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유적지] 제암, 고주리
명칭 | 제암, 고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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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수원 화성지역 주민들의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 |
주소 | 경기 화성시 팔탄면 고주리 |
방문자 수 | 3816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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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암리 사건은 발안 장날시위 등 수원 화성지역 주민들의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응징으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의 결정판이었다. 수원 화성 일대의 시위가 폭동화하면서 격렬하게 진행되자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이들 지역에 파견하였다. 검거반은 1919년 4월 2-6일, 9-16일 2차에 걸쳐 이들 지역을 돌며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들을 습격 방화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암리사건의 전주곡이라 할 수촌리사건이 일어났다.
수촌리사건은 4월 2일 장안면과 우정면 주민들이 합세하여 벌인 격렬한 독립 만세 시위가 그 도화선이 됐다. 4월 3일 오전 장안면 수촌리와 석포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우정면 주곡리 일대의 시위대와 쌍봉산에서 합류하여 집회를 가진 뒤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2천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은 총을 쏘며 맞서는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뒤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였다. 면사무소가 파괴된 것은 물론 주재소가 불에 타고 일본인 순사까지 살해를 당하자, 일본군 검거반은 수촌리를 그 진원지로 파악하고, 그곳의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기 위해 4월 5일 새벽 3시반경에 수촌리를 급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검거반은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 검거반은 4월 11일에도 수촌리를 비롯한 장안면, 우정면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렇게 두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검거작전은 이 지역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응징의 성격이 짙었으며 4월15일 제암리사건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3월 30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군중 3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자 사사카(佐板)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밖의 삼괴 지역으로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3월 30일의 발안장날을 이용한 독립 만세시위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3월 30일 정오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시작된 장날시위는 삽시간에 8백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의 독립만세 물결로 퍼져 나갔다. 군중들이 발안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자 일본 순사들은 위협사격을 가했고,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급기야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롤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가 칼에 맞아 순국하였고, 제암리·고주리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고주리 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렇게 발안장날 시위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의 제휴를 기본축으로 하여, 폭력까지 수반하여 격렬하게 진행된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더불어 제암리 감리교회의 지도자 홍원식(대한제국 군인 출신, 군대해산후 수원 일대에세 의병장으로 활약, 1914년 제암리로 이주하여 서재를 세우고 교육계몽운동 전개), 안종후(제암교회 설립자) 등과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성렬 등이 종교의 차이를 떠나 거족적 차원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구국동지회'가 만세시위의 배후에 있었던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제가 자행한 보복학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30일, 4월 5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나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다. 증언 자료들을 종합하여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①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②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③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④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⑥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⑦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⑧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⑨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⑩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⑪ 군인들이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총살했다.
진행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토벌 작전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들이 일본인들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제암리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한 것이라든가, 순사 보를 통해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고주리에 천도교 지도자들을 파악해 살해한 것 등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사건 이튿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현장을 확인하러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코필드선교사는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수차 왕래하며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암리사건은 제암리·고주리사건이라 불러야 합당하다.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는 비록 면 단위는 달랐지만 경계를 맞대고 이웃해 있는 마을들로서 발안장날 시위를 비롯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군의 학살만행 또한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선상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제암리사건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것이 외국인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의 관심이 제암교회에 대한 방화와 기독교인 학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흔히 제암리 기독교인들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만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암리의 경우만 해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천도교인이고 독립만세운동은 고주리의 경우 천도교 지도자 가족 6인으로 희생자 23명 가운데 11명이 천도교인으로 10명의 기독교인(종교미상 2명) 못지않은 수를 차지하였고, 고주리의 경우는 6명 모두가 천도교인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는 천도교인(17명)이 기독교인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제암리·고주리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제휴를 기본동력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홈페이지 에서 발췌>
※ 천도교에서는 매년 4월15일 전 시일 날에 위령식을 봉행 합니다.
내 용 : 3.1운동 제암 고주리 순도순국 선열 합동위령식
장 소 :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문화관
주 최 : 천도교 수원교구 청년회
주 관 : 천도교 제암, 고주리 선열 추모사업위원회
후 원 : 천도교중앙총부, 여성회, 청년회본부, 대학생단, 서울교구, 화성시청, 화성시문화원, 제암리부녀회, 제암순국선열유족회, 향남면 주민자취위원회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홈페이지 -> http://www.jeam.go.kr
의암성사(義菴聖師)와 3.1독립운동
(1) 봉황각 건축과 전국 교역자 특별수련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에 대한 남다른 결의를 다지고 있던 의암성사는 전국의 교역자들에게 먼저 독립의지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 수련도장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다. 포덕 52년(1911) 어느 날 의암성사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공과 세상의 이목을 피해 우이동 골짜기에서 밀회(密會)를 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논의한 적이 있었다. 이 해 가을 의암성사는 춘암상사를 비롯한 총부 간부진을 대동하고 다시 우이동 심산유곡을 찾아가 금융관장 윤구영(尹龜榮)에게 우이동 계곡 일대의 산림지대를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윤구영은 이 일대 임야와 밭 2만7천946평을 매입하고 이곳에 수련도장을 짓기로 했다. 공사는 다음해(1912) 3월 7일 기공하여 누각 모양의 28평 남짓한 목조 기와집과 내실(18평 2홉) 및 부속건물(8평 3홉)을 완공하고 6월 19일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 건물을 봉황각(鳳凰閣)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포덕 54년(1913) 4월에 12칸짜리 건물을 더 지어 수련도장으로 사용하였으나 이 건물은 3.1독립운동 후 헐어버렸다.
의암성사는 장차의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봉황각에서 전국의 고위교역자 483명을 49일씩 7회에 걸쳐 특별연성수련을 시행했다. 제1회 수련은 포덕 53년(1912) 4월 15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오영창(吳榮昌)을 비롯한 21명이 참가했다. 그 때는 봉황각이 완공되기 전이어서 그 위쪽에 있는 도선암(道詵庵)에서 수련했다. 그 후 계속해서 제2회 49명, 제3회 49명, 제4회 49명, 제5회 105명, 제6회 105명, 제7회 105명의 교역자가 포덕 55년(1914) 3월 25일까지 봉황각에서 일곱 번에 걸쳐 연성수련에 참가했다. 3년에 걸쳐 시행한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하여 의암성사는 이신환성(以身換性)과 성령출세(性靈出世)에 대한 법설을 위주로 강론하였다. 의암성사는 연성의 묘법이 이신환성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형한 나를 무형한 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신의 나’로부터 생기는 모든 인연을 끊는다면 자연히 ‘본연한 성령의 나’가 된다고 하면서 사람은 평소에 견실한 수양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흔들리게 되므로 반드시 수련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생명의 주의화(主義化)를 강조한 것으로, 때가 닥치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인내천(人乃天), 성신쌍전(性身雙全), 규모일치, 무체법경 등 많은 법설을 강론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천도교가 3.1독립운동 당시 전국 조직망을 가동하여 일제히 궐기할 수 있었던 정신적 원동력이 이때의 연성수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1독립운동과 관련해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에서는 포덕 110년(1969) 9월 18일에 봉황각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보다 앞서 포덕 77년(1936)에 재정난으로 봉황각 부지 7,904평을 매각한데 이어 포덕 107년(1966)에 다시 480평을 매각하여 현재 19,562평으로 줄어들었다.
(2) 독립자금 마련 위해 대교당 신축
중앙총부는 대교당 신축과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3.1독립운동 전해인 포덕 59년(1918) 4월 4일 부구총회(部區總會)에서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매 교호당 10원 이상씩의 건축특성금을 10월 28일 대신사 탄신기념일까지 내도록 하였다. 모금이 시작되자 총독부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한성은행(漢城銀行)에 3만원, 상업은행(商業銀行)에 3만원, 한일은행(韓一銀行)에 6천6백원 등 모두 6만6천6백원의 예금을 동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많은 교인들은 논밭과 황소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교인들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축성금을 되돌려 받은 것처럼 위장하기도 하고, 성금액수를 10분의 1로 줄여 기장(記帳)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당건축성금으로 약 1백만 원의 거액이 모아졌다. 그중 대교당과 중앙총부 청사 건축에 사용된 27만여 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성금이 3.1독립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총부는 교인들이 낸 성금으로 이 해 가을에 윤치오(尹致旿) 소유의 경운동 88번지 대지를 2만원에 매입하고 그 인근 부지를 더 매입하여 모두 1,824평을 마련하여 이 해(1918) 12월 1일 교일기념일에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하였다.
대교당 건축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中村與資平)에게 의뢰했다. 이것은 국내 최대 규모의 교당을 짓기 위해서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제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에게 설계를 하도록 한 것이다. 3.1독립운동으로 주춤했던 건축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건축허가를 신청했으나 예상했던 대로 설계미비를 이유로 허가가 거부되었다. 이유는 원래의 대교당 설계가 현 대교당의 갑절이나 되는 초대형 건물인데다가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은 후 이 해(1918) 7월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방해를 막기 위해 총감독 역시 일본인 후루다니(古谷虎市)에게 맡겼고, 건축청부는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에게 맡겨 포덕 62년(1921) 2월에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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