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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은 10년후에는 주문 읽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 |
1. 신사의 순도
포덕39년(1898) 5월 11일에 법부대신 겸 평리원재판장 조병직, 수반검사 윤성보, 법부협판 겸 수반판사 주석면 등이 법정을 열고 심문을 하였으나 신사께서 병세가 위중하여 많은 답변을 하지 않고 다만『나 죽은 10년후에는 주문 읽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고 하였다.
신사의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정부에서는 더 심문을 계속하지 않고 이달 말일에 좌도난정률로 사형을 선고한 후 한성감옥에 이감하였다. 신사께서는 그 이틀 후인 6월2일(음력) 하오 2시에 교형을 받아 순도하였으니 향년이 72세였다. 당시 판결 선고서는 다음과 같다.
판결선고서
--생략--
피고 최시형과 황만기와 박윤대와 송일회의 안건을 검사공판에 곡하야 차를 심리하니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에 간성거 필묵상 박춘서 위명인의게 소위 동학을 수하야 선도로 병을 료(療)하며 주문으로 신을 강한다 칭하고 별군각도에 주유편행하야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란 13자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이란 8자강신문과 동학원문 제1편 포덕문과 제2편 동학논과 제3편 수덕문과 제4편 불연기연문과 궁궁을을지부(符)로 인민을 선혹하며 주당을 체결하고 또 대주인 최제우의 만년지상화천타 사해운중월일감이란 시구를 모상하며 법형법제의 실심경신함을 인하야 법헌의 호를 칭하고 해월의 장을 각하야 교장과 교수와 집강과 도집과 대정 중정 등 두목을 각방에 서치하고 또 포와 장이란 회소를 설하야 도중을 취집함이 천만으로 계한지라 대법한 최제우를 신원한다 칭하고 왕재계사에 기도제 수천인으로 진궐진 소타가 선즉해산하고 또 보은장내에 다중을 취집하얏을 시에 순무사의 선유함을 인하야 각자산거러니 갑오춘에 거하야 피고의 도당 전봉준 과 손화중 등이 고부지방에 당우를 소취하야 승기표기하야 관사를 장살하며 성진을 함복하야 양호지지가 미란피탕한 경에 지하니 피고가 차에 지사화응한 사난 무하다 하나 란계와 얼한을 구하면 피고의 주부감중함에 곡함이오 피고 황만기는 거갑오5월에 동학 임학선의 협늑을 수하야 입도하야 선즉귀화하얏다가 작년7월에 또 임학선의 언을 청하고 상도지지에 대종선생을 의불가불견이라하야 도명한 최시형을 방견하고 어선을 궤유하얏고 피고 송일회는 갑오4월에 동학에 투입하야 최시형이 청산군지방에 재할 시에 1차방견한 후 지 금년정월하야 소친동도 박윤대처에서 최시형이가 이천군지방에 주재함을 문득하고 옥천인 박가처에 설급하얏더니 경무청관인의게 피착하야 박윤대와 안동전도하야 원주군지방에 전왕하야 최시형을 포획하얏고 피고 박윤대난 동학에 투입하야 최시형의 여서(女?) 김치구가에 고용타가 경무청관인의게 피착하야 송일회와 구여전도하야 원주지에서 최시형을 획득한 후 인이득방하야 귀도에 소친 동도 박 치경을 봉착하야 해인(該人)에 촉탁(囑託)을 수하야 엽전20냥을 대하고 경중에 전래하야 최시형의 식비를 자조할 차로 경무청에 내도하얏다가 피착한 기사실은 피고등 진공자복에 증하야 석조한지라 차를 법에 소하야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 제사편 금지사무방술숙 일응좌도난정술 혹은장도상소향집중 야취효산양수선사 선혹인민위수자율로 교에 처하고 피고 황만기난 동편동숙 위종자율로 태일백 징역 종신에 처하고 피고 송일회난 동편 동숙 위종자율로 태일백 징역 종신에 처할만하나 피고 최시형을 포획할시에 전도한 효노가 불무하니 본율에 이등을 감하야 태일백 징역십년에 처하고 피고 박윤대난 동편 동숙 위종자율로 태일백 징역 종신에 처할만 하나 최시형 포획할 시에 지도한 공노가 불무한 즉 송일회와 일체히 이등을 감할지나 최시형 재인시에 식비를 자조하랴한 고로 일등분 감하야 태일백 징역십오년에 처하노라.
광무 2년 7월 18일
고등재판소 검사 윤성보 검사 태명식 검사시보 김낙헌 입회선언
고등재판소재판장 조병직
판 사 주석면
판 사 조병갑
예비판사 권재운
예비판사 김 택
주 사 김하건
비고 : 양력 7월 18일에 판결을 내리고 19일에 상주한 후 20일에 형이 집행 되었다.
이때 도인 권재운이 이종훈으로 하여금 성사에게 고하기를『관에서 포졸을 많이 풀어 근경에 있는 동학두목을 수색하고 있으니 반드시 주의하십시오』하므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아무리 화색(禍色)이 박두(迫頭)하였다 할지라도 제자된 의리에 어찌 신사의 시체를 거두지 않으리오』하고 이종훈으로 하여금 교졸 김준식과 함께 밤중에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서『동학괴수최시형』이란 팻말을 보고 가이장된 시체를 거두어 검습한 후 광주에 이르자 성사 이하 두목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광주 송파 이상하의 산에 장례를 지냈다.
■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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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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