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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신사]  보은 취회지(장내리)

    명칭 보은 취회지(장내리)
    설명
    주소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
    방문자 수 2530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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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1. 보은취회(報恩聚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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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취회장소)

    포덕34년(1893) 3월10일에 신사(神師)께서 청산군 포전리 (現 충청북도(忠淸北道)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 김연국(金演局)의 집에서 대신사의 조난향례(遭難享禮)를 거행할 때 손병희 이관영 권재조 권병덕 임정준 이원팔 등 여러 두목(頭目)이 참석하였다. 예식이 끝난 후 여러 두목이 신사에게 고하기를 『선사(先師)의 지극한 원통을 아직 펴지 못하였고 상소(上疏) 후 오늘에 이르도록 하등의 칙교(勅敎)가 여러 고을에 내려짐이 없을 뿐 아니라 관리(官吏의 지목(指目)이 도리어 전보다 더 심하여 도인(道人)된 자 생명재산을 하루도 안보하기 어려우니 선생께서는 다시 방책을 지시하소서』 하였다. 이에 신사(神師)께서는 결단을 내려 『내 방금 보은장내(報恩帳內)로 갈 터이니 제군은 각처에 글을 내어 도인(道人)으로 하여금 모두 모이게 하라.』 명하고 이달 11일에 보은에 당도했다. 이때 보은 장내에 모여든 도인이 이미 수만명에 이르렀으므로 우선 대도소(大都所)를 설(設)하고 신사께서 친히 임석하여 다음과 같은 통유문을 내렸다.

    통유문

    이 통유문은 무릇 입도(入道)라는 것이 중(中)에 위치하여 천시(天時)를 받들고 지리(地理)를 순(順)히 하여 써 위를 섬기고 아래를 기르는 것이라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는 절개를 새워 나라에 죽는 것이 이것이 인륜(人倫)의 큰 것이라. 무릇 우리 동방(東方)은 비록 바다 모퉁이에 편재(偏在)하였으나 천하(天下)의 동(東)쪽인지라 단군(檀君)의 강역(疆域)을 열므로 부터 기자성조(箕子聖朝)의 봉건(封建)에 이르기까지 천시(天時)의 정(定)함과 인륜(人倫)의 차례가 스스로 바꾸지 못할 규범(規範)이 있도다. 성주현신(聖主賢臣)이 사이사이 이어나와 전장법도(典章法度)와 예락교화(禮樂敎化)가 환연(渙然)히 창명(彰明)하여 천하(天下)에 들린 것은 그 인륜(人倫)이 가장 밝고 더욱 나타난 때문이라 어찌하여 중년이래(中年以來)로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워 강기(綱紀)가 퇴이(頹弛)하고 법약(法約)이 문란(紊亂)하여 이적(夷狄)의 화(禍)가 중토(中土)를 침릉(侵凌)하고 우리 동방(東方)을 침범(侵犯)하여 주치횡행(周馳橫行)하되 염연(恬然)히 듣고 심상(尋常)하게 보아 그 끝이 화(禍)가 국가(國家)에 미칠 것을 알지 못하는지라 성인(聖人)이 근심하사 대도(大道)로 가르치시니 무릇 우리 도인(道人)이 일심(一心)으로써 지킨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뜻을 세워 충효(忠孝)의 역(域)에 세워 죽기를 맹세하고 변(變)치 아니하여 제가치국(齊家治國)의 마음으로써 책임(責任)을 삼는 것도 생각컨대 응당 얼마가 있은지라 하물며 왜적(倭賊)은 일월(日月)을 같이할 수 없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로되 시양(豕羊)의 무리에게 곤난(困難)함을 보았으니 또한 차마 말해 무엇하랴. 방금(方今) 국세(國勢)가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이 급(急)하되 그것을 풀줄을 알지 못하니 오히려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우리들이 비록 초야토민(草野土民)일지라도 선왕(先王)의 녹(祿)을 입어 써 조선(祖先)을 안보하며 국군(國君)의 땅에서 밭갈아써 부모를 봉양(奉養) 하나니 신민(臣民)의 분(分)에 직업(職業)은 비록 다르나 의(義)인즉 하나이라 어찌 동로서사(同老誓死)의 의(義)가 없으리오. 지금 황천(皇天)이 실(實)로 더러운 기운을 싫어하여 무극(無極)의 조화(造化)로써 주시니 이는 진실로 지사남아(志士男兒)의 입절건의(立節建義) 할 때로다. 조생(祖生)의 격즙(擊楫)과 범공(范公)의 람비는 장(壯)하도다 뜻이여. 문산(文山)의 경천(擎天)과 육부(陸夫)의 봉일(捧日)은 자품(姿品)이 이미 빼어나고 양공(襄公)이 원수와 연소(燕昭)의 부끄러움은 보복(報復)에 한정(限定)이 있으니 시호시호(時乎時乎)며 시재시재(時哉時哉)라. 지금 우리 성상(聖上)은 순덕(純德)이 인유(仁柔)하고 만기(萬機)를 총찰(總察)하시되 안에 현양(賢良)의 좌(佐)가 없고 밖에 웅용(雄勇)의 장(將)이 없어 외적(外賊)이 틈을 타서 기회(機會)를 엿보아 절박(切迫)함이 조석(朝夕)에 있으니 복원(伏願)하건대 모든 도유(道儒)는 일심(一心)으로 뜻을 같이하여 요사(妖邪)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종사(宗社)를 극복(克服)하여 다시 중광(重光)의 일월(日月)을 밝게 하는 것이 어찌 사군자(士君子)의 충효(忠孝)를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인(仁)이란 생육(生育)의 봄이요 의(義)란 수장(收藏)의 가을이라 지인(智仁)이 비록 덕(德)이긴 하지만 용(勇)이 아니먼 달(達)하지 못하나니 복원(伏願)하건대 모든 군자(君子)는 본연(本然)의 의기(義氣)를 극여(克勵)하여 써 대충대공(大忠大功)을 국가(國家)에 세우면 심행(甚幸)이겠노라.

    계사(癸巳) 3월16일

    이 때 보은장내(報恩帳內)에는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경기(京幾) . 강원도(江原道) 등 각지(各地)에서 수만명(數萬名)의 도인(道人)들이 운집(雲集)하였는데 각포(各包)에는 접주(接主)가 있어 그 포내(包內)를 통솔(統率)하였다. 당시 대접주(大接主)는 다음과 같다.

    충의대원주(忠義大援主)에 손병희(孫秉熙).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에 손천민(孫天民).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에 박인호(朴寅浩). 옥의대접주(沃義大接主)에 박석규(朴錫圭).
    충경대접주(忠慶大接主)에 임규호(任奎鎬). 호남대접주(湖南大接主)에 남계천(南啓天).
    태인대접주(泰仁大接主)에 김개남(金開南). 부안대접주(扶安大接主)에 김락철(金洛喆).
    청풍대접주(淸風大接主)에 성두환(成斗煥). 문청대접주(文淸大接主)에 임정준(任貞準).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에 이원팔(李元八). 상공대접주(尙公大接主)에 이관영(李觀永).
    금구대접주(金構大接主)에 김덕명(金德明). 무장대접주(茂長大接主)에 손화중(孫華中).
    시산대접주(詩山大接主)에 김락삼(金洛三). 옥구대접주(沃溝大接主)에 장경화(張景化).
    완산대접주(完山大接主)에 서영도(徐永道). 청산대접주(靑山大接主)에 박원칠(朴元七).
    고산대접주(高山大接主)에 박치경(朴致京). 풍대대접주(風大大接主)에 김석윤(金錫允).
    봉성대접주(鳳城大接主)에 김방서(金邦瑞). 공주대접주(公州大接主)에 김지택(金知澤).
    예산대접주(禮山大接主)에 박희인(朴熙寅). 문의대접주(文義大接主)에 임정재(任貞宰).
    홍천대접주(洪川大接主)에 차기석(車基錫). 인제대접주(麟蹄大接主)에 김치운(金致雲).

    각포(各包)에는 포기(包旗)를 세우고 도인(道人)은 일정한 대오(隊伍)를 정하여 막하(幕下)에 있게 하되 출입(出入)에 심고(心告)를 하고 무시(無時)로 주문(呪文)을 외우며 때로 교리(敎理)를 강론(講論)하였는데 만인의 행동이 한 사람과 같아 조금도 문란함이 없었다. 특히 청결(淸潔)을 위주(爲主)하여 침이나 코를 아무데나 뱉지 아니하며 모든 배설물(排泄沕)은 땅에 묻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행동을 엄숙히 하며 상인(商人)의 음식값은 한푼도 틀림없이 각자 스스로 계산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모두 위의(威儀)와 덕풍(德風)을 칭찬해 마지 않았고 도(道)를 비방하던 사람들까지도『동학(東學)은 하지마는 행위(行爲)는 바르다』는 말이 원근(遠近)에 자자하였다. 그리고 또한 동학군은 도소(都所)를 중심으로 주위(周圍)에 돌로 성(城)을 쌓아 사방(四方)에 문(門)을 내고 중앙(中央)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큰 기(旗)를 세웠으니 이때가 바로 3월 18일이었다.

    참고 : 이 무렵 보은(報恩) 장내(帳內)에 모인 도인의 수(數)에 대한 기록이 일정치 아니하여 정확한 숫자를 표시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으니 날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도인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확실한 숫자를 표시하지 못한 듯하다. 나타난 기록들을 상고해 보면 『3월11일 해월신사께서 보은에 이르니 도인회자수만인(道人會者數萬人)이라.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 제2편 55면)』한 것과 하(夏) 4월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로 하고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도(東學徒)를 진무(鎭撫)키로 하였는데 이때 동학군이 보은에 모인 수를 『시시동비회보은자팔만인(是時東匪會報恩者八萬人)』이었다고 한 매천야록(梅泉野錄)(124면)의 기록과 김윤식(金允植)의 속음청사(續陰晴史) 상권 261면에는『취자가 이만칠천여인(聚者可 二萬七千餘人)』(3월26일자)이라 있는데 1주일 후 4월3일자에는 『회자위칠만여인(會者爲七萬餘人)』(동서263면)이라는 기록이있다. 황현(黃炫)과 김윤식(金允植)은 한결같이 동학도인(東學道人)들을 동비(東匪)라고 매도(罵倒)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기록했으니 이 숫자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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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동학도소(東學都所)에서는 정부에 소문(疏文)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어느덧 동학군(東學軍)이 보은에 모여 난(亂)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조정(朝廷)에까지 전(傳)해저서 정부에서는 크게 놀래어 곧 청주병사(淸州兵使) 홍계훈(洪啓薰)을 명(命)하여 즉시 토멸코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어윤중(魚允中)이 상감(上監)께 아뢰기를 「사실을 탐지해보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여 인민을 토벌하는 것은 국가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하여 정부에서도 다시 태도를 완화하여 어윤중을 선유사(宣諭使)로 파견. 사실을 조사해 보도록 하였다.
    이때 동학(東學) 도소(都所)에서는 어윤중을 상대로 보은 삼문 밖에 다음과 같은 방문을 게시하였다.

    방 문(榜 文)

    대저 인사의 어려움은 세가지가 있으니 절의(節義)를 세우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힘을 다하여 정성으로 효도하여 어버이를 섬기다가 죽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어려움이요. 정절을 지키고 열녀를 본받아 남편을 좇다가 죽는 것은 아내의 어려움이라.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것이요. 일이 있고 없는 것은 때가 정하는 것이라 무사안락(無事安樂)한 때에 나서 충효의 도(道)를 즐기며 유사환난(有事患難)의 시기(時期)에 나서 충효의 곳에 죽는 것은 이것이 신하와 자식으로서 어렵고도 쉬우며 쉽고도 어려운 것이라 생(生)의 낙(樂)이 있는 자(者)는 임금이나 어버이의 어려운 일에 죽으려 하지 않고 죽겠다는 마을이 있는 자(者)라야 임금과 어버이의 어려운 일에 죽기를 즐거워 하나니. 죽음을 아끼는 자는 능히 신하와 자식의 의리를 이루지 못하며. 죽기를 즐겨하는 자라야 능히 충효의 절개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왜양(倭洋)의 적(賊)이 심복(心腹)에까지 들어와 있으니 어지러움이 극도(極度)에 이른지라 진실로 오늘의 서울 형편을 보면 마침내 이것이 오랑캐의 소굴이 된지라 가만히 생각하면 임진년(壬辰年)의 원수와 병인년(丙寅年)의 치욕(恥辱)을 어찌 참아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참아 잊을 수 있으리오. 지금 우리 동방(東方) 삼천리 지역(地域)은 다 짐승들의 발자국이 되었고 오백년 종묘사직(宗廟社稷)은 장차 쑥밭이 되게 되었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지금 어디 있는가. 하물며 왜적(倭賊)은 도리어 회한(悔恨)의 마음을 두어 화단의 씨를 품고 방금 그 독(毒)을 펴려하니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있으되 이것을 염연(恬然)히 보아 편안하다고 이르니 지금 형편이 마치 불더미 위에 앉은 것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어리석은 백성이나 오히려 선왕(先王)의 법(法)을 이어받고 이 나라 국토에서 밭을 갈아 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니 신하와 백성된 직분(職分)에 귀천(貴賤)은 비록 다를망정 충효(忠孝)야 어찌 다르리오. 원컨대 적은 충성이지만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구구(區區)한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할 길이 없으니 생각컨대 각하(閣下)께서는 세가충양(世家忠良)으로 길이 국록(國祿)을 보전하고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심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성에 있다는 것은 저희들과 비(比)할 바 아니리오. 옛말에 이르기를 「큰 집이 기울어질 때에 한 나무로 버티기 어렵고 큰 물결이 밀려 올 때에 조그만 배로 막기 어렵다」하였으니 저희들 수만명이 죽기로써 힘을 같이하여 왜양(倭洋)을 소탕하고 나라에 크게 보답(報答)하는 의리(義理)를 다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각하(閣下)께서는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충의의 선비와 관리(官吏)를 모집하여 다 같이 국가를 돕기를 천만(千萬) 바라나이다.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에 임명(任命)된 어윤중(魚允中)은 3월 26일 공주영장(公州營將) 이승원(李承遠)과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 등을 대동하고 장내리 도소(都所)에 달려와 동학도인(東學道人)들에게 해산하여 각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는 한편 조정(朝廷)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동학당(東學黨)이 모인 것은 선사(先師)의 신원(伸寃)과 척양척왜(斥洋斥倭) 및 동학군에 대한 침학행위(侵虐行爲)의 시정(是正)을 요구할 뿐이요 그 들의 손에는 무기(武器)를 가진 바 없고 오직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송주(誦呪)를 일삼으며 즉시 해산할 기색은 보이지 않으나 오직 정부에서 내려줄 다음 처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해산명령을 받은 동학군(東學軍)들은 다시 다음과 같은 방(榜)을 게시(揭示)하는 한편 별도(別途)로 어윤중에게 호소하는 글을 보냈다.

    방 문(榜 文)

    무릇 왜양(倭洋)이 견양(犬羊)과 같다는 것은 우리 동방(東方) 삼천리에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하는 바람이 없고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없거늘 어찌하여 노성(老成)하고 또 밝게 살피는 순상(巡相)께서 도리어 왜양(倭洋)을 배척(排斥)하는 우리들을 사류(邪類)라고 하는가. 그러면 견양(犬羊)에게 굴복하는 자가 정류(正類)가 될 것인가. 또 왜양(倭洋)을 공격하는 사람을 죄를 주어 잡아가둔다고 하면 주화매국(主和賣國)하는 자가 높은 상을 받을 것인가"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것이 운(運)인가 명(命)인가. 어찌 우리 순상(巡相)의 총명됨이 이다지도 살피지 못함이 심(甚)할까. 길거리에 이와같이 게시(揭示)하는 것은 혹 미혹된 자(者)들이 관(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왜양(倭洋)을 섬길까 두려워 함이라.


    이때 조정(朝廷)에서는 다시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로 삼고 홍계훈(洪啓薰)에게 5백명의 군대(軍隊)를 인솔케 하여 일시 보은(報恩)에 주둔(駐屯)하여 효유해산(曉喩解散)하도륵 결정하였다. 4월1일 어윤중(魚允中)이 청주영장(淸州營將) 백남석(白南奭). 보은군수(報恩郡守) 이중익(李重益)을 대동하고 장내에 이르러 칙교(勅敎)를 낭독하고 효유 하기를『관리(官吏)의 탐학과 살상행위는 반드시 엄히 징벌(懲罰)하리니 제군은 각각 집에 돌아가 업(業)에 편안하라. 본관(本官)이 조정(朝廷)에 보(報)하여 소원을 펴게 하리라.』하였다. 이에 도인들은 신사(神師)의 명(命)에 의하여 3일까지 모두 해산하였다.

    참고 : 어윤중(漁允中)의 장계에 의하면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 조병식(趙秉式)은 탐학무도(貪虐無道)하여 불효불륙(不孝不陸)과 간음잡기(奸淫雜技)등 허구(虛構)의 죄명을 씌위 양민(良民)의 재산을 탈취함은 물론이요 공금(公金)과 계전(契錢)을 가로채어 사복(私腹)을 채우며 전영장(前營將) 윤영기(尹泳璣)와 공주진영장(公州鎭營將) 이존필(李存馝)과 공주 공주 신천서(愼天瑞) 영리(營吏) 고복은(高福殷) 서형래(徐亨怏)등을 내세워 돈 있는 자는 돈을 바치고 무사케 하고 돈 없는 자는 잡아가두어 형장(刑杖)을 가하며 유배(流配)를 시키는 등 기탄없이 행하였으니 그 예로서 각읍보진전(各邑補賑錢) 육만일천육백량(兩)을 전혀 진휼금(賑恤金)으로 내주지 않고 온양궁 수리(溫陽宮 修理)에 사만량을 쓰고 산성역사(山城役事)에 이만량을 썼다고 하나 온양궁(溫陽宮) 수리(修理)에 든 비용(費用)은 불과 팔천량이오 산성역사(山城役事)에는 따로 돈을 거두었다는 것이 사실이며 보은군 대동전 삼천사백량은 구경채(舊京債)라 하여 향리(鄕吏)를 잡아가두고 빼앗아갔으며 태안(泰安) 기속전(技贖錢) 육만육천량을 탐욕에 가득찬 군수(郡守)를 시켜 강제로 징수하여 한 고을이 텅 빌 정도가 되었으며. 가장 통분한 것은 공주민(公州民) 오덕근(吳德根) 등의 대지(垈地)를 빼앗기 위하여 간음(奸淫)으로 무고(誣告)하여 모든 오씨(吳氏)를 진영(鎭營)에 잡아가두고 협박하여 가산을 몰수(沒收)하고 군인(軍人)을 발동(發動)시켜 군악(軍樂)을 울리며 남자와 부인들을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밖으로 내쫓아 노약(老弱)의 죽은 자 오륙인으로서 촌락(村落)이 폐허(廢墟)가 되어 초목(草木)이 상조(相吊)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공주(公州)의 김현익(金顯益), 임태순(林台淳), 고성용(高成龍)과 은진(恩津)의 최성숙(崔成叔)과 홍주(洪州)의 박계화(朴桂和)와 홍산(鴻山)의 김팔서(金八瑞)등을 간음(奸淫)으로 몰아 그 가산(家産)을 몰수하였으며. 아산(牙山)의 김상준(金相俊)을 공주진(公州鎭)으로 옮겨 가두고 몇 만량(萬兩)을 내라고 혹독한 형(刑)을 가(加)하여 견디다 못한 그 사람은 자살을 하고 말았으며 연산(連山)의 전감역(前監役) 이익제(李益濟)에 대(對)하여는 그의 아들이 이웃 처녀와 간음(奸淫)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그 처녀로 하여금 죽게 하였는데 먼저 일만양의 뇌물을 받고 나서 진령현감(鎭岺縣監) 이시우(李時雨)로 하여금 이웃 처녀의 무덤을 파내어 검사한 후 옥사(獄事)로 위협하며 연산(連山)과 은진(恩津)에 있는 옥답(沃畓) 이십여석(二十餘石)지기를 빼앗으며. 기타 민전(民田)과 민보(民洑)를 강제로 빼앗아 자기소유(自己所有)로 만들었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다른 사람에게 입장(入葬)을 허(許)하며 이미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 후에 다시 입장(入葬)케 한 일도 있었으며. 또 뇌물받은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김제홍(金濟弘)을 죽이고 이에 대하여 그 마을사람에게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며. 도내(道內) 공사전간(公私錢間) 그에게 빼앗긴 돈은 당전(當錢)으로 육십사만사천삼백구십일량(兩)이요 엽전(葉錢)으로 십만팔천삼백구십량인바 인명(人名)과 액수(額數)는 별도로 책을 만들어 올릴 것이요 이것은 명확히 드러난 것만 조사한 것으로 실수(實數)의 십분지이삼(十分之二三)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위인(爲人)들이 방백수령(方伯守令)이 되어 동학(東學)을 금한다는 구실로 실제에 있어서는 탐학과 토색(討索)을 일삼았으니 그 당시의 도인들의 곤욕과 울분과 원한은 그 극에 달하여 생사(生死)를 내걸고 이 모임에 참가하였던 사람이 많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초유(初有)의 가장 큰 조직적인 민간시위운동(民間示威運動)이었으며 또 이것이 다음해에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운동(甲午東學革命運動)의 전주곡(前奏曲)이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해 7월에 신사(神師)께서 칠곡군율림리(漆谷郡栗林里) 곽우원(郭祐源)의 집에서 인동(仁同) 배성모(裵聖模)의 집에 이거(移居)하였다가 금산군(金山郡) (현 금릉군) 편사언(片士彦)의 집에 이르니 서병학(徐丙鶴) 등이 찾아와서 대신사(大神師)의 신원(伸寃)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를 제거키 위하여 정부(政府)를 공격하고 일거(一擧)에 국가를 혁신할 것을 진언(進言)하였으나 신사(神師)께서 이에 응(應)하지 않고 시기가 아직 이르니 기회를 기다리라고 효유(曉喩)하였다.


    10월에 신사(神師)께서 황간(黃澗)을 거쳐 상주왕실촌(尙州旺實村)에 있었는데 손병희(孫秉熙) . 조재벽(趙在壁)의 주선으로 청산군문암리(靑山郡文岩里) 김성원(金聖元)의 집에 이거(移居)하였다. 그리고 10월 28일에 신사(神師)께서 강원도인제(江原道麟蹄) 최영서(崔永瑞)의 집에서 대신사탄신향례(大神師誕辰享禮)를 지냈다.


    이해 11월에 각군관리(各郡官吏)의 탐학이 더욱 심하므로 도인 수천명이 이천군(利川郡)에 모여 거의(擧義)하다가 관병(官兵)의 출동으로 저지되고 두령(頭領) 신택우(申澤雨) . 이상옥(李祥玉) . 홍재길(洪在吉) 등이 체포되었다.


    12월 27일에 신사(神師)께서 강원도홍천군서면제일리(江原道洪川郡西面濟日里) 홍창섭(洪昌燮)의 집에 이르러 손병희(孫秉熙) 손천민(孫天民) 김연국(金演局) 손병흠(孫秉欽) 임학선(林學善)등과 함께 설을 지냈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이용
    :: 보은군청 홈페이지→보은관광→여행정보→교통정보 사이트 방문
    →보은 버스 터미날
    ☎ 시내버스 : 043-542-2510 ☎
    :: 보은에서→화령,적암 관기,중률행 버스→장내리에서 하차
    자가용 이용


    :: 경부고속국도→청주IC→36번국도→25번국도(청원방향)→외속리면 505지방도
    →장내리

    :: 중부고속국도→서청주IC→충주시내→36번국도→25번국도(청원방향)
    →외속리면 505지방도→장내리

    :: 중부내륙고속국도→상주IC→25번(보은방향)→외속리면 505지방도→장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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