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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운동(伸寃運動) ◇ [왕실마을 전경] 포덕33년(1892) 5월에 신사(神師)께서 김주원, 권병일의 주선으로 상주군(尙州郡) 왕실촌(旺實村)에 이거(移居)하였다. 이 해 7월에 서인주, 서병학 2인이 신사(神師)에게 고(告)하기를 『현재 우리 도인의 급무(急務)가 오직 대신사(大神師)의 신원(伸寃)에 있사오니 선생은 각 지방도인들을 효유하시고 나라에 상소(上疏)하여 대신사(大神師)의 원(寃)을 풀게 하소서』하니 신사(神師)께서 아직 기회가 이름을 알고 허락지 아니하였다. 10월에 서인주, 서병학 2인이 신사(神師)에게 다시 신원(伸寃)의 뜻을 고청(固請)하는 동시에 도인(道人)을 공주(公州)에 모아 신원(伸寃)에 관한 글을 관찰사(觀察使) 조병식에게 보내니 그 장사(狀辭)는 다음과 같다. 한울과 땅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도덕으로서 유지하여 편안히 살게 되는 줄 압니다. 이런고로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이 한울님의 명령을 이어받아 임금이 되고 도덕으로 천하(天下) 만민(萬民)을 화(和)하며 다스렸고 공(孔), 맹(孟), 안(顔), 증(曾)이 가르침을 전하고 법을 베풀어 또한 도덕(道德)으로 천하(天下) 후세(後世)에 법을 내리 전하다가 송나라 때에 이르러 도학(道學)이 다시 떨치었으며 다행히 우리나라는 중화(中華)를 모방하여 풍류(風流)와 글 외이는 소리가 마을에 들리고 학교가 고을마다 성(成)한지라 의관제도(衣冠制度)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이 빛나게 기록할만하여 천하(天下)에 으뜸으로 더할 것 없었던 것은 실로 선성(先聖)의 선(善)을 권(勸)하고 악(惡)을 징계(徵戒)하는 정치에서 나온 것이요 어진 재상과 큰 선비들이 또한 이 법(法)을 북돋아 기른 은덕(隱德)에 의한 덕화(德化)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즈음에는 성현(聖賢)의 학(學)이 막히고 폐(廢)하여 오랑캐의 풍속이 펴져 행하며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법(法)이 패함이 큰 육지가 홍수에 잠기고 인류가 사나운 짐승같이 되었더니 다행히 한울님께서 동방한국을 생각하시사 해와 달을 다시 밝히시어 지난 경신 사월 오일에 한울님께서 친히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경주(慶州) 수운대선생(水雲大先生) 「최제우(崔濟愚)」께 주시니 높고 높은 큰 도는 백성이 난 뒤로 있지 않던 종교(宗敎)요, 참되고 참된 성인(聖人)의 학(學)은 동쪽 땅에 넓게 지경(地境) 없는 포덕(布德)으로 세 교(敎)를 합한 하나이라 유(儒), 불(佛), 선(仙)이 한 테두리 안에 있어 세 과목을 베풀어 가르치니 성(誠), 경(敬), 신(信)으로 열어 보인 공부(工夫)의 길이라. 선생(先生)은 미리부터 서학(西學)이 성(盛)하여 번질 것을 아시고 장차 대도(大道)가 핍박을 당하여 축날 것을 보심에 가(可)히 홀로 그 몸만을 잘 할 수 없으므로 자리를 펴고 도(道)를 강론(講論)하시어 문인제자(門人弟子)로 하여금 한울도의 떳떳함을 알게 하고 성품(性品)이 참됨을 지키게 하시더니 뜻 아니 한 갑자 3월에 도리어 사학(邪學)으로 무고(誣告)를 입었으나 선생(先生)은 구차히 면(免)하기를 도모하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의(義)에 나아가시니 슬프다 덧없이 가는 세월이 30년에 이르도록 크게 원통함을 펴지 못하였으니 저희는 하나를 섬기는 의리에서 뼈에 사무치고 피가 뛰는 원통함을 어떠하다고 이르리이까? 저희들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도(道)를 닦으며 밤낮으로 한울께 비는 것은 덕(德)을 천하(天下)에 펴고 널리 창생(蒼生)을 건지려는 것밖에 결단(決斷)코 다른 뜻이 없는지라 어찌 털끝만치라도 부정(不正)한 이치(理致)가 있으리이까? 저희는 성인(聖人)의 문(門)에서 훈도된 힘으로 항상 공경과 두려움을 보존하고 힘써 의무를 지키어 관공서의 세납(稅納)과 사가의 빚을 잠간이라도 느리게 끌지 아니하였고 이전의 허물을 뉘우침에 있어서 늘 조심하였고『이르나』『저므나』마음을 가다듬어 스승님의 가르침을 혹 지워버릴까 근심하였으며 밭가는 이와 글 읽는 이가 모두 헌옷과 거친 음식으로 다만 분수에 맞도록 수도할 따름이어늘 어찌 소인의 무리가 합하(閤下)에게 고자질하여 이 죄 없는 잔민으로 하여금 추운 겨울 죽을 땅에 떠돌게 하며 죄 없는 부녀자를 과부가 되게 하고 남의 아비를 홀로 되게 하며 철모르는 어린 자식을 고아가 되게 하는 것이 이에 이를 줄 뜻하였사오리이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根本)이라 근본이 굳건하여야 나라가 편안할 것입니다. 합하(閤下)께서는 이를 맑게 살피시어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가 그 거처를 얻지 못하여도 괴로움과 근심이 있겠거늘 하물며 허다한 죄 없는 도인(道人)이 홀로 합하(閤下)의 은택(恩澤)을 얻어 입지 못함이리까? 특별히 어진 헤아림을 베푸시어 다른 고을에 갇혀있는 모든 동학(東學) 도인(道人)들도 한결 같이 놓아주시고 임금님께 아뢰임을 갖추시어 우리 선사(先師)의 지극히 원통함을 펴서 씻게 하여 주옵소서. 임진(壬辰) 10월 너희들의 소위 동학(東學)은 본래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였거니와 이것이 정학(正學)일 수 없는 이단이며, 양(楊). 묵(墨)도 아닌 것 같다. 필경 이것은 사학(邪學)의 여파(餘派)라 말로써 능히 양(楊). 묵(墨)을 막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라 하였으니 법(法)으로 어찌 금(禁)하지 아니하겠는가. 너희는 정학(正學)을 버리고 사특(邪慝)한 것에 물들어 어진 백성을 속여 걸려들게 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서 법으로 금하게 되는 것이라. 지금 영문(營門)에서 동학도(東學徒)들을 혹 잡아두고 혹은 정배 보내는 것은 모두 조정에서 금(禁)하는 명령을 좇는 것뿐이요 영문(營門)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사특한 곳에 물든 류(類)로서 혹 금치 말 것을 요구하고 혹은 글로써 나라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니 기강이 풀린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랴. 금(禁)하고 금치 않는 것이 모두 조정(朝廷)에서 처분할 일이라 영문(營門)에서는 다만 조정(朝廷)의 영(令)을 좇아 봉행할 따름이니 실로 본영(本營)에 와서 아뢰일 일이 아닌 줄 알라. 너희들의 무엄한 것을 본래 엄하게 처단할 일이로되 이미 호소하는 백성의 관계라 특별히 아직 용서하니 그렇게 알고 곧 물러가서 직업을 편안(便安)히 하면 너희들의 양민(良民)되는 행(行)일 뿐 아니라 또한 정부(政府)의 입장에서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물러가지 아니하고 다시 와서 제소(提訴)한다면 또한 어찌 법으로써 다스리지 않을 것인가. 더 이상의 글과 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이경직이 관하(關下) 각 읍에 발관(發關)(지시공문)하여 동학(東學)을 단속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문을 내린 바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 조병식의 제음(題音) 보다는 매우 부드럽고도 친절한 듯한 문의(文意)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몇 구절 간추려서 소개한다. 동학(東學)을 금(禁)하라는 것은 그를 미연 방지하고 범한 자는 죄를 주되 그들을 어진 백성이 되게 하라는 뜻이거늘 금야불연(今也不然)이라 심한 곳에서는 고을 수재되는 자까지도 동학을 함정같이 이용하여 부요한 백성을 모함하며 토색뇌화(討索賂貨)할 뿐아니라 각읍교예(各邑校隸)가 이 금령(禁令)을 빙자하여 침어고시상행(侵魚固是常行)하니 동학도인(東學道人)이 아닌 무고양민도 걸려드는 예(例)가 십중팔구라 하지 않는가. 하물며 동학하는 자야 말해 무엇하랴. 어찌 양민될 길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생략) 그 사람들 근본을 캐어보면 태반이 산야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구기정즉역가애야(究其情則亦可哀也)라. 이번 제소(提訴)도 실로 그들의 절박한 처지로 인해 부득이한 일이었으니 먼저 그들의 안전(安全)을 도모해 주도록 하고...... 그들에게 죄줄 것은 뒷날로 미루니 이 뜻을 한문과 국문으로 베끼어 곳곳에 붙여서 일부일처(一夫一妻)라도 알지 못하는 폐단을 없게 하라. 이 때 신사(神師)께서도 역시 공주장사(公州狀辭)의 결과를 보고하는 양(兩) 서씨(徐氏)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수십만교도(數十萬敎徒)가 지목을 견디지 못해 신원현도운동(伸寃顯道運動)에 목숨을 걸고라도 나서겠다는 그들의 뜻을 막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정세(政勢)가 이미 동학교단(東學敎壇)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여 사회참여의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게 했으니, 그것은 유(儒)?불(佛) 양교(兩敎)가 침체부진한데 반해 가속화되는 서교(西敎)의 발전 보급이 역시 민족의식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이미 16년 전에 체결한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으로 인하여 한반도에 상륙한 신흥(新興) 일제(日帝)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청제(淸帝)의 대결, 그리고 北쪽 노제(露帝)의 남진(南進)과 영(英), 불(佛), 미(美), 독(獨)의 선진제국(先進諸國) 공관(公館)이 수도 서울에 집결해서 이 나라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게 하였으니 뜻있는 당시의 백성치고 어찌 자각적인 민중운동의 선상에 나서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리하여 동학(東學)은 동학 스스로의 성격에 의해 자기생존운동 즉 신원현도운동(伸寃顯道運動)을 전개하는 한편 곁들여 민중을 각성시키는 사회운동, 구국운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注意) 깊게 살펴야 할 일은 이러한 민중운동을 펴나가도록 힘을 키우고 그 분위기를 성숙(成熟)시킨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지도정신과 그 방법이다. 아무리 참기 어렵고 힘들지라도 모든 조건을 완숙(完熟)시켜서 거의 자율적으로 발전진행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동학(東學)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이요 현도운동(顯道運動)이었던 것이다. 동학(東學)의 독특한 수련방법으로 훈련된 수십만의 동학교도들로 하여금 비폭력적인 도덕운동을 펴나갈 수 있도록 뭇 교도들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여 도인들 스스로가 분발귈기케 한 거기에 해월신사의 성자적(聖者的) 금도(衿度)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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