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중심으로 탑골공원을 성역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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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중심으로 탑골공원을 성역화하라
- 3·1운동의 중심에 의암 성사가 있다
의암 손병희 성사 동상 제막식(출처 : 서울정보소통광장)
3·1절이 다가온다. 몇 해 전에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한 것 같은데 올해가 벌써 106주년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을 뒤덮었고,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까지 넘실댔다.
유구한 역사를 자주민으로 살아온 대한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 자유민으로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이 3·1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의 맨 앞줄에 민족대표 33인이 있었다.
우리 독립운동 사상 최대이며 최고의 성과라고 일컬어지는 3·1운동의 성공에는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선생은 천도교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3·1운동에 집중했다. 선생은 3·1운동의 성공을 위해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을 정하고 민족대표를 선정했다. 처음에는 명망있는 구한국 관료를 인물로 민족대표를 구성하려고 했으나 이들이 거부하자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찾아 기독교와 불교와 연합해 33인의 민족대표를 선정했다. 민족대표에는 전국의 명망있던 천도교 중진 15명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의 민족대표 선정,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등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3백만 교도의 국내 최고의 종단으로 천도교를 성장시켜 3·1운동을 영도한 인물이 선생이었다.
(3·1운동계보도(1919.3.22. 조선총복부)의 손병희, '대수령'으로 표기)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들었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승전보를 울렸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난(至難)한 독립운동 속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우리의 해방이 연합국의 전리품이었지만, 3·1운동으로 시작한 지난한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의 건설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현대사는 3·1운동을 기점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다시 찾은 조국의 땅을 밟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영도한 의암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귀국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3·1절을 맞아 여러 차례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선생은 자신의 갈 길을 열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천도교는 3.1운동 이후에도 국내에서는 어린이 운동으로 대표되는 신문화운동, 6·10만세운동, 신간회 운동, 조국광복회 운동, 멸왜기도 운동 등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외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만주와 연해주에서 전개된 무장 독립전쟁에도 천도교인들이 동참하였다.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는 의암 선생의 뜻을 잇겠다는 교인들의 결기가 담겨있었다.
해방 이후 천도교단에서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공간인 탑골공원을 독립운동의 성지로 만들려고 했다. 1950년 천도교인들은 탑골공원을 ‘3·1혈쟁발상지(血爭發祥地)’로 명명하고 “독립운동기념비”의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동족 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러나 천도교에서는 3·1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탑골공원이 독립운동의 성지로서의 위상을 되찾은 것은 1966년 5월 19일 의암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면서 이루어졌다.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선생의 동상 건립은 당시 국민 성금이 약 450만 원을 모금한 범정부차원의 사업이었다. 이날 동상 제막식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이 대독한 대통령의 추념사에는 “(손병희 선생) 동상이 공원의 한낮 장식에 그침이 없이 부단한 경각과 격려의 표상으로 남아 자주, 자립, 번영의 새 한국을 세워나가는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을 기원하면서”라며 선생의 업적을 칭송하고 선생의 정신을 대한민국의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자고 강조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거룩한 선생의 정신과 업적은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불굴의 용기와 역량이 대외적으로 널리 인식되어 한국 독립에 있어서 국제적 협조를 얻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라고 선생의 독립운동을 찬양하며 동상 건립의 의미를 되새겼다.
동상 건립 이후 천도교에서는 매년 3·1절 기념식을 갖고 탑골공원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선생의 동상을 참배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탑골공원의 상징과 같은 의암 선생의 동상이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의암 선생의 동상을 옮기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탑골공원이 고려시대 흥복사라는 절이 조선시대 원각사로 바뀌었고 이후 폐사된 절의 10층석탑이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탑골공원이 우리 역사에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06년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진원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3·1운동의 중심에 의암 선생이 있다.
(동상 제막식 후 기념촬영(가운데가 주옥경 종법사))
탑골공원의 성역화사업은 필요하다. 우리 민족사의 상징인 이곳 탑골공원이 서울의 랜드마크로도 인식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성역화사업을 통해 잃어버린 탑골공원의 명성을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탑골공원의 역사적 상징을 지닌 의암 선생 동상을 중심으로한 3·1운동에 대한 시설 확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탑골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살리는 성역화사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탑골공원은 독립운동의 상징이 아닌 그냥 서울의 흔한 유적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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