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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36(1895)년 12월 초에 손병희(孫秉熙)가 신사(神師)를 모시고 임학선(林學善)의 인도로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 중(中) 수례촌(水禮村)에 이르러 3간초옥(間草屋)이 있으므로 여기서 겨울을 나게 되었다. 이달 11일에 신사(神師)께서 손천민(孫天民)에게는 송암(松菴), 김연국(金演國)에게는 구암(龜菴)이라는 도호(道號)를 주고 이어서 의암(義菴). 송암(松菴). 구암(龜菴) 3인을 불러 자리에 앉힌 다음 송암(松菴) 손천민(孫天民)에게는 집필(執筆)을 명(命)한후 [하몽훈도전발은(荷蒙薰陶傳鉢恩) 수심훈도전발은(守心薰陶傳鉢恩)]의 구(句)를 쓰게 하였다. 아어서 신사(神師)께서는 『이것은 나의 사의(私意)가 아니요 천의(天意)에 서 나온 바니라]』 말씀하고 또 『너희들 세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天下)가 이 도를 흔들고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하였다. 의(義). 구(龜) 송(松) 3암(菴)이 명(命)을 받고 곧 각지(各地)도인(道人)에게 통유(通儒)하기를 [우리들이 훈도(薰陶)의 열(列)에 첨처하여 전발(傳鉢)의 은(恩)을 몽(蒙)하였기 용담수운대선생(龍潭水雲大先生) 검악해월선생(劒岳海月先生)의 도훈(道訓)을 받들어 근통(謹通)하노라]하니 이로부터 3암(菴)이 사문(師門)의 명교(命敎)를 받아 도인(道人)에게 경통(敬通)하는 예(例)가 되었다. 이때 신사(神師)께서 3암(菴)에게 명(命)하여 명심수덕(明心修德)의 뜻으로 문도(門徒)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유문을 내었다. 태고혜천황시(太古兮天皇氏)는 우리 선사(神師)께서 스스로 비교한 뜻이요 산위에 물이 있다는 것은 우리 교(敎)의 도류(道流)의 연원(淵源)이니 이 현기(玄機)와 진리(眞理)를 안 연후에야 써 개벽(開闢)의 운(運)과 무극(無極)의 도(道)를 앎이 있으리라. 아!나무는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물은 근원없는 물이 없나니 물질도 오히러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이 광전절후(曠前絶後) 오만년초창(五萬年初創)의 도운(道運)이겠는가. 나의 불민(不敏)으로써 훈도전발(薰陶傳鉢)의 은혜를 하몽(荷蒙)한지 흘금30여년(訖今三十餘年)에 어렵고 험(險)한 일을 다 맛보고 인액(人厄)을 자주 거쳐 사문정맥(斯門正脈)이 거의 질펀하게 흐름을 순(淳)한데로 돌리며 잡박(雜駁)함을 버리고 순수(純粹)한데로 나아가게 하였으되 호해풍상(湖海風霜)에 형영(形影)이 막혀 반도(半途)의 발(發)도 있고 또한 일궤의 휴(虧)도 많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로다. 대개 우리 도(道)의 진행여부(進行與否)는 오직 내수도(內修道)의 선불선(善不善)에 있는지라 전(傳)에 이르기를 한울은 친(親)함이 없고 극경(克敬)함을 오직 친(親)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아내에게 본받아 집과 나라에 나아간다 하였으니 그러면 내수도(內修道)에 공경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 어찌 우리 도(道)의 대관건(大關鍵)이 아니겠는가. 근일(近日) 교도(교徒)가 내정(內政)을 경계함은 오히려 말할것 없거니와 수신행사(修身行事)에도 또한 경만(輕慢)하고 게으름이 많으니 이러고서 입실(入室)은 고사(姑捨)하고 문진(問津)(나루터를 묻는 것)도 기약 할수 없으니 어찌 황송하고 민망하지 않으랴. 본래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니면 반드시 하학(下學)하여 상달(上達)하는 것이라 대개 가르치지 않고 선(善)한 것은 상지(上智)요, 가르친후에 선(善)한 것은 중지(中智)요, 가르쳐도 또한 선(善)치 못한것은 하우(下愚)니 사람의 지우(智愚)가 같지 않고 성범(聖凡)이 비록 다르나 힘쓰기를 말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도 가(可)히 써 지혜로운 사람이 될수 있고 범인(凡人)도 가(可)히 써 성인(聖人)에 이를 수 있으니 모름지기 명심수덕(明心修德)에 힘써 늙은이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더욱 마음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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