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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담유사 간행(龍潭諭詞 刊行)
포덕 22년(1881) 6월에 신사께서 다시 개간소(開刊所)를 단양군 남면 천동(丹陽郡 南面 泉洞)(샘골)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개설(開設)하고 국문가사 팔편(國文歌詞 八篇)을 간행(刊行)케 하니 이것이 곧 용담유사(龍潭遺詞)이다. 이때의 임원은 김연호(金演鎬), 김영석(金榮錫), 장춘보(張春甫), 김치운(金致雲), 이찬보(李贊甫), 김현경(金顯卿), 장세원(張世遠) 등이었다.
이 해 10월에 신사께서 정선군(旌善郡), 유시헌(劉時憲)의 집에서 특별성력(特別誠力)으로 고천식(告天式)을 행할 때 예식(禮式)이 끝난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우리 도인이 어육주초(魚肉酒草)를 금(禁)한지 어언 7주년이라 이제 강화(降話)의 교(敎)로써 이를 해금(解禁)하노라』하였다. 포덕 23년 (1882) 3월 10일에 신사께서 대신사의 조난 추모식을 거행하고 말씀하기를 『금년에 국가에 내홍(內訌)이 있으리라』하였는데 이 해에 과연 서울에서 큰 군요(軍擾)가 일어났으니 이것이 곧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 찾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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