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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문(師門)유족들의 수난
포덕9년(1868) 10월에 공생(孔生)이라는 사람이 상주 동관암(尙州 東關岩)에서 대신사의 가족을 달래어 영월 소밀원(寧越 蘇密院)으로 이거케 하였다.
포덕12년(1871) 5월 해월신사는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 단양을 거쳐 영월 소밀원(寧越 蘇密院)에 있는 대신사의 가족을 찾아갔다. 세정(世貞)이 연루(連累)의 화(禍)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신사 일행을 집에 머물게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강요하므로 신사 일행은 할 수 없이 다시 이 곳을 떠났다.
포덕 13년(1872) 1월에 신사께서 강수와 함께 소밀원에 나아가 박씨사모를 뵈었다. 박씨사모는 신사를 보고 전년에 세정이 연루(連累)의 화를 두려워하여 신사 일행을 집에 머물지 못하게 강박한 일을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작년의 일은 인정(人情)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들의 박절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니 행여 관심치 말라』 고 위로하고 그동안 고생하던 일을 말하므로 신사께서 양미(粮米)를 후(厚)히 주선하여 드린 후에 곧 길을 떠나 순흥(順興) 김태일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신사께서 김태일의 집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세정의 처가 따라왔으므로 신사께서 놀래 연고를 물었더니 세정이 방금 양양 포졸에게 잡혀 갇히었다고 하였다. 신사께서 강수와 함께 밤을 타서 소밀원에 나아가 박씨사모와 두 딸을 남복(男服)으로 변장시킨 후 대신사의 가족 전부를 인솔하고 급히 도피하여 박용걸의 집에 돌아오니 박용걸의 집에서는 온 가족이 기뻐하며 조금도 난색이 없었다. 그 후 신사께서 강수, 유인상과 더불어 대신사의 가족을 보호하는데 대해 상의(相議)한 후에 홍석범, 안시묵, 김경순 등 여러 사람에게 그 주선의 책임을 맡겼다.
■ 찾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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