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불출산외의 중한 맹세
포덕전 1년(己未, 1859) 10월에 대신사께서 생각하기를 『내 창생을 건질 도를 얻기 위하여 10여년의 긴 세월을 주유천하하였을 뿐아니라 수련과 기도를 계속하여 왔으나 아직 조그마한 이적(異蹟)을 얻었을 뿐이오 광제창생의 대도를 찾지 못하였으니 내 선조의 유산을 탕패한 보람이 어디 있으며 내 가산을 돌보지 않은 면목이 어데 있을까? 내 이제로부터 고향에 돌아가 제세구민의 큰 도를 얻지 못하면 깊이 숨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결심하고 처자를 데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미산 아래 있는 용담정에 은거하면서 침사명상(沈思冥想)을 계속하였다.
용담정은 5칸과 4칸 (근암문집에 의함) 모두 아홉칸인데 원래 선친이신 근암공이 지은 정각으로 기봉괴석(奇峯怪石)과 청담보계(淸潭寶溪)가 어울린 경치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향(離鄕) 10여년만에 돌아와 보니 산수는 예와 같으나 인사는 많이 변하였다. 그리고 선친이신 근암공에 대한 추억이 더욱 간절하였다. 대신사는 당시의 심경을 용담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우리부친 가련하다 구미용담 좋은승지 도덕문장 닦아내어 산음수음 알지마는 입신양명 못하시고 구미산하 일정각을 용담이라 이름하고 산림처사 일포의로 후세에 전탄말가 가련하다 가련하다 이내가운 가련하다 나도또한 출세후로 득죄부모 아닐런가 불효불효 못면하니 적세원울 아닐런가 불우시지 남아로서 허송세월 하였구나 인간만사 행하다가 거연사십 되었더라 사십평생 이뿐인가 무가내라 할길없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하니 불효한 이내마음 그아니 슬플소냐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마음 비감회심 절로난다 가련하다 이내부친 여경인들 없을소냐.』
이튿날 대신사께서는 「불출산외(不出山外)」의 네 글자를 문 위에 써 붙였다. 그 뜻은 이 곳에서 도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중한 맹세였다. 동시에 처음 이름인「제선」을 「제우」로 고치고, 처음 자인 「도언(道彦)」을 「성묵(性默)」으로 고쳤으니, 제우(濟愚)란 뜻은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을 건지겠다는 자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 입춘시에는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는 시구를 써 붙이고 하루 세 때 (자(子).인(寅).오(午) 청수를 봉전(奉奠)하고 침사명상((沈思冥想)을 계속하였다.
2.천사문답(天師問答)
포덕 1년 (서기1860, 庚申) 4월 5일 대신사의 나이 37세 때였다. 지동(芝洞)(용담에서 5리 상거(相距)에 있는 장질(長姪) 세조(世祚)(자(字)는 맹윤(孟倫))가 자기 생일이므로 대신사를 청하였다. 대신사께서 세조의 집에 이르자 문득 심신(心身)이 이상(異常)하여 곧 집(용담정)으로 돌아온즉 때는 이미 사시(巳時)(오전 11시)가 되었다. 집에 이르자 곧 몸과 마음이 함께 떨리며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운 황홀한 지경에 들어갔다. 이때 문득 공중으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하였다. 대신사께서 크게 놀라 공중을 향해 물은 즉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하거늘 네 상제를 모르느냐』 하였다. 이로부터 천사문답이 시작되는 신비 체험의 경지에 들어갔는데 대신사께서는 당시의 상황과 그때의 심경을 포덕문, 안심가, 논학문, 교훈가에 나타내었다.
3. 세 가지 시험
한울님과 대신사의 문답은 경신(庚申) 4월 5일부터 다음해 봄까지 1년여 동안 수시(隨時)로 계속되었다. 그 중에 한울님이 대신사를 시험한 일이 있으니 한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금 그릇된 세상을 건지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살리고자 하니 그 마음은 아름다우나 그 뜻을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금력과 권력이라, 돈이 없으면 이 세상을 건지지 못할 것이요 권력이 없으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내 너에게 백의재상(白衣宰相)을 주어 금력과 권력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하리라.』 대신사께서 대답하기를 『부귀는 본래 제 소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돈과 권세로써 망하게 되었거늘 다시 부귀로써 세상을 건지라 하시니 이것은 사나운 것으로 사나운 것을 바꾸는 격이 될 것이라, 저의 뜻은 이것을 원치 않습니다.』
한울님이 다시 묻기를 『부귀가 네 소원이 아니라면 권모술수로써 세상을 건지라.』
대신사께서 대답하되 『이 세상은 권모와 간교로써 망하였는데 어찌 다시 적은 꾀로써 백성을 속여 일시의 평안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도 원치 않습니다.』
한울님은 다시 『그렇다면 나에게 조화의 술법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세상을 건지라.』고 하자
대신사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것은 이치에 어기는 일이라. 한울이 다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이치로 자라고 사는데 어찌 이치에 어기는 술법으로써 세상을 건지겠습니까. 이것도 소원이 아닙니다.』 대신사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울님이 또한 그른 도(道)로써 가르치시니 내 이제부터는 다시 한울님의 명교(命敎)를 듣지 않으리라」하시고 11일간이나 단식하면서 마음을 움직임이 없이 오직 수련만 계속한 끝에 드디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경지에 들어가 무궁무궁의 대도(大道)를 받게 되었다.
4.주문과 입도의 절차
대신사께서 천도를 대각(大覺)하신 후 수련을 계속하는 동안 「강화(降話)」의 가르침으로 주문과 축문을 짓고 이어서 포덕식, 입도식, 치제식, 제수식에 관한 절차를 정했다. 포덕 1년(1860) 대신사께서 득도한 첫 해에 용담가, 안심가, 처사가 등을 지었다. (처사가는 현재 전하여 지지 않고 있음.)
5. 신유포덕(辛酉布德)
대신사께서 1년동안 정성을 다하여 수련에 힘쓴 끝에 포덕 2년(辛酉, 1861) 6월 2일 비로소 용담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신사의 도는 가화(家和)로써 근본을 삼고 또는 도의 통불통(通不通)이 전(全)혀 부인수도(婦人修道)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먼저 부인에게 도를 권하였다. 본래 대신사께서는 처자를 돌보지 아니하고 주유천하 할 당시 박씨부인은 지질한 고생을 많이 하였을 뿐 아니라 대신사 각도 당시 천사문답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상으로 생각하여 극도로 낙망했던 박씨부인이었기 때문에 대신사께서 처음으로 권도할 때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대신사의 간곡한 설유에 감화되어 마침내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때 대신사께서는 부리던 여비(女婢) 두 사람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며느리로 또 한 사람은 양딸로 삼았다. 대신사께서는 이와 같이 먼저 가정포덕을 행한 후에 널리 많은 사람에게 도를 전하고자 하여 도닦는 절차를 정하였으니 입도할 때에 입도식을 행하게 함은 길이 도를 지키겠다는 맹세이며, 주문을 무시(無時)로 외우게 함은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게 하는 방법이요, 여러가지 의혹을 버리게 함은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실행케 함이요, 의관을 정제하게 하고 길 가면서 먹으며 뒷짐지는 버릇을 금함은 행실을 단정히 하게 함이요, 악육(惡肉)[개고기] 먹는 것을 금함은 도장의 청결과 인정을 양하게 함이요, 유부녀를 방색(防塞)케 함은 음탕(淫蕩)을 금함이요, 누워 주문 외우기를 금하는 것은 거만한 마음을 다스리게 함이었다.
이와 같이 도의 절차를 정함에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풍운같이 모여들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중에는 관자(冠子)성인도 있고 동자(童子)도 있으며 노인도 있고 부인도 있었다. (주: 이 무렵 용담정은 매일같이 도를 묻고 입도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게 되어 박씨사모와 수양녀는 손님 식사대접에 여가가 없었다고 하거니와 특히 대신사를 찾아오는 선비들은 의례히 곶감 한상자씩을 선물로 가져오는데 그 곶감꽂이 뽑아버린 것이 짐으로 질만치 쌓였었다고 전한다.)
이때에 대신사께서는 글짓기를 위주로 하여 글씨 쓰기와 예법 가르치기, 또는 시문을 읊으며 친히 목검을 들고 검무를 추고 또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출입기거(出入起居)에 고천(告天)할 것과 하루 세번(자.인.오) 청수 모시는 법을 가르쳤다. 특히 대신사께서는 이 무렵에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늦게 취침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온 정력을 쏟았다고 한다. (주: 수양녀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닭 울 때가 되었으니 이제는 대신사께서 주무시겠지 하고 사랑방에 나가보면 여전히 책을 보고 계셨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직 주무시겠지 하고 또 나가보면 벌써 일어나시어 책을 보고 계셨는데 그렇게도 책을 열심히 보는 이는 없었다고 한다.) --포덕전 68년(1927) 9월호 신인간지--
대신사께서는 이때에 특히 무악(無惡) 무탐(無貪) 무음(無淫)으로 심잠(心箴)을 삼았다. 이때 최자원, 백사길, 강원보, 이내겸, 최중희, 박하선, 최경상 등 많은 인사가 입도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무식한 사람이 왕희지와 같은 글씨를 쓰는 이적(異蹟)도 있었으며, 시를 읊으면 귀신도 울게 할 명작도 있었으며, 노둔하던 사람이 갑자기 총명하여지는 수도 있었으며, 용모에 화기가 돌아 탈태(脫態)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오래된 병이 스스로 낫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신사께서는 한편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근심하면서 말씀하기를 『아름답다 우리 도의 행함이여, 너희 정성이 그러하고 너희들 믿음이 높아가니 내 심히 기쁘도다. 그러나 도성덕립은 정성에 있고 또한 사람에 있거늘 혹 유언(流言)을 듣고 닦으며 혹은 유주(流呪)를 듣고 외우니 어찌 올바른 수도가 될 것인가. 심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여 매우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입도하는 사람의 수는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가기만 하였다. 입도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원근사방에 풍문이 더욱 퍼져 도고일척(道高一尺)에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이에 따라 세상의 비평이 높아가고 관사배의 지목도 또한 날로 심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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