문득 보니 나이 20여세 되는 나무꾼 한 사람이 등에 망태를 지고 허리에 낫을 차고 굴 앞을 지나다가 신사 일행을 보고 이인(異人)이라 생각하여 땅에 엎디어 절하면서  『존객은 어디 계시며 무슨 일로 이 곳에 계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이에 신사께서  『우리는 본래 호남사람으로 산천(山川)을 유람하다가 길을 잃고 또한 양식이 다하여 이 곳에서 은인(恩人)을 기다리노라』 하니 나무꾼이 이 말을 듣고 망태 속에서 조밥을 내어 놓으므로 세 사람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다시 부탁하기를  『그대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밥을 좀 가져올 수 있느냐?』 하고 물어 보았다. 나무꾼은 원래 신사 일행을 이인(異人)으로 아는 터이므로 즉시 허락하고 이튿날도 조밥을 지어서 가지고 왔다.


    하루는 나무꾼이 신사에게 말하기를  『저의 집이 이 곳에서 멀지 않고 또한 조용하니 선생들이 함께 감이 어떠합니까?』 하므로 신사께서 기뻐하여 그 주소와 성명을 물으니 영월군 직곡리(寧越郡 稷谷里)에 사는 박용걸(朴龍傑)이었다.


    신사께서 14일째날 밤을 타서 직곡리에 가 박용걸의 집에 이르니 박용걸의 부친이 밖에까지 나와 맞아 상좌(上座)에 앉히고 미리 준비하였던 밥상을 내온 후에 박용걸의 모친의 말이라 하여 전하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일찍 임종(臨終)할 때에 유언이 있었는데 내 죽은 후 수년(數年) 뒤에 어느 해 어느 달에 행색이 초췌한 손님이 찾아올 것이니 너희는 부디 명심하여 후대(厚待)하라 하시더니 이제 소백산으로 온 손님을 보니 범인(凡人)이 아니요 또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말과 맞는지라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말씀이 아직 귀에서 떠나지 않는데 당신은 그 부탁을 벌써 잊었습니까 하기에 내 또한 아내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우리 아버님 임종할 때의 일을 깨달았노라』  하고 극력(極力)으로 신사 일행을 공경하였다.


    이 날 늙은 주인이 신사에게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자고 청하므로 신사께서 쾌히 승낙하고 의(誼)를 맹세한 뒤에 처음으로 교리(敎理)를 설명하고 입도식을 거행하니 박용걸의 온 집안이 화기(和氣)가 도는 가운데 독신가정(篤信家庭)이 되었다.

    2. 대인접물(待人接物)과 삼경도덕(三敬道德)

    신사(神師)께서 직곡리(稷谷里)에서 49일 기도를 한 후 포덕 13년 1월 5일에 각지도인(各地道人)을 모아 고천식(告天式)을 갖고 대인접물(待人接物)에 대하여 설법(說法)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도(道)는 먼저 대인접물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사람을 대(待)하는 곳에서 세상을 기화(氣化)할 수 있고 물건을 접(接)하는 곳에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느니라. 만약 사람이 있어 이 두가지의 길을 버리고 도를 구한다 하면 이는 허무(虛無)에 가깝고 실지(實地)를 떠난 것이니 천만년 법경(千萬年 法經)을 외운들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인(仁)에는 대인(大人)의 인(仁)이 있으며 소인(小人)의 인(仁)이 있나니 먼저 자기의 기운을 바르게 한 후에 타인의 기운을 화(化)하게 하는 것이 어진 사람의 마음이며 성인(聖人)의 덕(德)이니 그러므로 덕으로 사람을 화하는 자는 천심(天心)을 좇는 자요 힘으로 사람을 복종케 하는 것은 이치에 거슬리는 일이니라.』


    『대인(待人)은 첫째 은악양선(隱惡揚善)으로 주(主)를 삼되 사람이 폭려(暴戾)로써 나를 대(待)하거든 나는 인서(仁恕)로써 저쪽을 대(待)할 것이요, 저쪽이 교사(狡詐)로써 말을 꾸미거든 나는 진실(眞實)로써 저쪽을 대(待)할 것이며, 저쪽이 세(勢)와 이(利)로써 나를 욕하거든 나는 지정(至正)과 공의(公義)로써 저쪽에 대(待)하면 비록 천하(天下)라도 화(化)할 수 있나니라.』


    『요순(堯舜)의 세(世)에 백성이 다 요순(堯舜)이 되었다 하나 백성이 어찌 다 요순의 덕(德)을 가졌으리오마는 요순의 교화(敎化)가 세상을 훈도(薰陶)함이 마치 풀 위에 바람과 같아서 만민(萬民)이 스스로 그 도치중(陶治中)에 들어 있음을 이름이니 그러므로 군자의 덕은 스스로 고립되지 아니하고 사람으로 더불어 함께 크며 함께 자라는 것이니 제군은 스스로 독선하지 말고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기화(氣化)하기를 도모하라.』


    『만사(萬事) 말하기는 쉽되 행하기는 어려우니 여기에서 처음으로 도력(道力)을 보는 것이라. 도력은 은인(隱忍)하는 곳에 있고 우(愚) 묵(默) 눌(訥)의 중(中)에 있는 것이니라.』


    『접물(接物)은 우리 도(道)의 거룩한 교화(敎化)이니 제군은 일초일목(一草一木)이라도 무고(無故)히 이를 해(害)치지 말라. 도 닦는 차제(次弟)가 한울을 공경할 것이요 사람을 공경할 것이요 물건을 공경하는데 있나니, 사람이 혹 한울을 공경할 줄 알되 사람을 공경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을 공경할 줄은 알되 물건을 공경할 줄은 알지 못하나니, 물건을 공경치 못하는 자 사람을 공경한다 함이 아직 도(道)에 달(達)치 못함이니라.』


    『이천식천(以天食天)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이라 모든 물건이 또한 나의 동포(同胞)이며 모든 물건이 또한 한울의 표현이니 물건을 공경함은 한울을 공경함이며 한울을 양(養)하는 것이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물건과 더불어 추이(推移)하는지라 제군은 물(物)을 식(食)함을 천(天)을 식(食)하는 줄로 알며 인(人)이 내(來)함을 천(天)이 내(來)하는 줄로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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