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유적지] 금구 원평집회터
명칭 | 금구 원평집회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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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893년 3월 11일 동학교도 만여 명이 모여 ‘척왜양이(斥倭攘夷)’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
주소 |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49 |
방문자 수 | 1642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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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93년 3월 11일 동학교도 만여 명이 모여 ‘척왜양이(斥倭攘夷)’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원평은 미륵신앙의 본산인 금산사가 지척에 있고, 조선 중기 참위설을 내세워 새 세상을 꿈꿨던 정여립 세력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원평에서 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진 것은 미륵신앙과 참위설의 저항정신이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결합된 이 지역의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원평은 태인․부안과 전주․금구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당시 가장 번성했던 원평장이 열리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20여년 후 1919년 3월 20일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원평집강소(전라북도 기념물 제137호)가 있다.
<금구 원평집회터 안내문>
<금구 원평집회터>
<원평집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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