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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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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목적을 통해서 본 천도교

     

    천도교의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은 동귀일체의 세상을 이룩하여 이 지상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천국을 건설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가 지향하는 후천개벽이기도 하다.



    천도교는 그 종교적 목적이 매우 뚜렷한 종교이다.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은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이다.


    매우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천도교의 종교적인 목적은, 실은 선천(先天)의 기성종교들이 지향하는 종교적인 목적인 천당(天堂)이나 극락(極樂)이라는 차원의 변화, 또는 공간의 변화를 통한 영생(永生)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즉 ‘천당과 지옥’,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 ‘신과 인간’ 등의 이원적(二元的) 구도를 벗어나고 있는 데에 천도교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인 ‘지상천국 건설’은 단순히 현세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의 질적(質的)인 변화와 대전환(大轉換)을 의미하는 것으로,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 ‘차안과 피안’ 모두를 포괄하는 궁극적인 장생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가 표방하는 종교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천도교는 어떠한 종교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1) 포덕천하의 대업과 천도교

     

    천도교는 서기 1860년(경신년) 4월 5일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대신사에 의하여 창도(唱道)된 종교이다. 수운대신사는 오랜 구도(求道)의 생활을 통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올바르게 구할 수 있는 도를 찾던 중, 경신년(1860년) 4월 5일에 이르러 한울님을 만나고 또 한울님으로부터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대신사가 한울님으로부터 도를 받은 경신년(1860)을 천도교에서는 포덕(布德)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다.


    결정적인 종교체험 이후 대신사는 한울님으로부터 세상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고, 세상에 이를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침을 펴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서양의 ‘religion’ 이라는 말의 번역어인 ‘종교(宗敎)’라는 말이 없었고, 다만 ‘도(道)’, ‘학(學)’, ‘교(敎)’ 등의 이름들이 오늘의 ‘종교’라는 낱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대에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道雖天道 學則東學)” 라는 대신사의 명명(命名)과 함께 동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포덕 46(1905)년 12월 1일에 이르러 당시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성사에 의하여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함으로써, 동학은 오늘날 불리고 있는 천도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수운대신사가 펼쳤던 동학의 요체는 곧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는 타락한 이기주의에 물든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만물의 근본이 되는 한울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한울님 마음을 회복하여, 한울님이 이 세상에 펼친 덕화(德化)에 따라 살기를 강조하는 가르침이었다. 즉 세상이 어지럽고 또 서로 다투고 헐뜯는 혼란을 거듭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의 본질이 되는 한울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타락한 이기주의적인 성향만을 강조하는 각자위심의 삶을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대신사는 『동경대전』 「포덕문」 중에서, “근년에 이르러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으로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천리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아, 결국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은 타락한 이기주의인 각자위심의 삶에서 벗어나 천명(天命)과 천리(天理)를 따르는 삶을 펼쳐나가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한울님을 각자의 몸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자각과 함께 한울님의 존재를 깨닫고, 나아가 한울님이 모든 만물에게 편 덕화(德化)의 그 고마움을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천도교인 역시 이 한울님의 덕을 온전히 체득하여 온 세상에 폄으로써 한울님의 뜻인 포덕천하(布德天下)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천도교는 곧 포덕천하의 대업을 지니고 있는 종교라고 하겠다. 즉 포덕천하를 통하여 천명(天命)과 천리(天理)에 따라 사는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인류, 나아가 모든 만유(萬有)가 본원적으로 같은 생명의 근원을 지닌 동포(同胞)라는 자각 속에서 평등과 평화를 구가하는 세상을 이룩하는 데에 천도교 가르침의 본의가 있는 것이다.

     

    2) 광제창생과 보국안민

     

    천도교의 중요한 목적인 포덕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도탄에 빠져 힘들게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그 도탄 중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도교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을 그 중요한 종교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잘못된 관념과 타락한 이기주의인 각자위심으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삶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곧 이들 세상 사람들을 도탄에서 구하는 광제창생의 길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광제창생과 함께 보국안민(輔國安民), 곧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모든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보국안민’ 또한 천도교의 중요한 종교적인 목적이 되고 있다. 특히 대신사가 도(道)를 펼치던 조선조 말기, 곧 19세기 중엽은 서양의 열강들에 의하여 위협적인 통상(通商)이 요구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들어오는 서학에 의하여 우리의 민생은 정치적·사회적, 나아가 문화적인 혼란까지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서양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의한 세력 확장과 서학의 전래는 당시 조선 사회를 비롯한 동양 사회 전반을 불안과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 대신사는 국가적·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보국안민의 기치를 세우기 위해서는 당시 집권층인 양반들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 역시 이와 같은 현실을 깊이 자각하여,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당시 국가적·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힘의 소재가 다만 특정한 집권층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민중들 스스로 국가적·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일깨워주었다. 곧 민중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존재, 그 주체임을 눈뜨게 했던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천도교가 지향하는 보국안민의 정신은 역사적으로는 민중들 스스로, 민중들의 힘에 의하여 역사의 주체가 되어, 그 역사를 매우 주체적으로 열어가는 근대적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면에서 천도교는 매우 자생적(自生的)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우리의 역사 속에서 열어간 그러한 종교·사상이며, 19세기 중엽이라는 봉건의 시대에 서구의 충격이 아닌, 자생적인 근대의식을 펼쳐나간 가르침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종교라고 하겠다.


    수운대신사 이후 이 보국안민의 정신은 해월신사에게로 이어져, 서양의 열강(列强)을 비롯한 일제(日帝)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19세기 말엽,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을 주도함으로써 민의(民意)를 집결시켜 외세(外勢)라는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게 되었다. 또한 의암성사에 이르러 보국안민의 정신은 국가와 민족의 독립정신으로 승화되어 3·1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춘암상사에 이르러 일제의 식민정책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구국(救國)을 위한 무인멸왜기도(戊寅滅倭祈禱)로 이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신은 8·15 광복 후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즉 천도교는 그 종교적인 목적인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의 정신으로 부당한 침략 침탈과 싸우며, 협의(俠義)에서는 민족의 독립운동을 펼쳐나갔고, 광의(廣義)에서는 인류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열어갈 수 있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운동’을 전개시켜나간 종교라고 하겠다.

     

    3) 후천개벽과 동귀일체의 세상

     

    대신사는 각자위심에 의하여 혼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이 시대를 선천(先天)의 마지막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선천의 마지막 시대에 이르러 세상은 그 운(運)이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양상을 대신사는 『동경대전』「포덕문」에서 “나쁜 질병이 온 세상에 퍼져서 백성 모두가 한 시도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것 역시 상해(傷害)의 운수이다(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 是亦傷害之數也)” 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과 혼돈은 결국 새로운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맞이할 그러한 운수의 조짐이라고 대신사는 말하고 있다. 즉 선천의 운이 다하여 머지 않아 후천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대신사의 가르침이다. 대신사에 의하면 선천은 낡고 부패한 세상으로 보았다. 즉 불순천리(不順天理)의 무너진 도덕으로 인하여 상해지수(傷害之數)에 허덕이는 당시의 시대적 위기를 대신사는 선천의 괴질운수(怪疾運數)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지양하고 새로운 후천의 세계를 열고자 하는 것이 곧 대신사가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은 궁극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신사는 이와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가고자 새로운 개벽, 곧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그 중요한 사상으로 내놓게 되었다. 후천개벽이란 물질의 개벽만이 아니라 정신의 개벽을 아울러 의미한다. 즉 ‘시천주(侍天主)’를 통하여 각자위심(各自爲心)에 물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기운을 모두 한울님의 마음과 기운으로 바꾸는, 그런 정신의 개벽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곧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을 깨달음으로 해서 한울님의 덕(德)과 일치하는 경지'를 뜻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정신개벽을 한 사람을 동학에서는 ‘군자’, 또는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고 부른다.


    군자나 지상신선은 궁극적으로 ‘무궁한 나’로서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으로, 곧 한울님의 덕(德)을 체득한 사람이며, 나아가 당시의 타락한 시대적 위기 속에서 가장 요구되고 있는 이상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군자’나 ‘지상신선’은 선천의 기성종교나 가르침과 같이,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곧 반상(班常)의 구분이나 귀천(貴賤)의 구별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자도 되고 지상신선도 될 수 있다는 것이 대신사의 지론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상신선들에 의하여 이룩된 세상, 즉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상신선의 경지를 이루는 세상이 곧 후천개벽의 세상이며, 동시에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세상이기도 한 것이다. 동귀일체(同歸一體)란 이기적인 개체만을 내세우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반대가 되는 개념으로, 한울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아 한울님과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지공무사(至公無私)한 한울님의 마음을 지닌 지상신선들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는 개체를 뛰어넘어 ‘우리’라는 공동의 장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하고 또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이 동귀일체의 세상이 곧 천도교에서 지향하고 있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이기도 한 것이다. 즉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의 궁극적인 모습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한울님 마음을 체득한 지상신선들의 공동체인 동귀일체의 사회, 동귀일체의 세상을 이룩하여 이 지상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천국을 이루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가 지향하는 후천개벽이다. 따라서 천도교는 후천개벽의 운(運)과 함께 이 세상에 창도되어, 후천개벽이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질서, 새로운 차원의 삶,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이 지상에 이룩하고자 하는 신종교라고 하겠다.