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원운동(伸寃運動) ◇
1. 복합(伏閤)상소(上疏)
포덕34년1월에 신사(神師)께서 청주(淸州) 송산리(松山里) 손천민의 집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정하고 보은군(報恩郡) 속리면(俗離面) 장내리(帳內里)에 대접소(大接所)를 정(定)한 후 각지 도인(道人)에게 다음과 같은 경통(敬通)을 발(發)하였다.
경통(敬通) 하수(河水)의 맑음이 오히려 더디고 한울걸음이 어려움이 많아 서교(西敎)는 바야흐로 성(盛)하고 우리 도(道)는 잠자고 쇠(衰)하도다. 우리 선사(先師)께서는 무극대도(無極大道)로써 세상에 빛남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그 화(禍)를 입었으니 어찌 차마 말하리오. 무릇 우리들 사문(師門)에 몸을 담아 좇아 배우는 자(者) 선사(先師)의 신원(伸寃)할 일을 어찌 감히 침식(寢食)할 사이라도 조금인들 게을리 하리오. 바야흐로 염원(念願)을 진소(陳疏)하고 의거(義擧)를 의정(議定)하기 위하여 이에 써 포유(布諭)하노니 각지도유(各地道儒)는 일제(一齊)히 내회(來會)하여 협상시행(協商施行)할지어다. 신사(神師)께서는 드디어 선사(先師)의 신원(伸寃)과 신앙(信仰)의 자유(自由)를 위해 조정(朝廷)에 직접 상소(上疏)키로 하고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논의(論議) 하였다. 우선 상소(上疏)에는 소두(疏頭)가 있어야 하는 데 대개 소두(疏頭)된 자는 참형(慘刑)을 당할 위험이 있었으니 그것은 조선조말기(朝鮮朝末期)에 유생(儒生)들이 상소(上疏)를 하다가 소두(疏頭)된 자(者)가 참형(斬刑)을 당한 사례가 있었으므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소두(疏頭)될 자를 자원(自願)에 의하여 선발(選拔)키로 하였는데 즉석에서 수십인이 응하므로 그 중에서 박광호라는 두목(頭目)을 소두(疏頭)로 정하게 되었다. 다음 손천민으로 소문(疏文)을 짓게 하고 남호원으로 서사(書寫)를 하게 하여 서내홍을 하여금 먼저 서울에 올라가 도소(都所)를 한성남서(漢城南署) 남소동(南小洞) 최창한의 집에 정하게 하였다. 이때의 도인(道人) 대표(代表)는 박석규.임봉호.박윤서.김영조.김낙철.권병덕.박원칠.김석도.이문찬 등이며 총지휘자(總指揮者)를 손병희.김연국.손천민으로 정하였다.
상소문(上疏文)
각도에서 모여온 유학신, 박광호 등은 송구한 마음으로 임금님 앞에 삼가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통천강련(統天降蓮)하시고 조극돈륜(肇極敦倫)하시고 정성광의(正聖光義)하시고 명공대덕(明功大德)하시고 요숙순미(堯淑舜微)하시고 우모탕경(禹謨湯敬)하시고 응명입기(應命立紀)하시고 지화신열(至化神烈)하옵신 주상전하(主上殿下)께 목욕재계하옵고 백배상언(百拜上言)하나이다. 엎디어 생각건대 궁군(窮窘)하면 부모를 부르고 질통(疾痛)하면 천지(天地)를 부르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요 이지자연(理之自然)이라 이제 전하(殿下)께서는 즉(卽) 신등(臣等)의 천지부모(天地父母)요 신등은 또한 전하(殿下)의 화육중(化育中) 적자(赤子)라 이 궁군(窮窘) 질통(疾痛)의 지(地)에 즈음하여 외월(猥越)의 죄(罪)를 헤아리지 않고 제성이족(劑聖裏足)하여 천위지척(天威咫尺)의 아래에 부르짖는 것은 참망공구(僭妄恐懼)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지원극통(至寃極痛)의 상황(狀況)을 천지부모(天地父母)에 호소치 않으면 복재지간(覆載之間)에 다시 어디에 돌아가리오. 옛적부터 성제명왕(聖帝明王)과 현상양좌(賢相良佐)가 사문(四門)을 열고 사총(四聰)을 달(達)하며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사시(四時)를 순(順)히 하여 천하(天下)를 태산(泰山)과 같이 편안한데 둔 것은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리(天理)를 좇으며 인륜(人倫)을 밝히고 기강(紀綱)을 세운 따름이라 만근이래(挽近以來)로 실천행도(實踐行道)하는 참된 선비가 거의 없어 허문(虛文)을 표창(表彰)하여 한갓 외식(外飾)을 숭상(崇尙)하며 경전(經傳)을 표절(剽竊)하여 부박조명(浮薄釣名)하는 선비가 십중팔구(十中八九)라 언염사습(言念士習)에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이 가히 없어졌다고 이를 것이니 일이 국치(國治)에 관계(關係)되어 실로 작은 일이 아니므로 스스로 통한(痛恨)이 철천(徹天)하여 통곡유체(痛哭流涕)함을 깨닫지 못하였더니 어찌 다행히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사 무왕불복(無往不復)하여 지난 경신년 여름 사월에 황천(皇天)이 묵우(默祐)하고 귀신(鬼神)이 음(蔭) 하여 경상도 경주(慶州) 고(故) 학생신제우(學生臣濟愚) 비로소 천명(天命)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 덕(德)을 펴니 최제우(崔濟愚)는 즉 병자공신(丙子功臣) 정무공진립(貞武公震立)의 칠세손(七世孫)이라 도(道)를 행(行)하고 교(敎)를 편지 불과 삼기(三期)에 잘못 위학(僞學)이라는 이름으로써 허구날조(虛構捏造)의 비방(誹謗)을 횡피(橫被)하여 갑자삼월초(甲子三月初)10일에 마침내 정식(正式)으로 형(刑)을 영영(嶺營)의 아래에서 받았으니 그윽이 당시(當時) 광경(光景)을 생각하면 천지(天地)가 참담(慘憺)하고 일월(日月)이 빛이 없는지라 만약 일호(一毫)라도 부정한 죄과(罪科)를 범(犯)하였다면 법(法)에 있어 마땅히 벨 것이니 어찌 감히 죄 씻을 것을 도모하리오 마는 사람의 잘못 날조(捏造)한 것을 입어 이 원만(圓滿)하고 티 없는 대도(大道)로 하여금 이와 같은 만고(萬古)에 긍(亘)하는 창유(創有)의 횡액(橫厄)을 만나니 어찌 한심(寒心)스럽지 않으리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道理)에 만약 이지러지는 일이 있으면 감(敢)히 도학(道學) 이자(二字)로써 용훼(容喙)치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감히 신원등설(伸寃等說)로써 천청(天聽)에 무달(誣達)하리오. 그 글은 시서역춘추(詩書易春秋)요 그 법(法)은 예악형정(禮樂刑政)이요 그 도(道)는 온량공검(溫良恭儉) 효우육연임휼(孝友陸任恤) 지인성의충화(知人聖義忠和)로서 기질(氣質)을 변화할 따름이라. 선사(先師) 최제우 말씀하시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유아지갱정(唯我之更定)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각래부자지도즉(覺來夫子之道則) 일리지소정야(一理之所定也)요 논기유아지도즉(論其唯我之道則) 대동이소이야(大同以小異也)라 하시니 소이(小異)라는 것은 또한 이상한 별건사(別件事)가 아니라 성경신(誠敬信) 삼단(三端)으로 써 하는 것이니 천지(天地)를 공경스럽게 받들어 일마다 반드시 고(告)하기를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니 이 일단도리(一段道理)는 실로 선성미발(先聖未發)의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신선사(臣先師)께서 비로소 창명(創明)한 종지(宗旨)라 대개 그 종지(宗旨)는 한울 섬기기를 부모와 같이 하여 유불선(儒彿仙) 삼교(三敎)를 겸(兼)하여 통일(統一)한 이치(理致)인 고(故)로 조금 다르다고 한 것이요 그 겸유(兼有)한 원인(原因)을 연구하면 머리깎고 검은 옷 입고 장왕불고(長往不顧)하여 그 군부(君父)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불선(佛仙) 이교(二敎)중에 자비(慈悲)와 수련(修煉)의 서로 맞는 이치(理致)를 겸(兼)하였으니 실(實)로 공부자(孔夫者) 광명정대(光明正大)의 도체(道體)에 부족함이 없고 또 대개 동학(東學)이라는 것은 그 학명(學名)이 본래 동학(東學)이 아니라 그것이 한울에서 나서 동쪽에서 비롯되었으되 당세(當世) 사람이 잘못 서학(西學)으로써 배척하여 여력(餘力)이 없는 고(故)로 선사신제우(先師臣濟愚) 문제자(門弟子)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도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즉 동학(東學)이니 하물며 땅이 동서(東西)로 나뉘었으니 서(西)를 어찌 동(東)이라 하며 동(東)을 어찌 서(西)라고 하겠는가. 공자(孔子)는 노(魯)나라에서 나시어 추(鄒)나라에서 풍화(風化)가 미쳐 추로(鄒魯)의 풍(風)이 이 세상에 전하거늘 우리 도는 이 곳에서 받아 이 곳에 펴니 어찌 가히 서(西)로써 이름하리오 하였은즉 서학(西學)으로써 배척(排斥)하는 것도 부당(不當)한 것이요 또한 동학(東學)으로써 물리치는 것도 부당(不當)한 것인데도 영(營)과 읍(邑)이 속박(束縛)하며 주찬(誅竄)하기를 용조(容措)할 바 없게 하니 어찌 아프고 원통하지 않으리오. 대개 수심정기(守心正氣)하고 경천순인(敬天順人)하여 각각 그 바탕을 따르면 성자(聖者)는 성인(聖人)되고 현자(賢者)는 현인(賢人)이 될 것인즉 공부자(孔夫子)의 도(道)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조금 다르다고 해서 이단(異端)으로써 지목(指目)하리오. 대저 이 도(道)는 심화(心和)로 근본(根本)을 삼나니 마음이 화(和)하면 기운(氣運)이 화(和)하고 기운이 화하면 형체(形體)가 화하고 형체가 화하면 천심(天心)이 바로 되고 인도(人道)가 설 것이니 진실(眞實)로 이와 같으면 선사신제우(先師臣濟愚)께서 전성미발(前聖未發)의 도(道)를 시창(始創)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로 하여금 다 천리(天理)의 본원(本原)을 알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일편되게 동학(東學)으로써 이름하리오. 실로 천하(天下)에 무극(無極)한 대도(大道)라 신등(臣等)이 어찌 감히 아곡지언(阿曲之言)으로써 천폐(天陛)에 무진(誣陣)하여 위로는 써 기망(欺罔)의 죄(罪)를 지고 아래로는 써 외설(猥褻)의 주(誅)를 빠르게 하리오. 엎디어 원하오니 전하(殿下)께서는 이 화육중(化育中) 적자(赤子)를 가긍(可矜)히여겨 빨리 신사(臣師)의 억원(抑寃)을 펴게하고 빨리 종전(從前)에 정배간 교도(敎徒)를 용서(容恕)하여 덕음(德音)을 크게 펴고 화기(和氣)를 존영(尊迎)하소서. 신등(臣等)은 성황성공(誠惶誠恐)하여 읍혈격절(泣血激切)함을 맡길 길이 없어 병영(屛營)에 간절(懇切)히 비나이다.
이때는 바로 계미년(癸未年) 봄 과거(科擧)를 볼 때였으므로 각지유생(各地儒生)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가는 기회를 타서 도인(道人)도 또한 유생(儒生)으로 가장(假裝)하고 서울에 올라갔던 것이다. 이들은 먼저 도소(都所)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게 되었는데 서인주.서병학은 상소(上疏)하여 진정(陳情)할 뜻이 없고 교도(敎徒)로 하여금 군복(軍服)으로 갈아입게 한 후 병대(兵隊)와 협동하여 정부간당(政府奸黨)을 소탕하고 크게 조정(朝廷)을 개혁(改革)하는 무력혁명(武力革命)을 단행(斷行)할 계획(計劃)을 세웠다. 이 비밀을 탐지(探知)한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 신정희가 도인(道人)들이 유숙하고 있는 여숙(旅宿)에 경찰(警察)을 보내어 엄연히 조사하므로 신사(神師)께서 두 사람을 불러 그 부당함을 책(責)하였으나 두 사람이 모두 듣지 않으므로 신사(神師)께서 이에 도인들에게 명(命)하여 광화문 앞에 나아가 엎디어 상소(上疏)케 하니 때는 계미(癸未) 2월 11일이었다. 수천명(數千名)의 도인(道人)들이 문전(門前)에 엎디어 일어나지 아니하고 일제히 통곡(慟哭)하자 그 소리가 장안천지(長安天地)를 진동하고 백악(白岳)과 인왕산(仁旺山)에 메아리쳤다고 전한다. 대개 그 당시 상소(上疏)할 때에는 임금님을 감동케 하기 위하여 슬프게 호곡(號哭)하는 것이 예이었다. 이러하기를 밤낮 사흘을 계속하니 13일 오시(午時)에 사알(司謁)이 칙령(勅令)을 받들어 말로써 전하기를 「상소(上疏)의 격식(格式)이 사마(司馬)의 표(票)가 있은 후에 드려야 할 것이라」하므로 도유들이 이에 사마표(司馬票)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때 임금이 슬프게 우는 소리를 듣고서 직접 칙교(勅敎)를 내렸는데 그 내용인 즉『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그 업(業)에 편안(便安)하면 소원에 의하여 실시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칙교(勅敎)를 받은 도인(道人)들은 일제히 서울을 떠나 향리(鄕里)에 돌아갔다. 그런데 이 규혼에 교도중(敎徒中) 적극파(積極派)는 영(英).미국공관(美國公館)과 그 주택(住宅).예배당(禮拜堂) 및 일본공관(日本公館)과 그 주택(住宅)에 속히 퇴거(退去)하라는 벽보(壁報)를 붙여 인심(人心)을 크게 자극(刺戟)하기도 하였다.
주(主): 근대적(近代的) 시위운동(示威運動)의 선구(先驅)였던 진사신원(辰巳伸寃運動)을 통하여 동학(東學)은 각국 영사관(領事館) 문벽(門壁)에 「침략행위」를 삼가도록 괘서(掛書)를 써 붙이는 한편 특히 일본(日本)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크게 성명(聲明)한 바 있다. 이에 당황한 일본(日本)영사관(領事館)이 자국거류민(自國居留民)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내유(內諭)한 바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거류(居留)인민(人民)에 내유(內諭) 근년(近年) 동학당(東學黨)이라 일컫는 외국인(外國人) 배척(排斥)의 사상(思想)을 지니는 일당(一黨)이 당국(當國) 남(南)쪽에 일어나 마침내 당원(黨員) 약간(若干)이 상경(上京)하여 당국(當局)에 강소(强疏)함에 이르고, 다시 연이어 다수(多數)의 당원(黨員)이 상경(上京)하리라는 풍문(風聞)이 있은즉 그들의 기염(氣焰)이 과연 치성(熾盛)할 때에는 아거류인민(我居留人民)에 대하여 여하(如何)한 위험을 미치게 될는지 모를 일이라, 더욱 만일의 경우에는 조선정부의 임무(任務)로서 응당(應當)히 재외외국인(在外外國人)을 보호하리라는 것은 물론이지만, 차제(此際)에 아인민(我人民)에 있어서 예(豫)히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함이 요긴(要緊)할 것인즉 각자(各自)에 있어서 다음의 사항(事項)을 심득(心得)할 사. -. 동당원(同黨員)의 거사(擧事)에 대하여 어떠한 탐지사실(探知事實)이 있을 때에는 시급(時急)히 당관(當館)에 보고(報告)할 사(事) -. 미리 각자(各自) 자용(自用)의 식품 등을 준비하고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할 사(事) -. 형세(形勢)가 절박(切迫)할 때에는 노약부녀자(老弱婦女子)로 하여금 인천(仁川)으로 피난(避難)할 준비(準備)를 할 사(事). 단(但) 시의(時宜)에 따라서는 인천에 전보(電報)하여 기선(汽船)을 용산(龍山)에 회항(回航)할 것임. -. 거류민(居留民) 가운데 장년자(壯年者)는 아경찰관(我警察官) 및 관원(館員)에 합동(合同)하여 수어(守禦)에 진력(盡力)할 사(事). 右 內諭 候事 명치 26년 4월 13일 영사(領事) 빈 촌 준(彬 村 濬)
2. 징악천선(懲惡遷善)의 지극한 교훈(敎訓)
이 무렵 신사께서 다시 경통(敬通)을 발(發)하여 도인(道人)에게 유고(諭告) 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통(敬通)
이번 대궐 앞에 나아가 부르짖은 것은 보통 생각으로 말하면 가(可)히 시기에 맞고 대의(大義)에 합(合)한다 이를 것이나 도(道)를 만세(萬世)에 크게 펴는 것으로써 말하면 일시(一時)의 속정(俗情)으로 「원통하다」 또는 「원통한 것을 편다」하는 것은 결코 우리 스승의 큰 덕(德)에 비하여 족(足)히 거론할 바 못되는 것이다. 그러나 팔역(八域)이 동정(同情)하여 만인(萬人)이 상소(上疏)하는데 나아갔으니 이 또한 천심(天心)이라 대궐 문앞에서 부르짖은지 3일에 사알(司謁)의 구전(口傳)으로 평온(平穩)하게 물러가 각각 그 업에 편안하라는 효유가 있었으니 이 효유를 생각함에 두렵기 이를 데 없도다. 어(語)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으리오마는 고치는 것이 귀(貴)하니라」하였으니 깊이 원컨대 여러 도인(道人)은 항상 사문(師門)에 「무죄지이여죄(無罪之以如罪)」란 지극한 교훈(敎訓)을 생각하여 악(惡)을 징계하고 선(善)에 옮기며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내 몸을 바르게 하면 「동동학미념념동(同同學味念念同)」의 진리(眞理)와 묘(妙)한 뜻이 또한 그 가운데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대개 복(福)이 되는 일과 화(禍)가 되는 일이 전혀 이 마음이 바르냐 바르지 못하냐에 달렸으니 부지런히 부지런히 게으럼이 없이 나의 본래(本來)의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연후(然後)에야 무위화기(無爲化氣)의 자연(自然)한 이치(理致)에 거의 그 요령(要領)의 방법을 얻을 것이라 요언을 더럽게 여기지 말고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여 써 무궁(無窮)의 진리(眞理)를 통하고 무극(無極)의 대운(大運)에 참여하는 것이 옳으니라.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있은 후 각지에 포덕이 크게 일어났다. 그 중에는 풍화(風化)에 움직여 도인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대세만 바라보면서 수도를 등한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사께서 이를 근심하여 어떠한 곤란이 있을지라도 뜻을 변치 않고 수도에 힘쓰고 끝까지 나아갈 것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통유를 내렸다.
통유문
대개 나무의 뿌리가 굳건하지 못하면 바람을 만나 거꾸러짐을 면(免)치 못할 것이요 물의 근원이 깊지 못하면 능(能)히 웅등이를 채우고 전진(前進)하지 못할 것이라. 사람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마음이 정치 못하면 믿기도 하고 의심도 하여 일이 되지 않고 공도 이루지 못할 것은 필연(必然)한 이치라. 그윽히 생각하면 비(譬)하건대 먼 지방 사람이 장차 서울에 갈세 속장(束裝)을 하고 길에 오르면 혹(或) 물에 임(臨)하여는 건너기 어렵고 혹(或) 영(嶺)을 만나면 넘기 어려우며 갈랫길을 보면 의심(疑心)이 생기고 관문(關門)을 당(當)하면 두려움이 생겨 머뭇거리면서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가는 것은 곧 마음이 서지 못한 자(者)요 또 혹(或) 물에 임하여 능(能)히 건너고 영(嶺)을 만나 능(能)히 넘으며 갈랫길을 보고 능(能)히 나아가며 관문(關門)을 당(當)하여 능(能)히 나아가나 그러나 날이 오램을 견디지 못하여 중로(中路)에 질러 돌아가는 자(者)는 이것은 뜻이 정성되지 못한 자(者)라. 그 중에는 날이 오램을 꺼리지 않고 노고(勞苦)를 관계하지 않으며 행(行)하고 또 행하여 마침내 서울에 이르는 자(者)도 있으니 이것은 마음이 굳고 뜻이 독실(篤實)하여 능(能)히 대업(大業)을 성취(成就)하는 자(者)라. 하물며 이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무궁(無窮)한 이치(理致)를 어찌 얕은 마음으로써 진경(眞境)에 이를 수 있으리오. 오직 우리 종도(宗徒)는 힘써 나아가 게으름이 없이 일염(一念)으로 일을 받들어 구인(인아홉길)의 우물을 버리지 말고 일궤의 공(功)을 이지러뜨리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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