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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유적지]  천도교중앙대교당

    명칭 천도교중앙대교당
    설명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곳
    주소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방문자 수 2905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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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천도교와 3.1독립운동 ◇



    1. 독립자금 마련 위해 대교당 신축

    중앙총부는 대교당 신축과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3.1독립운동 전해인 포덕 59년 4월 4일 부구총회(部區總會)에서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각 연원을 통해 매 교호당 10원 이상씩의 건축특성금을 10월 28일 대신사 탄신기념일까지 내도록 하였다. 모금이 시작되자 총독부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한성은행(漢城銀行)에 3만원, 상업은행(商業銀行)에 3만원, 한일은행(韓一銀行)에 6천6백원 등 모두 6만 6천 6백원의 예금을 동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많은 교인들은 논밭과 황소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교인들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축성금을 되돌려 받은 것처럼 위장하기도 하고, 성금액수를 10분의 1로 줄여 기장(記帳)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당건축성금으로 약 1백만원의 거액이 모아졌다. 그중 대교당과 중앙총부 청사 건축에 사용된 27만여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성금이 3.1독립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총부는 교인들이 낸 성금으로 이 해 가을에 윤치오(尹致旿) 소유의 경운동 88번지 대지를 2만원에 매입하고 그 인근 부지를 더 매입하여 모두 1,824평을 마련하여 12월 1일 교일기념일(현도기념일)에 개기식((開基式) : 터를 닦기 시작할 때 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대교당 건축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中村與資平)에게 의뢰했다. 이것은 국내 최대규모의 교당을 짓기 위해서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제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에게 설계를 하도록 한 것이다. 3.1독립운동으로 주춤했던 건축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건축허가를 신청했으나 예상했던대로 설계미비를 이유로 허가가 거부되었다. 이유는 원래의 대교당 설계가 현 대교당의 갑절이나 되는 초대형 건물인데다가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할수 없이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은 후 7월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방해를 막기 위해 총감독 역시 일본인 후루다니(古谷虎市)에게 맡겼고, 건축청부는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에게 맡겨 포덕 62년(1921) 2월에 완공하였다.


    완공된 대교당의 건평은 1층 212평 8홉을 비롯해서 4층까지 모두 280여평이며, 중앙총부 청사는 본관 2층 199평을 비롯해서 숙직실과 창고 두개, 화장실 두개 등 모두 262평 6홉이다. 대교당과 중앙총부 본관이 완공되자 2월 28일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이 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앙대교당은 몇 차례의 수리공사를 실시하다가 포덕 114년 6월에 목재로 된 밑바닥을 뜯어내고 콘크리트로 개체하여 그 위에 인조석(人造石) 물갈기공사와 난방시설을 하였다. 그리고 중앙대교당은 포덕 119년 12월 18일부로 서울지방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2. 독립운동의 계획과 추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의암성사는 경술국치 이후 줄곧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교단의 내실을 다지면서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한 구상의 일환으로 중앙총부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덕 59년 4월부터 전국 교인들로부터 대교당을 건립한다는 명목으로 특성금을 모금하여 대비하였다.


    당시 중앙총부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 경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교단 간부진이 의암성사에게 인쇄소의 폐업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으나 의암성사는 『국가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일조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함이라 내 생각한 바 있으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훗날 3.1운동 때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의암성사의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암성사는 이미 포덕 59년 8월 지일기념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핵심간부들을 가회동 자택으로 불러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謄寫機) 1대씩을 반드시 구입하도록 지시하여 훗날에 대비하였다.


    포덕 59(1918)년은 5년동안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의암성사는 평소 국내신문은 물론 일본에서 발간되는 신문까지도 구독하면서 시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측근들에게도 국제정세의 변화에 항상 관심을 갖고 살펴보도록 환기시켰다. 이 해 8월 14일 지일기념일에 의암성사가 전국 교구장들에게 「인여물개벽(人與物開闢)」에 대한 설법을 한 것도 장차 시국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데 뜻이 있었다.

    (1) 국권회복 위한 49일 특별기도 실시


    포덕 59(1918)년 11월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할 전후처리 14개 조항이 일본신문에 보도 되었다. 그 14개 조항 중 피압박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들어 있었다. 권동진 · 오세창 · 최린은 비록 우리나라가 거기에 해당되지 않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도 민족자결운동을 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포덕 60(1919)년 1월 상순에 상춘원으로 의암성사를 찾아가 이 문제를 비롯해서 해외 동포가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기로 하였다는 보고와 아울러 대책을 상의했다. 그러자 의암성사는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 바 있으니 제군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릇됨이 없이 하라』고 말하였다.


    사실상 중앙총부는 국권회복을 위해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특별기도를 실시하도록 이미 전국 교구에 시달하여 전체 교인들이 술과 담배를 금한 가운데 매일 오후 9시에 일제히 촛불을 밝히고 기도식을 봉행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의암성사는 그 전해 12월 24일 인일기념에 상경한 간부들을 상춘원으로 불러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특별기도에 달려 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와 아울러 중앙총부는 서울 · 해주 · 의주 · 길주 · 원주 · 경주 · 서산 · 전주 · 평강의 아홉 곳에 대표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의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케 함으로써 3.1독립운동을 앞두고 전국의 교단조직을 결속해나갔다.

    (2) 독립운동의 3대원칙 확정


    1월 중순 어느 날 동경 유학생인 송계백이 보성고등학교 시절 은사인 최린을 찾아와 동경에서 와세다대학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린은 감격한 나머지 기왕에 계획하고 있던 국내의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최린은 권동진 · 오세창을 수시로 만나 협의한 끝에 1월 하순에 3인이 함께 의암성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실천 가능한 방법에 대해 논의한 결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나라의 독립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거족적인 시위운동을 일으켜 우리 민족의 독립열망을 대내외에 알리기로 결정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원칙」을 정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 거사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일은 최린이 담당하기로 하고, 오세창 · 권동진은 대내적인 일을 담당하되 수시로 협의하여 그 결과를 의암성사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3대원칙이 정해지자 당시 보성학교 교장인 최린은 2월 상순에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송진우, 그 학교교사 현상윤, 역사연구가 최남선을 자기 집에서 극비리에 만나 뜻을 같이 하기로 합의하고 구한국 왕실인사를 비롯한 각계 인사를 민족대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각자가 분담하여 일차로 박영효 · 윤치호 · 한규설 · 윤용구 등을 접촉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포섭계획에 실패한 이들은 실망하지 않고 대상을 바꾸어 기독교와 합작하자는데 합의하고 먼저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을 만나기로 하였다. 2월 7일 인편을 통해 연락한 끝에 2월 11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측의 계획을 전해 듣고 기독교계 인사와 협의 후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2월 8일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 가운데 이승훈은 선천 · 평양 등지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접촉한 후 17일 상경하여 박희도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상의하고 21일 이승훈은 최남선과 같이 최린을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은 그동안 기독교측 인사들을 만난 경위를 설명하면서 기독교측은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사인만큼 통합해야 한다고 강력히 역설했다. 그러자 이승훈은 동지들과 다시 의논하여 연락하겠다고 하면서 시일이 급박하여 기독교측이 군자금 마련이 어려우니 5천원을 변통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5천원이 어렵다면 3천원이라도 마련해달라고 하였다.

    (3) 기독교측에 군자금 5천원 지원


    최린은 그날 저녁 의암성사를 만나 그동안의 경위와 함께 기독교측이 요구한 군자금에 대해 보고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은행예금을 전부 왜경에게 압수 당하여 재정이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의암성사는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22일에 중앙총부 금융관장 노헌용이 마련해준 5천원을 가지고 소격동에 있는 이승훈의 숙소로 찾아가 ‘김자성’이라는 암호명함을 대고 들어가 5천원을 전달했다.


    그날 밤 이승훈과 함태영이 최린의 집에 왔다. 그런데 기독교측에서는 그동안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의한 끝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이에 최린은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외적 환경을 설명하고 우리의 자주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야 옳다고 역설하였다. 23일 밤 함태영의 집에 모인 기독교측은 천도교측의 주장에 공감하고 천도교와 합동으로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후 24일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의 집을 방문하여 이를 합의했다. 이와 아울러 박희도를 통해 학생대표들도 이 원칙에 동의,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린은 경술국치 이후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종교단체만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뿐만이 아이라 불교계도 독립운동에 동참시켜야 민족대표로서의 명분이 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24일 밤 일본 유학시절부터 친교가 있는 양양군 통천면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계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진행상황을 말하자 쾌히 동참하기로 합의하였다. 한용운은 그 후 불교대표를 물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해인사 승려 백용성의 동의를 얻어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4) 3개 종단 민족대표 33인 선정


    이렇게 해서 3개 종단이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민족대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최린은 유교측과도 교섭하려 하였다. 그 후 최린 · 이승훈 · 함태영 · 한용운 · 최남선은 수시로 최린의 집에서 비밀리에 만나 제반 진행계획을 논의하였고 최린은 이를 토대로 권동진 · 오세창을 만나 협의한 후 의암성사에게 수시로 보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에서 15명(손병희(孫秉熙), 김완규(金完圭), 권동진(權東鎭), 권병덕(權秉悳), 라룡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양한묵(梁漢默), 이종훈(李鍾勳), 이종일(李鍾一), 임례환(林禮煥), 박준승(朴準承),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홍병기(洪秉箕), 홍기조(洪基兆)), 기독교에서 16명((감리교: 이필주(李弼注), 김창준(金昌俊),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최성모(崔聖模), 장로교:길선주(吉善宙), 김병조(金秉祚), 양전백(梁甸伯), 유여대(劉如大), 이갑성(李甲成), 이명룡(李明龍), 이승훈(李昇薰)), 불교 2명(백용성(白龍城), 한용운(韓龍雲)) 등 33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고종 임금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으로 국민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국장(國葬)이 3월 3일로 정해졌기 때문에 국장을 앞두고 지방에서 많은 사람이 상경할 것이니 거사일을 그 이틀 전인 3월 1일로 정한다면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다고 판단하여 이날로 정하였다. 또한 3과 1이라는 숫자는 3개 교단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도 합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학생과 민중들로 하여금 만세시위를 감행하기로 하였다. 그 밖에 독립선언서 및 기타 문서의 기초와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담당할 것, 독립선언서의 당일 배포와 지방 발송은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서 각기 담당할 것,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측에서 담당하고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측에서 담당할 것 등을 합의했다.

    3. 독립선언서의 작성 서명과 인쇄 배포

    천도교측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서 건의서· 청원서의 작성 및 선언서의 인쇄를 담당하기로 하고 이를 최남선이 주관하였다. 최린은 1월 말경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 귀족원 및 중의원,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독립통고문,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때 최린은 의암성사 · 권동진 · 오세창과 함께 협의한 독립선언서 취지를 최남선에게 주면서 참고하도록 하였다. 최남선은 2월 중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 초안을 작성하고 최린에게 가져왔다. 최린은 이를 의암성사와 권동진 · 오세창에게 보내어 검토케 하고 함태영을 통해 기독교측에도 보내어 동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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