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용담정으로부터 2km정도 떨어진 현곡면 가정리에는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께서 태어나신 집터가 있다. 이곳 집터는 수운대신사가 20세 때에 일어난 큰 화재 때문에 집과 아버님의 유물이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로부터 대신사는 처자(妻子)를 울산의 처가에 의탁한 후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된다. 지금은 포덕 112년(1971)에 세운 유허비가 서 있다 |
수운대신사 유허비 대신사의 아버지는 근암(近菴) 최옥으로서 문장과 도덕이 높아 경상도 일대에 사림(士林)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하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근암공은 영조 38년(1762 임오) 3월 23일에 나서 17세 되던 해 10월에 오천 정씨의 가문에서 부인을 맞은 후 37세가 될 때까지 무후(無後)한 채 정씨부인을 사별하고 그 이듬해에 달성 서씨부인을 재취하였다. 그러나 51세 때에 역시 서씨부인도 사별(死別)하게 되어 아우 규의 아들 제환을 양자로 들였다. 근암공이 63세 되던 해 1월 15일 가정리 본택 내실에 우연히 들어가니 낯설은 부인이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이상히 여겨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오늘 낮에 밖에 나가보니 대추나무 아래 낯 모를 부인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으므로 우선 방에 들여다가 뉘였습니다.』 한다. 얼마 후에 그 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근암공이 그 내력을 물었더니 부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금척리(金尺里)에 사는 한씨 과부로서 20살 때에 홀로 되어 10년간 친정에서 수절을 하던 중, 오늘 새벽에 홀연히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해와 달이 품안에 안기고 이상한 기운이 몸을 둘러싸더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곳까지 왔나이다.』 하였다. 도학자(道學者)인 근암공도 이 말을 듣고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 날부터 한씨부인과 부부의 의(誼)를 맺었더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드디어 이 해 10월 28일 한씨부인이 옥동자를 순산하였는데 이 분이 바로 뒷날 후천개벽의 대성자(大聖者)가 된 수운대신사이다. 수운대신사께서 탄생하던 날 하늘은 씻은 듯이 맑게 개어 있었고 바람은 가볍게 불어오는데. 오색 구름이 집을 두르고 이상한 향기가 산실에 가득할 뿐 아니라 집 앞 구미산이 사흘을 크게 울었다. 대신사가 탄생한 경주는 신라 때 왕도로서 천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곳이요 한국 불교문화의 정수를 드러낸 곳이다. 그리고 구미산은 경주시에서 서쪽으로 약 25리 상거에 있는 경주의 주산이다. 우리 나라의 십대명산과 같이 그렇게 높거나 험하지는 않으나 경주 부근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요, 산이 웅장할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 기암괴석이 널려 있고 가정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5리 상거에 위치해 있다. 「몽중노소문답가」에 그려진 대신사의 모습과 재질을 보면 『얼굴은 관옥이요 풍채는 두목지라 그럭저럭 지내나니 오륙세 되었더라. 팔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무불통지 하여내니 생이지지 방불하다. 십세를 지내나니 총명은 사광이요 재국이 비범하고 재기과인하니...』란 것을 보아도 그 청수(淸秀)한 풍모와 출중(出衆)한 총명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신사께서는 점점 성장하면서 모든 일을 범연히 보아넘기지 않고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회의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또는 비방을 받기도 하였다. 대신사께서 다섯살 때에 어머니에게 묻기를 『아버지께서는 의관을 벗으시고도 안방과 사랑방을 마음대로 출입하시는데 어머니는 왜 문밖을 자주 나다니시지 못하고 안방에만 계십니까?』하였다 한다. 이것은 당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차별상이 후천개벽의 대성사가 될 어린 대신사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날 아버지에게 묻기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보면 먼저 절을 하는데 아버지는 왜 먼저 절할 줄을 모르십니까?』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근암공댁에 남녀 종이 있어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렸고 이웃 사람들도 근암공을 대하면 의례히 먼저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근암공은 그대로 절을 받기만 하였기 때문에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하고 하인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이 근암공에게 『아무 대감님이 행차하셨습니다』하고 아뢰이니 근암공은 신발을 찾아 신기가 바쁘게 대문 밖까지 나아가 그를 영접한 후 방안에 들어와 다시 맞절을 하였다. 대신사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을 하는구나! 우리 아버지께 절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의심과 불평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 대감이란 사람이 돌아간 후에 어린 대신사는 아버지에게 질문하여 반상의 차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대신사께서 여섯살 때에 어머니 한씨 환원하자 이때부터 대신사는 제환의 부인인 형수에게 의탁하는 몸이 되었다. 대신사께서 17세 되던 해 2월 20일에 아버지 근암공이 79세로 환원하시니 양친을 모두 잃은 외로운 몸이 되었다. 대신사께서 20세(1843)때에 큰 화재로 인하여 가산과 모든 유물이 타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대신사께서는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금치 못하는 말씀을 남겼다. 『아버지 근암공께서 평생토록 쌓아올린 유산들과 또 근암공이 일생동안 연구해 오던 고전유적까지도 모조리 소실되어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으니 자손불초(子孫不肖)의 여한(餘恨)은 세상 살아갈 힘을 잃은 것같다. 어찌 안타깝지 않으며 애석하지 않으랴』「수덕문」 애석한 심정의 정도를 지나 충격적인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같은 표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신사는 더욱 울적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같은 자책지심(自責之心)과 후회스러운 마음이 가실길 없는 형편에 또한 가정을 유지해나갈 생업조차 막연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대신사께서는 집을 다시 짓고 전래의 가업에 충실하느냐,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구도생활(求道生活)에 나서느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커다란 포부를 갖고 있던 대신사께서는 전래(傳來)의 가업(家業)을 버리고 그 해에 구도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가옥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가솔은 울산 처가에 의탁한 후 구도의 고행길을 밟게 되었다. 집을 떠난 대신사께서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역방하고 인심 풍속을 살피면서 정처없이 다녔다. 때로는 활도 쏘고 말타기도 익히며 장사도 하는 등 인간만사를 모두 경험해 보는 동시에 음양점술의 글까지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필경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게 되자 이후 부터는 순전히 세도인심(世道人心)과 시운시변(時運時變)하는 사회환경을 살피기에 힘쓰면서 오직 청려를 벗을 삼아 동으로는 금강산, 서쪽으로는 구월산, 남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묘향산 등 이렇게 넓은 지역의 산천을 편답하면서 큰 절에 이르러는 고승대덕(高僧大德)들과 불법서경(佛法書經)을 토론하고, 큰 마을 서당에 들리면 선비들과 담론(談論)도 벌였다. 다음의 가사 내용으로 그 상황이 설명된다. 『처자산업 다버리고 팔도강산 다 밟아서 인심풍속 살펴보니 무가내라 할길없네 우습다 세상사람 불고천명 아닐런가 아사서라 아사서라 팔도구경 다던지고 고향에나 돌아가서 백가시서 외어보세..... 10여년간에 걸쳐 유리 방황하던 구도자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고행길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는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대신사의 나이 31세 되던 해 (1854)에 이르러서는 생각을 다시하고 정착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해 10월에 울산 처가에 가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동거하게 되었다. |
■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이용 |
| ||
자가용 이용 |
| ||
*경주시청 홈페이지→문화관광→관광도우미→교통사이트 참조 -- 경주시청 홈페이지 바로가기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