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주로 귀환(歸還)
포덕 3년(임술, 1862년) 3월초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으로부터 경주에 돌아와 경주현 서면 백사길(白士吉)의 집에 잠시 들렸다가 최중희(崔仲羲)로 하여금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하게 한 후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은거하실 때 뜻밖에 최경상(崔慶翔)이 찾아와서 인사를 드리므로 대신사께서 매우 기뻐하면서 묻기를 『내 뜻한 바 있어 조용히 이 곳에 은거하여 아직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대는 어떻게 알고 왔느뇨.』 하니 최경상이 대답하기를 『아침에 심고를 하온즉 선생께서 완연히 박대여의 집에 계시는 듯한 감응이 있으므로 찾아왔습니다.』대신사 말씀하기를 『그대의 수련이 거의 되었도다.』 하였다.
경상이 다시 그동안 자기가 공부한 경과를 보고하면서 『생(生)이 근일(近日) 반종유(半鍾油)로 21야(夜)를 지냈습니다.』 한즉 대신사께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이적이니 네 마음공부의 지극한 바를 알 수 있도다. 네 이제부터 포덕에 종사하라. 공부가 있고 덕을 펴지 못하면 이것은 종자를 두고 심지 않는 자와 같으니라. 너의 운수 장차 크리니 명심하여 사람을 건지라.』 하였다. 최경상은 검곡(劍谷)사람으로 신유년에 입도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닦으므로 대신사께서 특히 장래를 부탁하여 말씀하신 것인데 경상이 집에 돌아가 포덕한지 얼마 안되어 사방에서 입도하는 자가 날로 늘어갔다.
2. 순회설법(巡回說法)
포덕 3년(任戌, 1862) 7월 현서(縣西)에 있는 제자 강원보가 새로 도인을 많이 얻었는데 그중에는 문벌(門閥)이 높은 자와 문장(文章)이 많은 자도 있었다. 원보가 대신사께 향하여 그들에게 설법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대신사께서 이를 허락하고 현서에 가시어 2일간 묵으면서 우리 도는 지벌(地閥)과 문필(文筆)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벌과 문필보다는 오히려 도덕이 귀한 것이라는 설교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요지를 도덕가(道德歌)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약간 어찌 수신하면 지벌보고 가세보아 추세해서 하는 말이 아무는 지벌도 좋거니와 문필이 유여하니 도덕군자 분명타고 모몰염치 추존하니 우습다 저 사람은 지벌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
이어서 대신사께서는 이들 신입 지식인들에게 수도의 요체(要諦)를 알리기 위하여 주문의 중요성을 설유하기를 『내 주문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게 한 것도 도덕을 중히 여겨 천심을 회복케 함이니라. 주문은 글은 비록 적으나 열세자 지극하면 능히 만권시서(萬卷詩書)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니 제군들은 본말(本末)을 전도(顚倒)치 말라.』 하였다. 이때 제자 중에 김천익과 같이 지벌높은 사람도 있고 박문헌과 같이 시서(詩書)를 통한 사람도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다 대신사의 말씀에 감복하여 주문 읽기를 일과로 삼았다.
대신사께서 강원보의 집을 떠나 돌아오는 도중 회곡(回谷)에 이르렀는데 길 아래 그 높이가 7, 8척이나 되는 큰 언덕이 있었다. 평소에 무심히 통행하던 승마(乘馬)가 이에 이르러 꼭 선채로 가지 않으므로 같이 가던 사람이 채찍으로 두 세번 재촉하여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윽고 그 언덕이 큰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내리니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이 길로 여러 곳을 순회하여 서면 박대여(朴大汝)의 집을 향하여 가실 때 밤에 큰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 물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었는데도 대신사께서 탄 말이 평연(平然)히 건너가는데 물이 말 정강이에도 미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대신사의 신통력과 영적이 도처에서 일어나자 대신사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은 대신사의 일거일동이 마치 신인(神人)이 바람을 타고 공중에 나르는 듯하며 신선(神仙)이 구름을 타고 해상에 소요(逍遙)하는 듯하여 우러러 그 높은 것을 헤아릴 수 없었으며 굽어서 그 깊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3. 윤선달(尹先達)의 허위 보고
포덕 3년(任戌, 1862) 9월에 대신사께서 박대여의 집에서 여러날을 설법하였는데 이때에 경주부내 윤선달이라는 자가 있어 본래 영장(營將)과 서로 친하므로 영장을 부동(符同)하여 말하기를, 『소문을 들으니 경주에 최선생이란 사람이 있어 이상한 술법으로 사람을 가르쳐 그 제자가 무려 수천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만일 최선생을 잡아 좌도(左道)로 다스리면 그 무리들이 선생을 구하기 위하여 천금(千金)을 바칠 터이니 그를 불러 들이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영장은 간교한 윤선달의 말을 듣고 곧 차사(差使)를 박대여의 집에 보내어 대신사를 체포하니 때는 9월 29일이었다.
대신사께서 제자 10여인들을 거느리고 경주영으로 향할 때 서천(西川)에 이르자 냇가 동쪽에서 빨래하던 많은 부녀자들이 빨래를 멈추고 일시에 일어나 대신사를 우러러 쳐다보았다. 동행하던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한결같이 대답하기를 『서쪽 하늘에 광채(光彩)있는 서기(瑞氣)가 있어 멀리 빛을 발(發)하여 귀객(貴客)의 머리 위에 서리었나이다.』 하였다. 따라가던 사람들은 그제야 그 이상한 서기를 보고 다 놀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대신사께서 경주영(慶州營) 중에 이르니 영장이 묻기를 『네 일개 서생(書生)으로 무슨 도덕이 있어 제자 수천(數千)을 거느렸느냐?』 대신사께서 정색하고 천천히 대답하기를『내 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는데 무엇이 불가(不可)한 바 있으리오.』 하고 영장을 바로 쳐다볼 때 대신사의 눈에서 광채 발하여 사람을 엄습하는 듯하였다. 영장은 대신사의 위엄이 보통이 아니며 말씀 또한 당당함에 감동하여 곧 놓아보냈다.
이때 문 밖에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제자가 7백여명에 달하여 「윤선달을 잡아내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윤선달은 혼이 나서 어디론지 도망가고 영장은 여소(旅所)에 나와 친히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 날 밤에 마침 부윤(府尹) 김모(金某)의 내실(內室)이 급병으로 졸도하자 부윤이 예방(禮房)을 보내어 대신사께 고하기를 『들은즉 공(公)은 병 고치는 신술(神術)이 있다하니 청컨대 그 묘술(妙術)을 베풀어 주소서!』하였다. 대신사께서 이 말을 듣고 잠깐 묵념하더니 『이제 병이 쾌차(快差)되었으니 네 돌아가 고(告)하라.』 하였다. 예방이 돌아와 그 말을 전하자 과연 병이 완쾌되었으므로 부중(府中)이 모두 이상히 생각하고 대신사를 따라 병을 치료하고자 하매 대신사께서 다 도덕으로써 말씀하고 조금도 이적에 대한 효과를 말씀하지 않았다.
10월 5일에 대신사께서 경주부(慶州府)로 부터 용담정에 돌아와 새로 입도한 사람 가운데 아직 심주(心柱)가 서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부(靈符)를 함부로 시행하여 무근설화(無根說話)만 퍼지게 하여 도문(道門)에 미치는 영향이 좋지 않으므로 오직 수심정기의 수도에만 더욱 힘쓰게 하였다.
10월 14일 야반(夜半)이었다. 대신사께서 목청을 돋우어 주문을 외우는데 그 소리가 신선의 소리 같아 향기로운 운치가 높이 울려 한울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 듯하였으며 구미산의 초목이 진동하고 용담의 물고기가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문득 이상한 기운이 있어 달빛에 어울려 채색구름이 되고 상서로운 기운이 되어 그 형세가 영롱하고 그 빛이 명랑하니 용담일동(龍潭一洞)이 완연히 정토선경(淨土仙境)으로 변한 듯하였다. 이때에 한 어여쁜 미인이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나무 위에 단정히 앉았으니 마치 구천현녀(九天玄女)가 신악(神樂)을 듣는 듯 자못 황홀한 경지에 이르렀다. 문도(門徒)들이 이 광경을 보고 손을 들어 멀리 그 쪽을 가리키자 대신사께서 말씀하기를 『떠들지 말라 구천현녀가 나무 위에 있는 것이냐. 너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냐?』 하니 문도 가운데 한 사람도 대답하는 자 없고 다만 기화(氣化) 가운데 취하여 황홀한 상태에 있는 듯하였으며 후천개벽의 대모태중(大母胎中)에서 재생(再生)의 환태(幻態)를 받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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