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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중(加重)된 환난(患難)과 처변(處卞) 갑오혁명(甲午革命)의 여파로 나라에서 동학군(東學軍)을 소탕하기 위하여 우선 그 수령(首領)되는 신사(神師)를 체포하고자 전국적으로 수사망을 펴고 매우 심하게 검색하였다. 이에 신사(神師)께서 손병희(孫秉熙) . 손병흠(孫秉欽) . 김연국(金演局) 등과 같이 홍천(洪川)에 잠시 거류(居留)하다가 포덕(布德) 36년(1895) 1월에 인제군(麟蹄郡)느릅정에 있는 최영서(崔永瑞)의 집에 이르러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기를 『지금은 두령(頭領)된 자(者) 가(可)히 한 곳에 오래 유(留)하지 못하리라』하고 또 『군자(君子) 환난(患難)에 처하여는 환난(患難)의 도(道)를 행하며 곤궁(困窮)에 처(處)하여는 곤궁(困窮)의 도(道)를 행함이 가(可)하니 제군은 오직 천리(天理)에 순(順)하여 기회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였다. 이때에 최영서(崔永瑞)의 집이 가난하여 오래 머무를 수 없으므로 그 곳에 있은지 월여(月餘)에 손병희(孫秉熙) . 손병흠(孫秉欽)은 신사(神師)의 곤궁(困窮)을 풀기 위하여 장사를 하기로 하고 간성(杆城)을 경유하여 원산(元山)방면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신사께서는 6월에 잠시 홍천군(洪川郡) 고대(高垈)에 있는 최우범(崔禹範)의 집에 들렸는데. 이때 도인(道人) 이성관(李成觀)은 여름옷 한벌을 드렸고 홍병기(洪秉箕)는 돈 5백량(百兩)을 바쳤다. 7월에 전주도인(全州道人) 이병춘(李炳春)이 인제군(麟蹄郡) 느릅정에 와서 신사(神師)를 뵙고 갑오년(甲午年)의 일을 말하므로 신사(神師)께서 말씀하기를 『일이 모두 한울에서 나왔으니 천명(天命)을 기다릴 뿐이요 일체 사혐(私嫌)을 생각지 말라』하였다. 이 무렵에 손병희(孫秉熙)는 병흠(秉欽)과 함께 간성군압진리(杆城郡鴨津里) 이달서(李達瑞)의 주점(酒店)에 이르렀으나 수중(手中)에는 1분(一分)의 여비(旅費)도 남은 것이 없었는데 때마침 이웃에 산다는 윤규칠(尹圭七)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종용(從容)히 말하기를『내 당신의 거동을 살피니 당신은 반드시 상인(商人)이 아니요 귀객(貴客)이라 한때의 곤궁(困窮)이 있는듯 하므로 내 천금(千金)을 당신에게 꾸어주노니 곤난(困難)을 면(免)함이 어떠하냐』하면서 이튿날에 천금표(千金票)를 써서 주면서『이 표(票)를 가지고 원산객주(元山客主)에 가서 돈을 찾으라』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손병희(孫秉熙)는 생각한 바 있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니 곁에 있던 손병흠(孫秉欽)이 하기를 『본래(本來)부터 친분이 없는 윤씨(尹氏)가 이와 같이 후의(厚意)를 베푸는 것은 곧 한울님이 시키신 바라 이 돈으로 신사(神師)의 곤궁(困窮)을 면(免)케 함이 어떠하오리까』하였다. 손병희(孫秉熙)가 대답하기를 『무고(無故)히 남의 돈을 써 는 것이 상서(祥瑞)롭지 못하고 또한 신사(神師)의 뜻이 아니니 이는 한울이 나의 뜻을 시험함이로다』 하고 길을 떠났다. 그 길로 원산(元山)을 향해 가는 길에 이종훈(李鍾勳)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원산객주(元山客主)에 이르러 손병희(孫秉熙)의 안경을 팔아 상품을 사서 분담(分擔)하고 홍천군(洪川郡) 최우범(崔禹範)의 집에 돌아와서 팔았더니 상당(相當)한 이(利)를 얻게 되었다. 이에 정조(正租) 10여석(餘石)을 사고 의복을 준비한 후 다시 장삿길을 떠나 장진(長津) . 강계(江界)를 지나 청국(淸國) 변경(邊境)에까지 들어가 성심으로 장사를 하였던바 이익(利益)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와 5. 6인(人)의 생활을 유지케 하였다. 9월에 이종훈(李鍾勳)이 또한 수전(水田) 10두락(斗落)을 팔아 돈 2백량(百兩)과 겨울웃 한벌을 신사(神師)에게 드렸다. |
■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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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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