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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암에게 도통전수 포덕38년(1897)5월에 신사께서『심신회수(心信回水)』4자를 써서 각지 도인에게 분포하였다. 7월에 황해도와 평안도 두령들이 포덕하는데 있어 신빙할만한 명첩이 필요하여 차출해 줄 것을 청하자 신사께서 쾌히 승낙하고 종전에 사용하던『북접법헌(北接法軒)』4자를『 용담연원(龍潭淵源)』4자로 개정하여 발급하였다. 신사댁(神師宅)은 7월에, 신사께서는 8월에 여주군 전거론(全巨論)에 이거하여 낙향한 이교리(李校吏)로 위장하고 있었다.10월28일에 신사께서 대신사의 탄신향례를 인제군 느릅정 최영서의 집에서 행하고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우주는 한기운의 시키는 바이며 한 귀신의 관계하는 바니라.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억천만물이 그형상은 비록 각각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이니라. 하나는 곧 한울이니 한울이 물질의 조직에 따라서 그 나타난 것이 각각 다를 뿐이로다. 비유하면 우로의 혜택은 같으나 복숭아나무에는 복숭아가 맺히고 오얏나무에는 오얏이 맺히나니 이것은 우로 기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만물의 성질이 다른 것과 같으니라. 사람이 기운을 먹고 물건을 먹는 것은 이것이 한울로써 한울을 기르는 것이라 무엇이든지 도 아님이 없으며 무엇이든지 한울 아님이 없나니 도와 한울이 각각 순응이 있고 조화가 있어 우주의 이치가 이에 순행 하나니라. 이에 좇는 자는 바른 도요 이에 거스리는 자는 그른 도이니라. 내 독공할 때에 한울님말씀을 들었으나 이제 생각하면 이것이 아직 도에 이르지 못한 초보였나니라. 경에 이르기를『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다』하였으니 강화란 곧 심령의 가르침이라. 그러므로 마음이 바르면 강화의 교 아님이 없나니라.』 신사께서 어느 날 방에 누워있었는데 아이들의 나막신 끄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씀하기를『우주는 한 기운이라, 나막신 끄는 소리가 내가슴에 울려 아프게 하였도다. 이것은 기운을 난동시키면 한울님이 싫어하는 연고니라』하였다. 이 해『포덕38년』12월 24일에 신사께서 의암에게 도통을 전수 하였다. 2. 신사의 노환 포덕 39년(1898) 1월 2일 이었다. 당시 신사께서는 여주 전거론에 있었는데 노환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성사 이하 중요 두목들이 신사를 모시고 그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때 이종훈이 여주에 와서 임순호에게『지금 권중천의 집에서 오는 길인데 오늘 새벽 군관이 권중천 형제의 집을 포위하고 권성좌를 체포하였으니 이리로 오기 전에 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임순호는 곧 밤길을 걸어 전거론으로 가서 신사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렸으나 신사의 환후가 심한데다가 날씨도 춥고 폭설이 내려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 때 손병흠이 신사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했으나 신사께서는『급즉완 (急則緩)』이라 하면서『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경우에는 다만 천명을 기다릴 따름이라』하였다. 이튿날 (3일)아침 관군 20여명이 들이닥쳐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해월신사댁에는 의암성사를 비롯해서 손병흠, 염창순, 임순호 등 4인이 있었고 울타리를 사이에 둔 아랫집에는 김연국, 김낙철, 김낙봉 등이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모두 출타하고 김낙철이 혼자 있었다. 병정 1명이 권성좌를 데리고 들어와서『최법헌과 손응구, 김치구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낙철은『나는 은진인(恩津人)으로 지나가다가 5, 6일 전에 주인인 이모(김연국)가 이곳에서 훈학해달라고 하기에 머물러 있는 중인데 그런 사람은 모른다』하고『주인은 재작일에 성묘차로 광주에 갔다』고 하였다. 한편 신사댁에 들어간 병정들은 거칠게 수색하였다. 이때 의암성사가 병정에게 말하기를 『사대부의 집에 함부로 돌입함은 무례가 아니냐』하니 병정이 권성좌를 가리키며『이 자는 동학군으로 자기 선생댁이 이 집이라 하기에 동학괴수를 잡으러 왔노라』하므로 의암이 이에 목침을 들고 권성좌를 향하여『이놈아 너는 어떤 놈이관대 사대부의 집을 동학괴수의 집이라 무고하였느냐』하고 노한 눈으로 꾸짖으니 권성좌가 혼비백산하여 병정에게『내 잘못 보았노라』고 하였다. 병정들은 할 수 없이 권성좌를 앞세우고 두산(荳山) 밑에서 글방선생노릇을 하는 김상율의 집으로 갔다. 권성좌는 김상율을 가르키며 최법헌이라고 하자 그를 포박하고 고문을 가하였으나 법헌이 아님을 알고 다시 김연국의 집으로 왔다. 권성좌는고문에 못이겨 김낙철을 최법헌이라 하였다. 김낙철은 앞서 병정들이 왔다 갔을때 피신할 생각이 있었으나 신사와 대도를 위하여 대신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체포되어 갔다. 김낙철은 그 후 여주와 이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수원으로 다시 이송 그 해 6월에 석방되었다. 한편 이 날 밤 의암을 비롯해서 손병흠, 김연국, 임순호 등 제자들이 서둘러 신사를 가마에 모시고 집을 빠져 나와 깊은 산에 들어서니 때는 추운 겨울이라 큰 눈이 골짜기에 차고 길이 험할 뿐 아니라 나무가 무성하여 향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다만 한울을 우러러 탄식만 하고 있었다. 이때 문득 산 위에서 반짝반짝하는 작은 불빛이 보이므로 의암이 말하기를『이는 필시 나의 아우 병흠이 앞길을 찾아 먼저 가다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하고 여러 사람을 재촉하여 산 위에 오르니 그것은 담뱃불이 아니라 큰 범의 안광이라 모두들 크게 놀래어 주저하였다. 범이 물러간 뒤 범 앉았던 곳에 가본즉 산길이 분명히 보이므로 길을 찾아 등을 넘어 산 밑 어느 조그만 집에 당도하였다. 병중의 신사를 속히 모시기 위해 주인을 찾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의암이 지팽이로 방문을 두드리며『밤중에 이렇게 다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이 아닌가. 냉큼 문 안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문을 열었다. 주인은 도둑인줄 알고 무서워 하였다. 준비해 갔던 밥을 끓이게 하여 시장기를 면한 뒤에 날이 밝자 지평군 갈현 이강수의 집에 이르러 며칠간 있다가 다시 홍천군서면제일동 오창섭의 집으로 갔다. 여기서 며칠동안 묵었다가 홍천동면 방아재에 있는 용여수의 집에 당분간 머루르다가 2월 그믐에 여주 임학선의 주선으로 원주군 송골 원진여의 집으로 이거하였다. |
■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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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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