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남지방으로 떠나다
입도(入道)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원근사방(遠近四方)에 풍문이 더욱 퍼져 도고일척(道高一尺)에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이에 따라 세상의 비평이 높아가고 관리배(官吏輩)의 지목도 또한 날로 심하여 갔다. 대신사께서는 스스로 탄식하여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 모르는 세상사람 승기자 싫어할줄 무근설화 지어내어 듣지 못한 그 말이며 보지못한 그 소리를 어찌 그리 지어내어 향안설화 분분한고. 슬프다 세상사람 내 운수 좋자하니 네 운수 가련할줄 네가 어찌 알잔말고. 가련하다 경주향중 무인지경 분명하다. 어진사람 있게 되면 이런 말이 왜 있으며 향중 풍속 다 던지고 이내 문운 가련하다. 알도 못한 흉언괴설 남보다 배나하며 육친이 무슨 일로 원수같이 대접하노. 살부지수 있었던가. 어찌 그리 원수런고. 은원없이 지낸 사람 그 중에 싸잡혀서 또 역시 원수되니 조걸위학 아닐런가(중략) 아서라 이내 신명 운수도 믿지마는 감당도 어려우되 남의 이목 살펴두고 이같이 아니말면 세상을 능멸한듯 관장을 능멸한듯 무가내라 할길없네.』 (교훈가)
포덕 2년(1861) 11월에 대신사께서 지목을 피하여 제자 최중희(崔仲羲)를 데리고 비밀히 용담을 떠나 호남으로 향할 때 제자들과 떨어지기를 아쉬워하여 한장 글월을 써서 제자들에게 보낸 후 방방곡곡 인심풍속을 살피기로 하였다. 혹 시객(詩客)을 만나 시(詩)도 토론하고 혹 고로(古老)를 대하여 풍속을 물으며 혹 깊은 절을 찾아 불교의 이치도 문답하였다. 하루는 웅천(熊川)이라는 마을에서 유숙하고 길을 떠나 반나절을 오고보니 한번도 말을 내린 일도 없이 어느덧 낙동강을 건넜는지라 대신사께서 문득 말위에서 무슨 생각을 깊이 한 것을 깨닫고 자못 이상히 생각하였다. 그 다음날 의령(宜寧)이라는 곳에 와서 김공서(金公瑞)의 집에 유숙하실 때 김공서의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보이므로 대신사께서 그 연고를 물으니 공서가 대답하기를 『나의 외아들이 중병에 걸려 금방 죽게 되었소』 하고 대신사에게 치료의 방법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대신사께서 병인(病人)을 친히 보고 두어번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광채있는 눈으로 들여다 보자 병인의 몸에서 냉기(冷氣)가 사라지고 혈맥이 통하여 병이 쾌차(快差)하였다. 이에 온 집안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여 대신사를 상좌(上座)에 모시고 오래 유숙하기를 간청하면서 병 고친 원인을 물었다. 대신사께서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대의 알 바 아니로되 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자 하니 삼가 잊지 말라』하고는 『세상의 큰 병을 고치면 작은 병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니 그대 이 세상의 큰 병을 고치는 도를 하라』 하고 주문(呪文)을 써서 주인에게 주고 도를 전한 후에 곧 길을 떠났다. 며칠을 가는 동안 성주에 이르러 이순신 사당 앞을 지날 때에 대신사께서 최중희에게 이르기를 『이 세상에는 살고도 죽은 사람이 많으나 오직 충무공 이순신만은 죽었어도 오히려 산 사람이니라』 하였다.
2. 죄없는 땅
10여일만에 무주지방에 이르러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서재를 찾아 유숙하게 되었는데 시골의 노소가 모여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를 내놓고 격론(激論)이 벌어졌다. 그 중에는 「질병이 무섭다」「흉년이 무섭다」또는「전쟁이 무섭다」는 등 가지가지의 의논이 나온 끝에 마지막으로 대신사에게 『선생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무섭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대신사께서 웃으며 대답하기를『나는 無罪之地가 제일 무섭소』하였다. 여러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다시『無罪之地라니 어떠한 곳을 말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신사께서 대답하기를 『마음이 곧 죄없는 땅이지요. 마음으로는 아무러한 생각을 하여도 누가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죄줄 사람이 없지요.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은 육체로는 죄를 삼가되 마음으로는 죄를 삼가지 않고 아무렇게나 마음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죄없는 땅이 아니겠소? 그러나 그 곳이 제일 무섭다 하는 것은 모든 죄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까 마음이 제일 무섭지 않소』 하였다. 계속해서 대신사께서는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방법은 사혼(死魂)을 버리고 생혼(生魂)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이 세상이 도탄에 든 이유와 쇠운이 가고 성운이 올 운수와 천도의 밝은 이치를 말하자 그 사람들이 도에 들기를 원하므로 그 곳에서 일곱사람에게 도를 전하고 길을 떠났다.
여러날 만에 남원에 이르러 남문 밖 서공서(徐公瑞)의 집에서 10여일을 유숙하였는데 서씨 역시 대신사를 한번 대하매 범인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곧 도에 들기를 청하므로 대신사께서 그에게 도를 전하고 그의 주선으로 12월 말경 남원읍 서쪽 10리 밖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일명 용천사)에 들어가 한 암자(밀덕암)를 빌어 은적암이라 하고 수도를 시작하였는데 고향에 있는 제자들은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3. 검가(劍歌) 등 경전(經典)을 짓다.
대신사께서 은적암에 가신 후 날이 갈수록 도력이 더욱 높아지고 도리가 더욱 밝아져서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한 지기(至氣)의 강화(降化) 왕성하여 스스로 검가를 지은 후 목검을 짚고 월명풍청(月明風淸)한 밤을 타서 묘고봉(妙高峰)에 홀로 올라가 다음과 같은 검가(劒歌)를 부르며 검무(劒舞)를 추시었다.
시호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 저칼 넌줏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이 때에 그 절에 송월당(松月堂)이라는 노승(老僧)이 있었는데 그는 대신사께서 범인(凡人)이 아닌 것을 알고 때로 찾아와 도를 묻고 대답하였는데 노승과 대신사의 문답은 이러하다.
『선생은 불도를 연구하십니까』 『나는 불도를 좋아하지요』 『그러면 왜 중이 되지 않으셨소?』 『중이 아니고서 불도를 깨닫는 것이 더욱 좋지 않소.』 『그러면 유도를 하십니까?』 『나는 유도를 좋아하나 유생은 아니오.』 『그러면 선도를 하십니까?』 『선도는 하지 않소마는 좋아는 하지요.』 『그러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아무 것이나 다 좋아 한 다 하오니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두 팔 중에 어느 팔을 배척하고 어느 팔을 사랑하오?』 『네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면 선생은 몸 전체를 사랑한다는 말씀이구려!』 『나는 유도 아니요 불도아니요 선도 아니오 오직 전체의 원리인 천도(天道)를 좋아할 뿐이요.』하고 말을 마치니
노승은 이 말에 감복하였으나 필경은 새 운수와 천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뒷날 제자들이 대신사에게 『은적암 노승에게 왜 도를 전하지 않으셨읍니까?』하고 물으니 대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물든 종이는 새 그림을 그리지 못하나니 노승은 이미 물든 종이라 건지려면 찢어질 뿐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도리어 옳지 않으냐』 하였다.
포덕 3년(1862)에 대신사께서 포덕문, 논학문, 교훈가, 몽중노소문답가, 도수사 등을 지었다. 포덕 3년(1862년)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에서 새해를 맞게 되었는데 각지 문도들에 대한 정감을 금하기 어려워 권학가와 수덕문을 지었다.
대중교통 이용 |
:: 서울방면에서 :
:: 부산방면에서 : :: 남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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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강남고속버스터미날→남원행 고속버스 이용 ②서울역→전라선→남원에서 하차 서부산 시외버스 터미날→남원행 직행버스 이용(1일 6회 운행) ①시내버스 : 산성,내동버스(1일5회 운행 전화:063-631-3116)→ 산곡마을 하차→선국사(도보 약30분 소요)→은적암(덕밀암) ②택시 : 선국사 입구까지 이용(권장) |
| 자가용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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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고속국도→남원IC→첫신호등 우회전→삼성병원앞 우회전→중앙하이츠콘도경유 →교룡산 선국사(하차)→은적암(밀덕암) :: 17번 19번 24번 일반 국도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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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국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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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입구에서 선국사를 끼고 돌아서(아래 세밀도 참조)(선국사 내부로도 갈 수 있다) 선국사 뒷쪽으로 올라가면 대나무 숲 사이로 밀덕암(은적암)가는 길이 있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우측으로 좁은 갈림길이 나온다.(밀덕암 길 이라는 팻말과 한울산악회 리본이 있다)좁은 갈림길이므로 주의 하여야 한다. 우측길로 조금 가면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을 따라 20여분 올라 가면 대나무가 많이 있는 은적암 터가 나온다. 서울교구에서 만들어 세운 은적암터 표지판과 푯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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