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인간관 > 천도교개관(한글)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천도교
  • 천도교개관(한글)
  • 천도교

    .

    천도교 소개

    페이지 정보

    본문

    인간관

     

    어느 종교나 사상을 불문하고 인간을 만물의 가장 존귀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천도교에서는 인간을 다만 존귀한 존재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한울님’과 더불어 ‘무궁한 존재’로 보고 있음이 그 특징이 된다.



    이와 같이 ‘유한적 존재’인 인간을 신과 같은 ‘무한적 존재’ 곧 ‘무궁한 존재’로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시천주(侍天主) 사상 때문이다. 곧 사람들 모두가 그 내면에 매우 주체적으로 무궁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천도교의 인간관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대신사는 이 ‘시(侍)’라는 글자에 대하여 『동경대전』 「논학문」 가운데 주문(呪文)을 해석하는 대목에서 “시(侍)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서(外有氣化), 한울님과 내 몸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깨달아서 그 마음을 옮기지 않아야 한다(各知不移)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侍)’의 상태란 다름 아니라, 안으로는 신령스러운 영(靈)이 있음을 느끼며, 밖으로는 어떠한 신비한 기운과 동화(同化)를 이루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나와 한울님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 이렇듯 대신사가 설명을 하고 있는, 안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영(靈)’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니라 ‘나’의 주체인 한울님 마음이 된다. 그러면 밖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과의 동화(同化)’란 무엇인가? 이는 곧 내 몸 안의 기운이 내 몸 밖에 있는 한울님 기운과 서로 일치함으로써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하겠다. 이는 안팎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영(靈)인 한울님 성령(性靈)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안으로는 신령이 자리하게 되고, 밖으로는 이 신령과의 동화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안과 밖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신령(神靈)’은 ‘기화(氣化)’를 통하여 활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기화(氣化)’로 이룩되는 ‘신령(神靈)’의 활동을 각기 깨우쳐서 한울님과 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대신사는 ‘각지불이(各知不移)’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천주의 ‘시(侍)’란 신령(神靈)스러운 한울님 마음과, 기화(氣化)라는 한울님의 실천적 삶이 하나가 되어 각지불이(各知不移)를 통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시천주(侍天主)란 곧 내 안에 자리한 한울님, 곧 나의 ‘참주체’가 되는 영(靈)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한 치도 그 뜻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며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진아(眞我)이며 또한 우주의 본체인 한울님을 자신의 안에서 회복할 수 있으므로, 대신사는 이 ‘시천주(侍天主)’로 천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삼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천주’의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추구하며, 인간이 이 우주에 화생(化生)할 때 한울님으로부터 품부(稟賦)받은 바로 그 천심(天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는 곧 자신의 삶 속에서 ‘한울님 마음’을 한 치도 어김없이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천주’는 곧 인간이 태어날 때의 가장 순수한 마음, 즉 인간 본연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된다.


    즉 시천주란 무궁한 존재인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그 무궁한 한울님의 삶을 나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 역시 무한한 한울과 더불어 ‘무궁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인간관은 바로 이러한 이치를 통하여 ‘무궁한 나’를 깨달아 감으로써 한울사람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무궁한 나’로서의 존재를 깨달아 가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세상을 열어가는 데에 있어 가장 필요한 이상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즉 이는 각자위심(各自爲心)에 물들어 자신의 이기주의적 탐욕만을 찾아 서로 다투고 싸우는 세태 속에서, 한울님의 덕을 회복하고 또 한울님의 덕과 일치하는(與天地合其德) 삶을 영위함으로써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세상을 지향하는 지상신선(地上神仙)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본질을 한울님과 같은 ‘무궁한 존재’로 본 천도교의 인간관은 전대(前代)의 어느 성인(聖人)도 천명하지 못한 대신사의 매우 독특한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천도교의 인간관은 대사회적(對社會的)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다만 어느 특정한 신분의 사람만이 ‘무궁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몸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빈부(貧富)나 귀천(貴賤)의 구분 없이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무궁한 존재로서 평등하다는 본질적인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천도교의 인간관은 신분과 제도로 존비(尊卑)의 차별이 분명했던 봉건사회를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는 인간관이라 하겠다. 즉 천도교의 인간관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지나며, ‘모든 인간은 무궁한 존재로써 평등하며, 또 평등해야 한다’는 그러한 자각을 억압된 민중들에게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차원을 달리해서 인간 스스로 무궁한 신과 더불어 무궁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자각을 불러주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원적 만인 평등의 사상과 아울러 질적 차원의 변화를 통하여 무궁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불균형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불안한 현실과 비전 없는 내일을 살고 있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인간관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면서 ‘물화(物化)와 소외(疎外)’라는 전도(顚倒)된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현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미래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무궁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나’를 자각함으로써 체득(體得)하게 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지상천국이라는 새로운 미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오늘날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새로운 인간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